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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Dec 28. 2019

리얼리스트도 아닌, 이상주의자도 아닌

다시 또 다른 숨을 구멍을 찾고 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체 게바라


파업 때문에 며칠을 집에 갇히다시피 하다 보니 좀이 쑤셔 걸어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잇는 라빌레트(La Villette) 공원 인근까지 걸어갔다.


꽤 오랜 시간 글이 뜸했다. 가장 큰 이유로는 학교를 다니느라 그랬다. 헐레벌떡 찬 밥 뜨거운 밥 가리지 않고 벌컥 마시다시피 하며 프랑스어 어학 성적을 받고 학교를 다녔다. 기준을 충족하는 성적은 받았지만 시험을 잘 치르는 한국의 어느 모범생과 다를 바 없던 나인지라 실제 내 어학실력은 시험 성적과 비례하지 않았다(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나의 상황은 그러했던 지라 지난 약 3개월간의 학사일정은 정말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새 흘렀다. 수업은 따라가기는커녕 어떻게든 과제를 하고 읽기 자료를 읽는 데 숨이 차오르고 혹시나 수업 도중 교수님이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며 한 학기를 버텼다. 


더군다나 애초 12월 중순으로 예정됐던 학기말 시험은 프랑스 전역을 뒤덮은 파업의 여파로 모두 취소됐다. 극히 제한된 수준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하철과 버스, 기차 모든 대중교통의 멈춰 섰다. 수업 취소를 알리는 메일이 연달아 왔고 역시 아니나 다를까 시험 일정도 다 미뤄졌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난 것도 아니고 안 끝난 것도 아닌 채 막을 내렸다. 물론 1월 초에 모든 학기말 시험을 봐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1학기가 마무리될 예정이다.


그 뒤를 잇는 이유는 아니나 다를까 나태해진 나의 게으름 탓이다. 사실 유학생 신분은 여러모로 나태해지기 쉽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말도 잘 안 통하는 곳에서 고군분투를 하다 보면 핑곗거리가 많아지기 마련이다.


한동안 날이 흐리더니 조금씩 하늘이 열렸다.


 수업 듣는 것부터 과제하는 것까지 얘네(프랑스 애들)보다 몇 배는 더 해야 돼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이곳 생활을 즐겨봐야지 
 공부도 중요하지만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잖아 

등등. 그러면서 애초 생각했던 나의 유학 생활은 여러 면에서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꾸준히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사색하고, 전에 하지 못했던 운동도 좀 하고 등등. 그러했던 것들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으름의 권리야"에 밀려났다. 그렇게 나는 밤늦게까지 와인을 마시고(이  얼마나 프랑스에 걸맞은 생활인가!), 늦잠을 자고(이 얼마나 여유로운 삶인가! 비록 유학생 입장에선 모순일지라도), 침대에 누워 오전이고 오후고 저녁이고 유튜브를 보고(이 얼마나 트렌디한 삶인가!) 시간을 보낸다. 


몰란 지난 한 학기 동안 정말 내 딴에는 최선을, 할 수 있을 만큼 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다 듣지는 못하더라도 매 수업 녹음하며 가능한 반복 해서 들어도 보고, 어떻게든 프랑스어 한 마디를 더 하려고 안면 튼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말도 던져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대화 내용을 복기하며 어휘와 문법 오류를 찾아냈다. 학교 도서관이 왜 오후 6시까지밖에 안 하냐며 혼자 툴툴거리기도 하고,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기차 안에서 마저 남은 읽기 자료를 일겅도 보았다.


하지만 나의 천성일까, 공부가 점점 더 고되고 조금 나아졌다 싶을 때 다시 찾아오는 또 다른 고난들을 직면하면(예를 들어 지도교수와의 면담) 또 이를 회피할 명분을 찾아 나선다. 


이 역시 그래도 크리스마스 시즌인데 하며 걸어서 하시간 반가량 갔던 튀를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에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 


 솔직히 프랑스 석사 학위 가지고 뭘 하겠어 
 엄밀히 따져서 학업에 뜻이 있던 건 아니잖아? 
 지금 여기에 쏟아붓는 돈으로 다른 걸 하면 더 보람차지 않을까? 


그렇게 난 나름 잘 나가는 거 같은 사람들의 유튜브를 훔쳐보며 또다시 다른 갈래의 가지를 펴며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다. 


그러다 문득 함께 저녁을 먹다 혼자 이어폰을 끼고 노트북을 켜는 와이프를 보고 때 아닌 자극을 받는다. 함께 밥을 먹고 늘 그렇듯 지난 유튜브 영상이나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흥미를 잃고 본인의 할 일 찾아갔다. 그 와중에도 나는 이것저것 찾아보며 맥주를 마시고, 위스키를 마셨으며, 또 와인도 마셨다(이렇게만 보면 정말 남 부러울 것 없는 시간이다. 유학생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침묵은 금이라던가. 하지만 그녀의 침묵은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던 그 무겁디 무거운 금의 밀도가 지닌 비밀을 파헤쳤던 그 순간만큼이나 내 머리를 쨍하고 울리게 했다. 우리는 분명 이런 그렇게 흘러 보내는 시간들을 위해 오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각자 나름의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왔다는 것을.


붉은 하늘.


잠시 내가 여기에 왜 왔는가를 되새겨본다. 아직은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불가능한 꿈, 그것에 대한 미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이 당장 여기, 프랑스에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이뤄질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닐지언정 어쨌든 그것을 위해 회사도 그만두고 어떻게 보면 철없는 도전을, 다르 게 보면 과감한 모험을 떠났던 것이다. 당장 눈앞의 일에 몰두하여 잊고 있던, 혹은 잊으려 했던 그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부딪히려고 했던 그 불가능함이었다.


아니 언제 와인은 마시기 시작했대?


그녀의 한 마디는 불가능한 꿈도, 그렇다고 리얼리스트도 아닌, 허송세월 팔자 늘어진 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녀는 항상 나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도 마"라고 하지만 지난 크리스마스의 여운은 이제 흘러 보내야겠다. 이왕 여기 있는 거, 할 때까지 해봐야지 않을까. 


그전에 보던 것만 마저 보고...(난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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