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아프다. 하지만,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이유

by MAY


새벽 3시. 잠이 안 온다.


다시 또 가슴이 두근두근, 이 땅에 자리 잡지 못한 것 마냥 둥둥 떠 있는 마음이 참 불안하다.


아주 작은 순간 하나가 스위치가 돼서 갑자기 오래된 상처가 확 떠올랐다. 분명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었는데, 그동안의 편안함이 기억도 안 날만큼 숨이 턱 막히며 과거의 일이 불쑥 떠오른다.


아주 미묘한 순간의 표정, 느낌, 단어 하나일 뿐이었는데 내 인생의 불청객인 그 기억이란 놈은 순식간에 불씨를 키워 나를 덮쳐버린다.


이런 건 참 기억력도 좋지. 이게 바로 트라우마라고 하는 걸까. 오늘, 또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예전 같지 않다.


이번엔 그 상처에 무너지지 않았다.


분명히 아프고 괴로웠고, 지난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순간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기분이 들 만큼, 아니 내가 세상에서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울지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다. 참 낯설게도 난 생각보다 덤덤했다.


‘어? 나 왜 이러지?’ 싶을 만큼.


상처는 아팠지만, 그 억울하고 분노하는 마음이 예전처럼 나를 확- 휘두르지 못한 거다. 예전의 나라면, 그 감정 하나로 며칠을 헤매고, 혼자 울고, 계속 조금씩 무너졌을 텐데… 이번엔 그냥, ‘아… 또 이런 느낌이구나. 아직 좀 아프구나’ 하고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었다.


상처라는 칼이 나를 휘둘렀지만, 난 끄떡없었고 오히려 두 눈으로 그 칼날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달라진 걸까


난 지난 몇 년 동안 계속, 정말 꾸준히 내 감정과 상황을 객관화하는 연습을 해왔다. 감정을 글로 적고, 마음이 불편할 때면 내가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다.


“너 지금 왜 화났어?”

“뭐가 그렇게 속상했어?”

“그럼 너는 지금 어떻게 하고 싶어?”


이런 질문들을 계속 스스로에게 던지다 보면, 단순한 ‘분노’가 아닌 내 안의 ‘욕구’가 남는다. 후루룩 타오르는 감정을 최대한 달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대학생 시절 유난히도 아빠는 내가 밤늦게 귀가하는 걸 싫어하셨다. 딸을 걱정하는 아빠의 마음이라 생각했지만, 아빠는 직접 나를 데리러 나오신 적은 없다. 어느 날은 7시부터 전화벨이 울리고, 어느 날은 늦은 밤이 되어도 잠잠한 걸 보며 난 깨달았다.


순수한 걱정이 아니라, 통제하고 싶은 아빠의 욕구가 있었던 게 아닐까.


다른 욕구가 충족되어서 기분이 좋은 날은 그 통제욕이 잠잠하지만, 본인의 뜻대로 되지 않아 기분이 언짢은 날에는 자식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커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아빠가 ‘안 들어오고 뭐 하니!!!!!’라고 화부터 내는 것이 아니라, ‘딸이 늦으면 난 왜 이리 화가 날까? 내가 바라는 게 뭐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으시며 본인의 마음속 욕구에 더 집중했다면 우리 모두 더 평안했을 거다. (물론, 그래도 난 아빠를 아주 좋아하고, 존경한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감정에 끌려다니고 휘둘리던 내가 그 끈을 놓고 그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는 순간이 온다. 나를 괴롭히던 감정을 놓고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 감정을 애처롭게 쳐다보면. 내 마음도 아기 달래듯 토닥일 수 있을 거다.




내가 나를 다시 잡아주는 힘


오늘도 갑자기 상처가 찾아왔지만, 그 감정을 ‘나’라고 착각하지 않았다. 그냥 “내 안에서 잠깐 지나가는 감정”이라고 느껴졌고, 그래서 무너지지 않았다. 사실 이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지난 시간 동안 정말 조용하고 꾸준하게 노력해 온 결과이다.


상처는 여전히 아플 수 있다. 아니 아프다. 여전히 밉고, 괴롭다. 하지만 그 상처가 ‘나를 흔들 수 있는 힘’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난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조금씩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예쁜 길을 산책한다.

’ 네가 아무리 나를 흔들어봐라. 난 내가 좋아하는 거 하며 나를 지킬 거다 ‘


나를 조종하는 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나의 행동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갑자기 떠오른 그 일 덕분에 오히려 깨달았다.

‘아, 나 많이 달라졌구나. 생각보다 훨씬 단단해졌구나.’

그리고 뿌듯하다.



아주 오래전 내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거였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나는 오늘 하루를 잘 살고 싶다.’


내가 하루하루를 울면서 보내는 게 아니라, 소중히 하나하나 다시 예쁘게 담았던 그 노력들이 헛되지 않았음에 마음이 놓인다.


또다시 과거의 기억이 나를 억누르려 하는 때가 올 거라는 걸 난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그 분노를 다스리는 연습을 할 거다.


여전히 나는 과거는 흘려보내고 오늘 하루를 잘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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