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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베르만 Jun 09. 2023

사물들의 깊은 수다


 “문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촉수를 만들어준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두고 종종 하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국어 교과서조차도 버거웠던 나에게는 닿기 힘든 말이었다. 한 귀로 들으며 한 손으로는 노트 귀퉁이에 촉수 달린 오징어 다리만 주렁주렁 그려댔었다. 그 당시 ‘촉수’는 어린 중학생이 다가가기엔 조금 먼 은유였을 것이다. 글에 대해서 글을 쓰는 지금, 까마득한 시간 속의 그 당시엔 난해했던 은유로 글을 시작한다.
 
 요즘 짧은 글을 한 편씩 쓰고 있다. 글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에 대해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는 시간도 길어지고, 사물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깊어졌다. 그리고 1인칭에서 3인칭까지 시선의 스펙트럼 속을 자유로이 오가게 되었다. 모든 사물과 상황을 글감으로서 존중하게 되었다면 풋내기의 건방진 언어일까.

 작년 이맘때부터 식탁 위에 꽃을 두고 있다. 손님이 오는 날엔 꽃이 더 화려하고 풍성했으니 ‘먹고살만한 여유’라는 허세의 상징으로 놓았을 것이다. 꽃은 미학적 기능을 담당하는 ‘꽃’으로서 그리고 나의 심미적 고양감을 위해 존재하는, 내 일방적 시선 속의 전시물이었다. 그런데 문득 요즘, 식탁 위의 말라가는 꽃을 보면 꽃의 화려했던 절정의 순간이 떠올라 애처롭다. 꽃에 나를 포개보며, 난 저 꽃의 어느 순간일까 생각도 해본다. 예쁘지 않았으면 꺾이지도 않았을 텐데. 외양적 소임을 다 끝내고 버려지는 꽃의 운명은 서글프다.
 둘째 아들이 축구 시간에 차고 노는 공도 경이롭게 보인다. 모서리 없이 완벽한 구형의 모습으로 발에 닿는 각도와 힘에 따라 적확히 굴러가는 공은 물리적 힘 앞에 평등하고 그 과학적인 질서와 균형 앞에 아름답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비닐 쓰레기도 날씨에 따라 표정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햇빛 아래에선 가볍고 발랄한 리듬처럼 보이는 비닐봉지가 어둡고 흐린 날엔 방향을 잃고 헤매는 모습으로 보여서 측은하다. 발랄하게 날아다니는 비닐봉지에선 아직 어린 둘째 아들의 축구하는 모습이, 흐린 날 무겁게 거니는 비닐봉지에서는 사춘기 큰 아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산책하며 만나는 목련 나무 꽃봉오리는 미래에 있을 꽃의 흔적이라는 생각에, 나무 사이에 숨겨진 보물을 찾은 기분이 들어 설렌다. 설렘과 희망을 잔뜩 품은 꽃봉오리가 한창 자라는 우리 아이들과 닮은 것 같아서 더 예쁘다. (좀 전에 아이들을 비닐봉지에 비유한 게 맘에 걸려 얼른 꽃봉오리에도 비유를 해본다.)
 매일 쥐고 있는 핸드폰을 봐도 새롭다. 모두 고만고만한 기종의 핸드폰이지만 저마다의 지문을 간직하고 있는 이 기계의 개별성은 놀랍게도 사람을 닮아있다. 사람의 지문이 차가운 기계에 온기를 넣어준 탓인지 핸드폰 속은 아늑하다.
 시내 한복판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는 또 어떠한가. 예전엔 사이드미러를 통해 소방차를 보며 옆으로 붙기에 급급했는데 이젠 모두가 한마음으로 소방차에게 길을 내주는, 모세의 기적보다 더 기적 같은 모습에 감동한다. 난 그 묵시적 인류애가 복받치게 눈물겹다. 이렇게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렴풋이 보이게 됐다.

 사물이 아닌 ‘나’를 들여다보는 시선도 깊어졌다. 어떤 불평도 없이 아침 아이들 방의 이불을 개는 내 모습은 밤새 안녕함에 대한 감사인사였고 무사한 하루를 비는 나의 기도였다. 이불을 개고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도 새롭다. 자극적인 뉴스의 분노와 슬픔을 커피 한 잔에 금세 휘발시켜 버리는 내 모습은 문득 낯설고 무섭기도 하다. 저녁 준비를 하면서 노을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더 이상 1인칭이 아니다. 저 노을에 언어로써 다가가려 애쓰다 주제넘은 일임을 알고, 내 한숨에 주저앉는 가엾은 언어들을 위로하기도 한다.
 안방 화장실에서도 나는 놀란다. 전원 꺼진 비데 위에 앉을 때 엉덩이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내가 의식하지 않은 익숙함에 대한 몸의 무의식적인 반응에 한 번 더 놀란다. 이렇듯 깊이 들여다보면 한 번 놀랄 걸 두 번 놀란다.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것이다” 앙드레 지드가 말했다. 자두를 보고 감동하려면 그 옛날 국어 선생님이 얘기하던 ‘촉수’가 있어야 함을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촉수는 인칭을 넘나드는 넓은 시야와 깊은 성찰이었고 나에겐 그것이 글이었다. 나와 내 주변을 재발견하며 얻는 깨달음은 마태복음이나 경전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에게 글은 깨달음의 기회였고 ,‘깨달음의 기회’라고 깨달은 일을 내 삶의 큰 사건으로 나는 지금 기록하고 있다.
 아직 몽매한 나의 촉수는 먼 기억 속에서 기억의 파편들을 겨우 챙겨 올리며, 매 순간마다 의미를 부여해 나를 눈물겹게 깨우고 있다. 지금 적어 내리는 글도 의미를 부여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한 메모이다.
 봄이다. 이제 막무가내로 여기저기 꽃이 필 것이고, 꽃들의 수다로 나의 촉수는 바쁠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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