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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함의 과잉 속에서, 솔직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

by May


누군가에 대한 분노에 차, 그에 대한 얘기를 일기에 적은 적이 있다. 가타부타 따지고 들며 그의 잘못에 대해 나열하다가 끝에 가서는 그를 변호하는 언어를 적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손가락에 이끌려 원치 않는 이해에 도달하는 경험이었다. 일기장을 덮고 곰곰이 생각해도 분노는 여전했다. 나는 손가락에 이끌려, 글이 가진 타협하고 봉합하는 힘에 의해, 가장 내밀한 사유 안에서조차 원치 않는 논리적 이해에 도달하고 만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형은 번번이 일어난다. 글은 마음보다 깔끔하고 단출하게 정리되거나, 때로는 마음보다 훨씬 커다란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마음을 끄집어내려고 쓰기 시작했지만, 솔직함이 아닌 각색된 솔직함이 쓰이는 것이다. 적확한 언어를 찾아 적으려는 시도는 그렇게 미끄러지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언어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순간순간의 내 욕망을 적확하게 말로 표현해 번역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일상화된다면 오히려 정상적인 범주의 상호작용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또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상대와 관계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속내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관계와 상호작용의 원활함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가면의 재료에 가깝다. 타인에 대한 배려나 사회적 예의 같은 특정한 도덕 범주에 근거해, 솔직함이 아닌 협소하게 제한된 상징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그런 한편 세상은 우리에게 '진정성'과 '솔직함'을 요구한다. 나다운 것을 추구하고,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드러내며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반복한다. 하지만 일기장 하나 솔직하게 적지 못하는 우리가, 그 요구를 어떻게 감당하라는 것인가. 솔직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솔직할 수 없음이 인간의 진실에 더 가깝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의 생존방식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자기기만’이라는 단어가 갖는 부정적 뉘앙스는 오히려 이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솔직할 수 없음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야 했던 인간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가치판단을 할만한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성과 솔직함의 신화가 팽배한 현실 속에서 자기기만과 위선은 경멸의 대상이다. 일기장을 쓰다 원치 않는 이해에 도달하는 것처럼, 모순적 신화 안에서 우리는 다시 미끄러진다.


솔직할 수 없음은 우리가 언어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한 피할 수 없는, 가장 아이러니하고도 근원적인 인간의 진실이다. 개인의 무한하고 비사회적인 욕망은 언어로 투사될 수 없다. 자유와 욕망의 발현으로부터 도피하여 사회의 존속을 가능하게 만든 억압적 질서의 수단에 가깝다. 억압이라 썼지만,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할 필요는 없다. 어느 정도의 한계가 없다면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또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한적으로나마 수행할 수 있는 진정성이란 솔직할 수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마는 것일지 모른다. 손가락에 이끌려 원치 않는 이해에 도달했던 것은 내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을 테다. 결국 부정적 감정도 소화를 해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기에 말이다. 솔직함이라는 역설적 요구 앞에서 난 몇 번이고 미끄러진다. 그리고 그 미끄러짐에 대해 생각한다. 이 미끄러짐을 감각하는 것이야 말로 언어와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가장 진실한 태도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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