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를 사러 용산에 다녀왔다

by 이경



지금껏 뉴스를 보면서 가장 충격이었던 인터뷰이의 멘트를 떠올려보라면 용산전자상가 직원의 “손님 맞을래요?”다. 2007년 KBS 기자가 용산의 어느 상가에 손님인 척하며 물건 가격만 묻고 물건을 사지 않자, 직원이 내뱉은 말로 알려져 있다. 용산에서 물건을 강매하고 협박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지상파 뉴스를 통해 세상에 전해진 뉴스.


지금의 ‘팔이피플’ 전에 용팔이가 있었던 셈이다.


며칠 전 사무실에서 급하게 컬러 프린트를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색이 좀 어둡게 나왔다. 잉크통을 들여다보니 CMYK 중 붉은색 계열을 담당하는 마젠타 잉크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온라인으로 잉크를 주문하면 다음 날이나 되어서야 물건을 받을 수 있을 터. 그렇게 오프라인에서 프린터 정품 잉크를 구하기 위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두 군데의 문구점과 한 군데의 대형 마트, 또 프린터 제조업체의 오프라인 스토어에 들러보았지만, 해당 잉크를 구할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6,000보를 걸었음에도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자 어쩐지 약이 좀 올랐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제야 요즘엔 문구점이나 마트에 가도 프린트 정품 잉크를 바로 구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급한 대로 출력할 파일만 따로 USB에 담아, 문구점에 들러 출력을 맡길 수도 있었지만 조금 더 잉크를 구해보기로 했다. 사무실 근처 잉크 토너 전문 업체를 찾아 전화를 돌려보았는데, 지금 주문하면 역시 다음날이나 되어서야 잉크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아니요, 제가, 지금 필요해서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주문할게요.


전화를 끊기 전 혹시나 정품 잉크는 아니더라도 호환 가능한 잉크가 있는지도 물어보았는데, 그런 잉크가 있긴 하지만 프린트 결과물로 불량이 많이 나와 권장하지는 않는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아아, 양심적인 사장님일세.


그렇게 발품을 팔고 전화를 해보았음에도 잉크를 구하지 못하자, 조금씩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시선을 돌려 용산 선인상가에 전화를 해보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용산까지는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다)


어느 업체는 잉크를 구매할 수 있었지만, 온라인에서 미리 주문을 하고 매장에서는 픽업만 가능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사업장을 온라인 전용으로 사용하는 듯했다. 몇 군데 업체에서는 아예 정품 잉크를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가 정품 잉크를 취급한다는 어느 업체와 통화가 닿았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직접 물건을 구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다만 온라인에 올라가 있는 것과는 가격이 조금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판매 가능한 재고가 있는지 확인을 해봐야 한다는 이야기.


직원은 알아보고 5분 후에 전화를 주기로 했다. 정확하게 약속했던 5분의 시간이 지나 직원은 전화를 주었다.


“한 세트 구매하실 수 있고요. 가격은 오만 구천 원입니다.”


“네, 사장님 지금 출발할게요!”


오, 땡큐 쏘 마치, 선인상가. 버스를 타고 10분 만에 업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매장 안에서 외국인 근로자로 보이는 한 직원은 박스 테이프를 잘라가며 열심히 물건들을 포장하고 박스에 담고 있었다.


“저, 전화로 잉크 주문했던 사람인데요.”


이곳 역시 평소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물건을 잘 팔지 않는 건지, 포장을 하던 직원은 조금 어눌한 우리말로 잉크를 담을 봉투가 없는데, 커다란 뽁뽁이에 잉크를 담아 주어도 괜찮겠냐고 물어왔다.


“네, 괜찮아요. 제가 잘 들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선인상가에 물건을 사러 들러보니, ‘손님 맞을래요?’ 하면서 한때 기세가 등등했던 용산의 상가들도 이제는 완연하게 쇠락의 길에 놓여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당수는 이미 재개발로 상가가 허물어지고 그 주변으로는 펜스가 쳐져 있기도 했다. 그 사이로 몇 대의 레미콘이 오가는 분주한 모습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저층의 선인상가는 언제까지 남아있을 수 있을까.


훗날 지금처럼 또 급하게 잉크를 구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도 용산의 어느 매장에 들러 물건을 구매할 수 있을지. ‘손님 맞을래요?’라고 묻던 그 직원도 이제는 꽤 나이가 들었을 텐데, 어느 하늘 아래서 잘 살고 있을지.


뽁뽁이에 잉크 한 세트를 담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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