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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구사냥 Jan 07. 2019

야간경기 - 야구의 대중화에 기여한 최고의 발명품

야간 경기의 역사와 영향에 관한 이야기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맥주를 곁에 두고 흥미롭게 야구를 지켜보며 하루를 마무리 짓는 것은 현대인들의 흔한 일상이다. 하지만 낙후된 조명 기술과 야구는 낮에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에 야구는 오직 낮에만 즐길 수 있는 스포츠였다. 이러한 현실에 욕구불만을 가졌던 야구광들이 저녁에도 야구를 즐길 수 있는 해결책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880년에 아마추어 야구팀들이 테니스장의 조명을 이용해 저녁에도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이를 시작으로 야간 경기는 마이너리그, 독립리그, 니그로리그 등으로 점차 확산 됐다. 특히 1930년에 니그로리그의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는 원정 경기를 위해 조명 시설을 12대의 트럭으로 운반하면서까지 야간 경기를 펼치는 등 야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비록 당시 낙후된 조명 기술로 경기장 구석구석까지 훤히 비추지는 못했으나 일을 마친 후 저녁에 야구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야간 경기는 대중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야간 경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이렇게 뜨거웠음에도 야구는 낮에 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던 메이저리그는 여전히 주간 경기만을 고집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계속된 성적 부진과 팬들의 무관심으로 망가져있던 신시내티 레즈를 살리기 위해 단장으로 부임한 래리 맥페일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평일 경기에 입장하는 관중들이 백인 부유층과 같은 일부 계층에 한정돼 야구가 대중들에게 깊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큰 문제점으로 느꼈다. 그래서 일반 직장인들이 평일에 일을 마친 후 야구를 관람할 수 있도록 야간 경기를 도입하면 팀을 재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야구는 주간 스포츠라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 똘똘 뭉친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의 높은 벽과 희미한 조명 때문에 정상적인 경기 운영이 힘들고 야간 경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도덕이 붕괴돼 범죄율이 상승할 것이라는 무수한 예측들의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대중들의 야간 경기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맥페일은 결국 메이저리그 구단주들 설득에 성공했고 7번의 야간 경기를 허락받았다. 맥페일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야간 경기를 위해 레즈의 홈구장 크로슬리 필드 안에 높이 40m의 조명탑 8개를 세우고 600마일정도 떨어진 백악관까지 전선을 연결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역사적인 순간의 시작을 알리는 점등 스위치를 누를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를 했다. 드디어 1935년 5월 24일. 20,422명의 만원 관중이 크로슬리 필드에 모여든 가운데 멀리 백악관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점등 스위치를 누르자 8개의 조명탑이 경기장을 밝게 비추는 장관을 연출했고 선수들은 우려와 달리 단 하나의 실책 없이 경기를 마쳤다. 선수들과 관중들 모두 야간 경기에 매우 흡족해 했고 결국 레즈는 야간 경기 효과에 힘입어 전년 대비 2배가 넘는 약 45만명의 관중을 동원할 수 있었다. 맥페일의 실험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은 레즈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하나둘씩 조명 시설을 설치했고 1948년에 이르자 시카고 컵스를 제외한 모든 팀들이 야간 경기를 펼쳤다. 이에 날이 어두워 졌을 때 존재했던 무승부는 메이저리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왜 컵스는 유일하게 야간 경기를 도입하지 않았을까? 물론 컵스도 1942년에 홈구장 리글리 필드에 조명 시설을 준비하며 야간 경기를 도입하려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윌리엄 리글리 구단주가 준비해뒀던 조명 시설을 전쟁에 사용하라고 기부한 후 컵스는 주간 경기만을 고집하게 된다. 이러한 컵스의 고집은 야간 경기가 확산되며 컵스가 포스트시즌에 진출 할 경우 인근에 있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홈구장에서 야간 경기를 펼쳐야 하는 문제점 앞에 꺾였다. 결국 리글리 필드 개장 후 5,687경기 연속으로 주간 경기만을 고집하던 컵스는 조명 시설을 설치하고 1988년 8월 8일에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야간 경기를 개최했다. 다만 이날 경기는 도중에 내린 폭우로 3회에 중단됐고 다음날 뉴욕 메츠와의 경기가 공인된 리글리 필드 첫 야간 경기가 됐다. 컵스가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주간 경기만을 고집한 이유는 야구는 낮에 하는 스포츠라는 전통을 지키려는 마음이 가장 컸지만 강한 바람으로 야간에 더욱 쌀쌀해지는 날씨와 함께 유통의 중심지로 주간에도 많은 관중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지역 특성도 작용했다.     


평일에 부유층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들이 일과를 마친 후 야구를 즐길 수 있게 만들어 야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야간 경기는 선수들의 경기력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반적으로 야간 경기를 치를 때 타자보다 투수 특히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유리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왜냐하면 경기장의 조명시설이 아무리 잘 되어있다 해도 자연광보다는 어두울 수밖에 없어 야간에 빠른공을 때리는 것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명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야간 경기와 경기력 측면에서 핵심은 조명의 밝기가 아닌 야간 경기를 치른 다음날 주간 경기를 뛸 경우 선수들이 기존의 시차 적응에 수면과 식사시간의 변화에 따른 생활의 불규칙성이 더해져 체력과 집중력의 하락으로 경기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관련한 대표적 사례는 1981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주전 유격수였던 게리 템플턴에서 찾을 수 있다. 이해 여름 템플턴은 전날 야간 경기를 뛴 후 주간 경기를 뛰어야 할 상황에서 피로감 때문에 주간 경기에 빠지고 싶다는 의사를 화이티 허조그 감독에게 피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기분이 상한 템플턴은 성의 없는 플레이로 일관했고 결국 보다 못한 홈 팬들마저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에 템플턴이 무례한 동작으로 대응했고 이후 그는 팬들의 강한 비난에 시달렸다. 이것이 결국 트레이드의 시발점이 돼 템플턴은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떠나고 카디널스는 훗날 메이저리그 역사에 손꼽히는 유격수로 성장하는 선수 한명을 받아오게 되는데 그 이름은 다름 아닌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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