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진로 설정하기
나는 대학 시절 동기들보다 진로 설정이 늦은 편이었다. 대학교 4학년 직전까지 어떤 진로를 택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고시나 자격증 준비는 정말 너무 하기 싫었다. 더 공부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무조건 취업하는 쪽으로 생각을 했다. 공기업, 사기업, 어느 분야로 갈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학점이 나쁘진 않았지만 좋진 않았고, 전공 공부도 그리 열심히 한편은 아니었다. 매번 새롭고 나에게 재밌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내 지식과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직무엔 내 전공 출신의 사람들이 적진 않기도 하고 (원래는 특정 전공이면 당연시 되는 몇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기는 싫었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지 내 은행 계좌만 배 불리는 길인지 의문스러울 수 있지만, 지금도 그때도 난 의미를 생각하며 이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부터 3학년때까지의 여러 막연한 고민을 구체화해 진로를 아주 좁히게 된 것은 대학교 4학년 직전 겨울방학의 일이다. 나는 교내에서 한 공기업 설명회를 듣고 선배들이 배정한 스터디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스터디를 시작하니, 다들 전공 공부가 아주 잘되어있는 친구들이었고 내가 같이 진행하기엔 너무 뒤처져있었다. 그래서 스터디를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그쯤에 학교에서 사기업 인턴 연계 수업에 참여할 학생을 뽑았는데 거기 선발되었고 그 직무로 진로를 정했다. 노베이스에서 첫 인턴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이렇게 쉽게 학교를 통해 구하게 되어 운이 매우 좋았다.
첫 인턴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멘토링해 주시는 교수님과 현직자분 모두 날카로운 피드백을 해주셨고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같이 인턴 하던 친구들도 열심히 일했고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줬다. 당시에 아는 것은 터무니없이 부족했지만, 지식수준과 상관없이 경제적으로 의미 있고, 기존에 없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수와 상관없이 교수님과 현직자분이 투입해 주시는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진로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이때 관련 교내학회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 또한 운이 좋았다. 학회에 현직자 선배들이 업계 지식과 필요한 공부를 알려주어 내 관련 지식은 더 풍부해졌다.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나는 새로운 인턴을 구하게 되었다. 제대로 된 면접을 보는 것이 이때가 처음이었다. 내 레쥬메는 허접했고 면접 에티켓도 잘 몰랐다. 사실 면접 보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첫 면접은 넥타이를 까먹어서 넥타이도 안 매고 갔었다. 비슷한 이름의 건물이 많아서 헤매다가 면접에 지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한 회사에 전환형 인턴 오퍼를 받게 되었다. 당시에 다른 두 회사 최종면접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면접일이 오퍼를 이미 받은 회사의 시작일 이후였고, 회사 자체도 비등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직무배치였다. 나는 이미 면접에서도 다른 직무는 관심 없다고 말을 했었고, 지원서에 1순위부터 3순위까지 같은 직무를 썼다. 오퍼를 받은 이후에도 인사팀에 전화해 직무가 확정된 것이 맞냐고 물어봤었다. 그때 인사팀은 우리가 알아서 하는데 그걸 왜 물어보냐는 식의 반응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가짐과 굳이 이미 오퍼 받은 회사 하루를 빠지면서까지 면접을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여름방학 인턴을 시작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나는 전혀 다른 직무에 배치가 되었고 인사팀에 불만을 제기했으나 그 직무도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인데 왜 불만이냐 오히려 반문했다. 난 그 직무 쪽으로는 지식이 전무했고 의욕도 없었고 그게 겉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보안 상 실무가 주어지지 않았고 일찍 와서 신문 가져다 놓기, 인쇄해서 제본하기 등의 업무가 주였고, 할 것도 없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서 누가 지나다니면 90도 인사를 해야 했다. 숨이 막혔고, 졸렸고, 많이 졸았기도 했고, 하루는 늦잠 자서 한 시간이나 지각했다. 난 같은 팀에 배치된 친구들 중 최하의 평가를 받으며 전환에 실패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억울했고 인사팀이 원망스러웠다.
대학교 4-2학기에 난 다시 취준을 해야 했다. 공채 과정은 지금 생각하면 별거 없지만 당시에는 막막하다 보니 매우 힘들었던 기간으로 기억한다. 객관적으로 아주 힘들었다기보다는 당면한 상황대비 내 멘탈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연말에 업계 탑급 회사에 정규직 오퍼를 받게 되었다. 이때 나는 기뻤지만 여러 마음이 공존했다. 공부와 취업 말고도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심적으로 지쳐있었고 멘탈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다 보니까 공채 합격 후에 학교 기말고사를 준비하며 공황장애 증상까지 왔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뛰어내려야만 이 느낌이 없어질 것 같았다. 보험으로 국내 대학원도 지원했었고 돼도 안 간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합격하니 고민이 됐다. 그리고 사실 공채 면접을 보면서 생각보다 면접 질문도 유의미해 보이지 않았고, 과정이 짧아서 겨우 이걸로 뽑힌 사람들과 일을 했을 때 만족할만한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의문도 들었다. 다른 한편으론 이제 이 직무에 대해 공부한 지 1년도 안 되는 시점에 내가 원하는 만큼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 일을 잘하고 싶은 거지 그냥 회사 취업이 목적이 아니었다. 한국 공채 면접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마음이 안 드는 점들이 있어서 다시 한 외국계 회사도 지원했었는데 몇 라운드를 진행한 상태였다. 나는 그 회사에서 준 과제나 시험을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리뷰가 아주 좋다고 연락이 왔다. 멘탈적으로 지칠 만큼 지쳤고 한국 회사에 갈지, 대학원을 갈지, 외국계 회사 면접을 계속 진행할지 고민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