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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Mar 04. 2019

욕망의 집과 환상의 집

라캉으로 들여다 본 <살인마 잭의 집>, 그는 왜 집을 지을까?

프랑스 생활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일부 영화들을 한국에서도 보다 조금은 빨리 접할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고전이라 불리는 영화들도 상대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다. 사실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바로 "내가 제대로 이해했나...??" 하는 것. 얘를 들어 영어 대사에 프랑스어 자막이거나, 아니면 아예 프랑스어 대사. 내 머릿속은 "??.??" 이렇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래서 내가 과연 제대로 영화를 이해했나 싶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또 다른 이해의 장(?)을 열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무튼 그렇다.


첫 영화는 한국에서는 <살인마 잭의 집>으로 개봉한 <The house that Jack built>. 사실 이 영화를 본 지 어느덧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일부 내용들은 좀 헷갈린다. 그런 부분은 조금은 양해해 주시기를... 한국 개봉에 맞춰 글을 써볼까 했는데 조금 늦어졌다. 이 역시 모두 나의 귀찮음의 산물이어늘...!



아무튼 첫 글로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프랑스에 와서 본 영화 중 가장 충격(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이 컸던 영화기 때문이다. 항상 논란을 일으키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답게 이 영화 역시 꽤 높은 수위를 선보였다. 아이들(정말 어린 꼬마들. 10대 초반의 형제)을 엄마 앞에서 사냥하듯이 총으로 살인한다거나, 한 여성의 가슴을 과도로, 그것도 그녀가 살아있을 때 잘라내고는 그 조각을 보란 듯 경찰차 앞 유리창에 두고 간다거나.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관객이 "Shit! Oh my God!"을 연발했으며, 이미 기사가 나왔듯 수많은 관객들이 영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아무리 예술에 대해 관대한 곳이라고 해도 그 수위를 넘어서도 한참을 넘어섰나 보다. 


실제 이 영화가, 그리고 감독이 만들어낸 수많은 논란들(나치의 침공을 받은 프랑스에서 열리는 칸 영화제에서 나치 옹호적 발언을 한다거나, <어둠 속의 댄서> 여주인공이었던 비요크가 라스 폰 트리에의 성추행을 폭로했다거나)은 우선 차치하고 보자.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감독의 자기 방어적, 혹은 대변하는 영화를 보는 듯하다.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그런 글들을 보고 나니 그런 듯하기도 하다. 살인을 예술로 여기는(내가 보기엔 주인공에게 살인은 예술을 완성하기 위한 도구에 더 가깝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살인은 예술, 혹은 이데아인 '집'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자재'를 구하기 위한 수단에 그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살인의 예술적 호기심과 함께 자원 확보의 효율성을 위해 '사냥감'을 일렬로 묶어 두고 총알 하나로 몇 명까지 죽일 수 있나 테스트해보려고 한다거나) 주인공을 앞세워 예술 그 자체에 대해, 그리고 더 넓게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까지 주제의 범위를 확대시킨다.


여기서 이 영화에 대한 나의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인간성'과 '예술'에 대한 질문을 어쩌면 너무 투박하면서도 정말 당혹스러운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껏 밀고 들어간다. 마르셀 뒤샹의 <샘>을 처음 봤을 때 이런 것을 느꼈을까? 하지만 이 영화는 더욱 직접적이다. '여기 살인을 예술로 여기는, 이를 발판 삼아 진정한 예술을 완성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당신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이 아이들을 사냥하는 장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살인자(주인공의 말에 따르면 '예술가')로 '발전'하는 모습을 차례로 보여준다. 



여기서 참으로 난감해진다. 영화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주인공에게는 '살인', 감독에게는 '영화'라는 예술 완성의 수단을 고스란히 수용할 것인가? 여기에도 엄연한 한계가 있을까? 진부하지만 바로 이해되는 바로는 '표현의 자유'와 같은 문제랄까? 다만 이 영화의 충격적인 면은 상상 속에서만 머물던, 아니면 발화에서만 머물던 수많은 극한의 가정들을 시각의 이미지로 보여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근데 만약 그게 자기변명에 그치는 거라면 이 얼마나 관객을 기만하는 것일까? 뭐, '예술'이라는 게 작가가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겠지만.


그 외에도 여러 논쟁적, 달리 말하면 논란의 '떡밥'은 무수히도 많다. 기독교적이면서도 반기독교적인 듯한 상징들이라거나 은연히 깔려 있는 듯한 성차별적 맥락들. 이런 것들도 다 차치하고 봤을 때, 이 영화의 너무나도 두드러진 특징은 뭔가 '라캉이 떠오르는데?' 한다는 거다. 라캉을 진지하게 공부한 적은 없지만, 주워들은 수준에서도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와, 이거 그냥 라캉을 가지고 영화 만든 거 아니야?"였다. 


라캉은 '오브제 a'라는 것에 대해 말했다. 개인이 욕망하는 것이지만, 결코 손에 잡을 수 없고 항상 결여된 채로 남을 수밖에 없는 거랄까? 개인의 욕망은 이 오브제 a로 인해 '밑 빠진 독'과 같은 거여서 결코 채워질 수 없고 우리는 만족할 수 없다. 그렇게 '거세'돼 있으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게 된다. 


이 어마무시한 결여된 욕망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 '환상'의 서사라는 것인데, 주인공에게는 어느 벌판 위에 세우고자 하는 집이 이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심지어 자신의 욕망으로부터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그 곳, 주인공이 세우려고 하는 '언덕 위의 집'. 하지만 그 집은 계속해서 무너진다. 무너지고 또 무너진다. 하지만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다. 사실 주인공이 만들려고 집은 '가짜', '허상'이라는 것을. 실제로 그가 만들고 있는 것은 얼어버린 시체로 만든 '이글루' 같은 집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얼음집은 본인의 깊은 심연으로 이어지는 욕망의 '구멍'을 외부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한 집이라는 것을.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한다. 주인공과 '안내인'이 욕망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순간, 과연 어디까지가 '환상'이며 '진실'이었는가 그 구분이 무너진다. 너무나 대놓고 환상적 이미지가 넘쳐흐른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시체집이 진짜인지, 혹은 언덕 위의 집이 진짜인지, 무엇이 허상이고 환상인지 그 경계가 사라지며 관객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저 인물의 욕망은 살인인가, 예술인가? 아니면 그냥 본인의 세계에 갇힌 자폐적 존재인가? 혹은 살인 행위가 오히려 환상이었던 것은 아닌가? 아니 그래서 그가 욕망했던 것은 뭐야??'


아무튼 우리 모두 어떤 것을 욕망하고 그 안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삶의 동력도 얻는다는 점에서 봤을 때, 우리 삶에서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허상이고, 진짜일까? 결국 주인공은 결여된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더욱더 깊은 심연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흔히 말하는 '정상'이라는 범주 안(주인공과는 반대로, 그래서 욕망의 구멍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는)에 잘 자리 잡고 있을까? 근데 어쩌면 그것 역시 환상이고 가짜이지 않을까? 무엇이 진짜이고, 어떻게 구분 지을 것인가? 주인공의 살인은 진짜일까? 그가 지으려고 했던 집은 언덕의 집일까 시체의 집일까?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당신은 욕망하는가? 무엇을?" 그리고 다시 묻는다. "자신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혹은 알 수 있을까? 그러면서 타자를 판단하려 드는가?"



실제로 영화 속 주인공과 안내인의 관계는 어떤 면에서 심리상담사와 상담인 같다. 안내인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왜 그랬어? 무엇 때문에? 그래서 어땠어?" 등등. 그리고 주인공은 그에 대해 답한다. 사실 이 구도는 이 감독의 전작인 <님포매니악>에서도 나온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조금은 피곤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들이 제공된다. 그러다 보면 따라잡아야 할 것들이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진다(내가 아마 영어 대사에 프랑스어 자막으로 봐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인물 구도 역시 정신분석학적인 이미지를 한껏 풍긴다. 이 역시 하나의 장치일텐데 감독은 또 관객들에게 강요한다. "이걸 보이는 그대로 보지 말고, 그 안의 뒷 이야기를 봐야 해. 살인에 집착하지마, 이건 말하자면 고해성사이면서도 상담 테라피거든". 여기서 우리는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주인공의 심리를 분석하는 입장에 서거나, 안내인의 질문에 맞춰 답을 하면서 상담 대상자가 되거나.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안락의자를 제시한다. 그리고 선택을 강요한다. 의자에 누워 자신의 환상과 가짜와 진실을 혼용하며 고백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수첩에 받아 적으며 분석하려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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