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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Feb 19. 2023

천재가 치매에 걸리면 - 에필로그

그는 쌀집아들이었다. 세검정 사거리에 위치한 쌀가게 2남 2녀 중 맏이. 해방 전이니 대부분의 인생이 고단하던 시절이었다. 패망 전에는 양곡 배급제까지 시행된 탓에 그의 집안도 잠시 풍파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네 아이를 굶기지 않을 뿐 아니라 아들딸 구분 없이 학교에 보내는 집은 여유로운 편에 속했다. 그런 행운을 아는지 아이들이 모두 수재라고 소문이 자자했지만 그중에서도 큰아들이 제일이었다. ‘쌀집 큰아들‘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부모의, 동네의 자랑이 되었다. 160cm를 갓 넘는 단신에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어려운 세상이었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의 자신감은 그를 넓은 세상으로 데려갔다. 아직은 장남이 부모를 책임지는 게 당연하던 70년대, 서운해하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앳된 아내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오하이오라는 처음 들어보는 동네에 정착했다. 겨울 찬바람이 살을 에이고 눈이 많이 오는 곳이었다. 세검정의 소문난 수재였던 그가 일찌기 시험지 위에서, 혹은 수술방 안에서는 겪은 적 없는 어려움을 마주했다. 인종차별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조차 없던 시절, 동양인이 거의 없는 중부에서 살기란 혹독했다. 그래도 그는 뛰어난 두뇌와 성실함, 오기로 매일을 살아나갔다.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난방도 잘 안 들어오는 코딱지만 한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시작했지만, 식구가 느는 만큼 집을 늘려가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어느 정도 형편이 펴자, 그는 한국의 가족들을 불러들였다. 한국에 남기를 선택한 부모님 대신 여동생과, 한국에서 일이 잘 안 풀려 고전하던 처남, 장인 장모, 조카가 그를 믿고 바다를 건넜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막내 처제의 대학 등록금을 4년 내내 책임진 그는 수유리 처가에서 가장 신뢰받는 존재였다.


아내와 아들 셋, 그리고 처가식구들과 친여동생까지, 한때 그에게 딸린 식구만 열명이었다. 아내가 영어를 못해서 뭔가 틀어지거나 철없는 처남이 시비라도 붙은 날이면, 수술복을 벗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장례식, 여동생과 처남의 결혼식처럼 집안의 경조사 때마다 총대를 메는 것도, 지갑을 여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팍팍한 삶에 내몰린 사람들 사이에 감정싸움의 드라마가 휘몰아칠 때도 중재할 만한 사람은 그뿐이었다. 남편, 아빠, 오빠, 사위, 매형, 이모부, 고모부 등 그는 요즘말로 '호칭 부자'였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하기 버거워하는 요즘 사람들과 달리 어느 것도 가벼이 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남가주로 이주했다. 전 가족이, 이미 돌아가신 장인어른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빼지 않고, 그를 따라 대륙을 가로질렀다. 날씨도 따뜻하고, 동양인도 많고, 주머니도 넉넉해진 이곳에서 그는 여유를 발견했다. 처남도 방황을 마치고 착실하게 자영업을 운영하여 더 이상 그의 도움이 없어도 장모님과 자기 가족들을 건사했다. 처가 중 유일하게 이민 오지 않고 한국에 남은 처제가 10년에 한 번 가족들과 찾아오면, 크게 무리하지 않아도 적당히 아메리칸드림을 보여줄 수 있었다. 아침에 커피와 도넛을 사 먹으며 볕 아래 산책을 하고, 저녁에 마당에서 LA 갈비를 구워 먹고 맥주를 마시며 두런두런 지나간 세월 이야기를 읊었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라는 무용담들이 쉴 새 없이 경쟁했다. 술 마시고 누구 하나는 원망이나 큰소리를 낼 법도 하건만, 그의 넉넉한 웃음 덕분인지 유쾌하게 지나가는 시간들이었다.

천성이 부지런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개인 병원을 접은 후, 한국의 꽃동네에서 1년간 봉사했다. 대부분의 주말에는 서울로 올라왔다. 나이는 스무 살 가까이 차이나지만 그를 잘 따르던 동서와 죽이 잘 맞았다. 주종을 가리지 않고 고기와 얼큰한 국물을 좋아하는 두 사람의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자그마한 동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불쑥 치매가 찾아왔다. 치매 증상을 감지하고 일을 그만둔 것인지, 그 반대인지 선후순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세검정 쌀집 주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도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셨으니, 의사였던 그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리라. 2013년에는 주변에서 눈치채기 어려웠던 그의 치매 증상은, 5년만에 한국에서 온 처제와 한참 담소를 나누고도 누구냐고 되물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다만 중증 치매환자가 된 다음에도 그는 유순했다. 아내가 밥을 주면 먹었고, 자라면 잠들었다. 가파른 집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서 가족들 가슴을 철렁하게 했지만, 타박상 하나 입지 않았다. 씹는 것마저 잊어버려 음식물이 기도로 들어가 폐렴이 되어 의사가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금세 회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불과 2주도 안되어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비로소 삶을 '완성'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순간, 40여 년 전 그를 믿고 바다를 건넌 조카가 꿈속에서 그를 만났다. 생전 따로 연락을 하거나 특별히 애틋한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건강한 모습으로 밝은 빛에 둘러싸여서 웃으며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고 했다. 뭔가를 직감한 조카가 눈물바람으로 고모에게 전화한 덕에, 그가 떠났다는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87년이라는 시간을 살았고, 세 아들과 네 손주를 남겼다. 주인을 잃은 그의 지갑에는 돈도 신용카드도 없었다. 직접 뭔가를 사고 계산을 한 지 오래되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텅빈 지갑 속에는, 이제는 어른이 된 그의 맏손자가 어린 시절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가 있었다. 당시 제 엄마 아빠가 겪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할아버지가 도와달라던 절절한 부탁. 왜 그 편지를 오랜 시간 지갑 속에 간직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검정의 수재, 소문난 의사, 열명 넘는 대가족의 수장이었던 그의 삶에도 영광 아닌 회한으로 남은 순간이 있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그의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3만 1426 날의 페이지에 빼곡한 이야기가 새겨지고, 넘겨졌다. 각 장마다 파도처럼 들이쳤을 기쁨과 희망, 슬픔과 절망은 흔적없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충만했을 그의 삶에 대한 부고는 종이 신문은 커녕 무한한 인터넷의 바다 한 켠에도 마련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원한 바겠지만, 그래도 나는 누군가는 그의 삶을 기록하고 기억해 주기를 바랐다. 그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가 짊어진 책임과 살아낸 하루하루 덕분에 많은 사람의 인생이 바뀌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그의 막내 처제인 우리 엄마다. 그의 부고를 듣자마자 부모님은 LA행 비행기를 탔고, 가족들과 함께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어떤 이들은 기억을 잃지 않아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쓸쓸하게 삶을 마무리한다. 이모부는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이모부라고 해서 책임져야 하는 많은 가족들에 대한 부담감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날이 왜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 순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손을 잡기를 택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은 거인의 영원한 안식을 빈다.


p.s. 3년 전에 “천재가 치매에 걸리면”을 발행했습니다. (https://brunch.co.kr/@mbaparkssam/37) 그때 정말 많은 분들이 이모부가 삶의 끝자락에 비로소 찾은 쉼을 응원해 주셨습니다.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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