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모토 타츠키 <룩백>
문해는 사실관계를 따지는 행위도 아니고, 논리와 개연성을 묻는 작업도 아니다. 눈앞에 놓인 사실의 조각들을 퍼즐처럼 짜 맞춰 완벽한 하나의 답을 손에 거머쥘 수는 당연히 없다. 문해는 앞에 놓인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넘어, 주어지지 않은 것을 상상하고 구성하여 재해석하는 행위에 가깝다. 끝끝내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지 않았음에도, 축적된 맥락 위에서 대상의 뒷모습 너머의 표정을 상상하는 일이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룩백>은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룩백을 거칠게 옮긴다. 후지노는 학교 신문에 4컷 만화를 그리는 아이다. 주위의 칭찬을 받으며 기세가 등등하다. 어느 날 집에서 그림을 그리느라 학교에도 오지 않는 쿄모토의 그림이 신문에 실린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압도적인 실력을 마주하고 커다란 좌절을 겪는다. 이후 후지노는 선생님의 요청으로 쿄모토의 집에 찾아가게 된다. 히키코모리였던 쿄모토는 후지노가 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집밖으로 뛰쳐나온다. 그리고 후지노의 팬임을 고백한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고백에 힘입어 다시 그림을 그린다. 둘은 함께 어울리고, 만화를 그리며 성장한다. 후지노는 인물, 쿄모토는 배경. 팀을 이뤄 실제 만화를 출품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자 둘의 방향은 갈라진다. 계속 만화를 그리고 싶었던 후지노, 순수미술을 하고 싶었던 쿄모도는 각자의 길로 나선다. 대학에 진학한 쿄모토는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남은 후지노는 반복해서 같은 가정을 되짚으며 쿄모토를 생각한다. "내가 만화를 따위를 그리지 않았더라면, 쿄모토가 죽지 않았을 텐데"
한 사건이 끝나는 시점, 결심의 순간, 감정이 격해지거나 고양되는 순간마다 <룩백>은 얼굴을 지우고 과감히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쿄모토의 그림을 보고 질투와 열망에 도취된 후지노의 뒷모습, 자신의 만화를 좋아한다는 쿄모토의 말을 듣고 잔뜩 흥분해 비에 젖은 가방을 대충 내팽개쳐 두고 그림을 그리는 뒷모습, 쿄모토를 잃고 상실에 빠져 있지만 자신의 할 일을 담담히 해내는 뒷모습.
뒷모습이란 내 눈에 훤히 보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얄려주지 않는 대상이다. 대상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에 놓여 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간의 서사와 시간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어렴풋한 짐작은 우리를 오히려 더 깊은 공감으로 이끈다.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감정 덕에 생긴 빈자리, 우리는 후지노와 쿄모토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리고 후지노가 지나온 시간을 끌어와 뒷모습 위에 덧씌운다.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지만, 그들의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축적된 맥락과 구성된 해석 위에서 이루어지는 공감이다. 대상의 뒷모습 너머의 표정을 상상하는 일, 문해인 것이다.
뒷모습과 과거, 둘은 직접 주어지는 게 없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뒷모습에는 표정이 없고, 과거에는 확정된 의미가 없다.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는, 비워진 자리에 끊임없이 개입하며 의미를 만들어낸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표정을 상상하듯, 과거를 돌아보며 그것이 내 삶에 자리할 모양을 계속해서 빚어가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쿄모토의 죽음처럼, 현재는 순식간에 과거가 되어버리고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우리의 삶을 확정 지어 버린다.
그 순간의 영향력이 클수록 우리에겐 이해되지 못한 시간으로 남아, 충분히 고통스럽게 만들고 난 후에야 의미를 요구하곤 한다. "만화를 그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후회는 끝내 다른 선택지를 상상하게 한다. 과거를 바꾸기 위함이 아니다. 후지노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기 위해선 해석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같은 뒷모습을 보고도 다른 표정을 상상할 수 있듯, 같은 과거를 두고도 다른 의미를 더할 수 있다. 뒷모습이 끝내 표정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과거 역시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기를 거부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릴 수 있지만 동시에 적어도 어느 순간에는 지난날들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도 있다.
눈앞에 무엇이 놓여 있느냐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해석은 우리를 밑이 어딘지 보이지도 않는 구멍 속으로 밀어 넣기도, 또 꺼내주기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이 세상에 태어난 불완전한 존재로써 취할 수 있는 나름의 생존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끝내 뒤를 돌아본다. 다만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서다. "Don't look back in anger" 과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테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그것을 견뎌야만 함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말처럼, 후지모토 타츠키도 <룩백>을 쓰지 않고서는 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눈앞의 사실들만으로는 완벽한 답을 거머쥘 수 없으며, 삶이 던져놓은 비극의 파편들 앞에서 망연자실할 뿐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뒷모습 너머의 표정을 기어이 상상해 내듯, 우리 역시 지나온 시간의 빈자리에 새로운 의미를 덧씌우며 살아간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성하고, 끝내 확인할 수 없는 슬픔 너머의 안녕을 빌어주는 행위. 이 지독한 문해의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뒤돌아보지 않고 다음 칸으로 넘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