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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3.1절 게릴라>

with 히스테리안 리서치 클럽

by 이인현

25년 2월 21일 히스테리안(Hysterian) 출판사의 기획자 강정아 님에게 연락이 왔다.


“인현님 안녕하세요. 혹시 3월 1일에 일정 있으세요?”


당황스럽지만 3월 1일에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왜냐고 묻는다면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말할 수 없는 것, 2024년 히스테리안 리서치 클럽에 참여하면서 그것에 관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말하고 싶지만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몸으로 감각하지만 언어화될 수 없는 것, 부재, 어떤 시간성 위에 내가 올라가 있는 것, 목에 탁 걸려있는 말처럼, 밖으로 분출되길 바라면서도 분출되지 않는 것. (리서치 클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한(恨)’처럼) 그래서 정아님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그것 또한 정아님의 한인 것 같아서. 이야기를 짓는 사람으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그걸 현실에 내보이는 걸 돕고 싶었다. 시각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은 것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래서 독립에듀케이터로 활동하는 이연화 님과 나, 둘에게 부탁했다는 말도 수긍이 되었다.

정아님은 자신이 생각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이야기했다. 사람들을 모아 어딘가에서 출발해서 탑골공원에 도착하는 것, 무선마이크와 이어폰을 통해 말하는 사람이 있고 모두가 그걸 함께 듣는 것. 그것 외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갈지 모른다고 했다. 우리는 짧은 온라인 회의를 통해 서소문공원에서 탑골공원까지 걸어가기로 했고, 나는 함께 읽을 문장을 뽑기로 했다.

친구 서희는 ‘우연에 순종하라’는 자신의 주제 문장으로 이야기한다. 나도 종종 그 말을 믿게 되었고 데리다의 말을 통해 그것을 해석한다. (데리다/블랑쇼 읽기는 최가은 문학평론가의 수업에 많이 의지했다) 현실에서 우발적인 정황이 주어진다. 그것이 정아님의 필연일지라도 나에게는 우연에 불과하다. 하지만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우연의 상황 안에서 필연적인 리듬이 조화되어야 한다. 시작되고 끝나야 하는 것, 과정 중에서 계속해서 변화해 가는 리듬, 나는 그것을 의식하며 내용을 채워나가야 했다. 이렇게 우연성과 필연성이 교차하면서 역사가 생산된다.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우발적인 기회를 필연적인 리듬 속에서 소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화란 곧 액자화(encadrement)입니다. (중략)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어떤 사태를 유의미한 무언가로, 물질적인 것을 이념적인 무언가로 승화시키고 전화시키는 과정, 바꾸어 말하면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 곧 액자화고, 이 액자화의 층위들이 거듭 포개지는 것이 곧 역사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김민호 저, <데리다와 역사> 30p

즉, 3.1절 게릴라는 나에게 액자화, 에크뤼튀르, 역사 쓰기였다.


일주일 남짓의 준비 기간, 새로운 문장을 쓰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위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3.1절에 흐르는 몇 가지 맥락을 생각해 봤다. 3.1 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 계엄 이후 지속된 정치적 구호들, 윤석열의 탄핵을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예상되어 있다는 점, 우리가 걸어가는 중에 그들과 조우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공유해 온 히스테리안 리서치 클럽의 이야기들. 그것들이 간접적으로라도 비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책이 꽂혀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갔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은 내가 읽어온 지식, 이야기의 네트워크망이다.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을 보며 현재의 생각에 부합하는 책들을 꺼내 책상 위에 쌓았다. 뽑혀 나온 책들의 목록은 대략 <딕테> <무위의 공동체> <밝힐 수 없는 공동체> <폐허를 말하다> <디디의 우산> <하이라이프>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기억·서사>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할 것인가>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A가 X에게> <서울해법> <보이지 않는 도시들> 등등이다. 나는 책을 펼치고 좋았던 부분을 훑어본다. 그 주변부에 어떤 문장이 배치되었는지 점검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를, 책과 책 사이를 건너뛰며 움직인다. 나와 거리가 멀면 넘어가고 가까워지면 다시 들여다본다. 콩을 물에 담그면 속이 빈 쭉정이들이 떠오르는 과정과 비슷하다. 물론 나는 그 쭉정이들을 소중히 담는다. 고르고 버리고 다시 끌어올리고를 반복한다.

그렇게 여섯 개의 책에서 문장을 발췌했다. 처음에는 맥락이 이해될 수 있도록, 정아님, 연화님과 공유할 수 있도록 긴 단위의 글을 그대로 구글 문서에 옮겨 적었다. 우리는 메신저를 통해 글에 대한 의견을 나눴고 나는 그 글이 그들에게 어떻게 읽히는지 들었다. 전날인 2월 28일 리허설을 하면서 직접 도시를 가로질러 걸었고 거기서 느낀 맥락들에 따라 글을 수정했다. 내용을 줄여 핵심만 남기기도 하고 원문의 순서를 바꿔서 편집하기도 했다. 문장을 책과 책 사이가 아니라 책에서 장소로 가져오는 것이 이번 작업의 핵심이 될 것 같았다. 이제 그 문장의 의미는 원래의 것과 결코 같은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인용문은 원문의 텍스트에서 찢겨나가 시간과 장소 위에 기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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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이 되었다.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서소문공원에서 우산을 쓰고 참가자들을 기다렸다. 하나둘씩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주황색 안전띠를 옷과 가방에 묶었다. 수신기를 나누고 귀에 꼈다. 서소문공원 현양탑 앞에서 연화님과 내가 글을 낭독하면서 걷기가 시작되었다. 인용문 앞에 연화님이 인사말을 붙여주었다. 3.1절 게릴라에 대한 친절한 안내였다.

우리는 서소문 성지에서 출발해서 탑골공원까지 걷습니다. 이 경험의 각인이 미약할지, 강렬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격차가 있을 겁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펼쳐진 독립운동을 함께 소환합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선언을 통해 부르던 한국은 도대체 무엇이 었을까요? 함께 걷기를 약속한 이들은 서로 같은 징표를 옷 한쪽에 붙이고 귀에는 송수신기를 꼽고 인현님이 뽑아 온 문장을 듣습니다. 걷습니다. 이제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떠올려봅니다. 오롯이 걷는 일이 50분 정도 됩니다. 춥고 힘든 일을 일부러 하는 이상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3월 1일의 탑골공원은 복잡할 거예요. 일자가 일자인 만큼 기념하는 행사가 있을 수도 있고요. 광화문에서는 탄핵 반대 집회가 대규모로 열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소환하며, 흐린 눈 하고 싶은 현실도 마주해야 합니다. 함께 걷는 날의 경험은 매끄럽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추울수록, 불편하고 이상할수록 기억에 남을 겁니다. 혼자서는 절대 못할 일이고 함께 할 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입니다. 엄청난 준비를 한건 아니지만, 우리가 함께 걷는 경험 이후에 쌓이는 것은 분명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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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서소문 성지에서 읽은 인용문이다. 각 인용문에는 번호를 붙였다.



1. 김명식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164-165p 발췌

주검들 덧쌓였던 서울의 서쪽
조선 건국 이래 끊이지 않은 모반과 대역 그리고 정변에 의해, 때때로 많은 사람이 서소문 밖에서 억울하게 참형되거나 효수됩니다. 특히 19세기 들어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는 농민봉기를 일으킨 홍경래의 목이 효수되고(1811), 동학농민운동의 전봉준이 교수형에 처해지고(1895), 전주에서 참형된 김개남의 수급이 압송되어 효수된 곳이기도 합니다(1895). 뿐만 아니라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참형됩니다.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2~1904)은 죄인의 머리가 효수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야영장에서 쓰는 주전자 대처럼 나무기둥 세 개로 얼기설기 받쳐놓은 구조물에, 다른 사람의 머리 하나가 그 아래로 늘어뜨려져 매달려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같은 구조물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들이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 무너지게 되면 먼지 수북한 길바닥에 그냥 나뒹굴도록 내버려져 개들이 몰려와 물어뜯기에 안성맞춤이 되었다. (Bishop, 1994,308면, "이날 서울에 효수된 사람은 김개남과 성재식"-역자)

종교를 가지는 것 자체로 죽임을 당했던 조선의 천주교인을 생각해보면 이곳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동안 신앙과 신념이 말살되는 한국 천주교의 비극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달레 신부(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는 서소문 밖 처형장에서 처형당한 순교자의 모습을 한국 천주교회사』(1874)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정한 시간에 한가운데에 높이 여섯 자나 여섯 자가 되는 십자가를 세운 수레를 감옥 앞에 끌고 온다. 사형집행인이 감방에 들어가 죄수를 어깨에 메어다가 양팔과 머리칼을 십자가에 잡아매고 발은 발판 위에 올려놓는다. 호송대가 매우 가파른 비탈이 시작되는 서소문에 이르렀을 때 사형집행인이 발판을 탁 빼내고 우차군이 소를 채찍질하면 소는 내리막길을 마구 달린다. 길은 울퉁불퉁하고 돌이 많으므로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수형자는 머리칼과 팔만으로 매달려 있으므로 좌우로 급격히 흔들려 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 형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사형집행인들은 그를 꿇어앉히고 그의 턱 밑에 나무토막을 받쳐놓고 목을 자른다.(Dallet, 1979, 114면)


이 걷기의 시작이 서소문 성지인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한 성지이기도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효수되었던 행형지이기도 하다. 서소문은 한양의 4개 소문(小門) 가운데 서쪽에 있는 곳이었고,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내갈 수 있는 ‘시구문’이기도 했다. 한강의 지천인 만초천을 따라 일찍이 상권이 형성된 까닭에 늘 사람들로 북적이던 대중적 장소였고, 사람들에게 처형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었다. 현재도 공원에 망나니들이 피에 묻은 칼을 씻었던 뚜께 우물터가 존재한다.

이곳에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만들어진 것은 2019년이다. 그전에는 재활용 쓰레기 처리장과 공영 주차장으로 활용되었다. 이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천주교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지의 기능이 강화된 것도 그때부터다. 그전에 처형된 인물들은 역사에 남지 않았고, 천주교 순교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이야기가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이다. 어쩌면 건축에 필요한 자본을 동원하는 데 천주교의 힘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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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공원화되기 이전에는 노숙인들이 많이 거주했다고 한다. 공원화 과정에서 노숙인 대부분은 어디론가로 밀려 나갔다. 현재 공원에는 노숙인 예수상은 있지만, 노숙인이 누울 수 있는 벤치는 없다. (눕지 못하도록 칸막이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게릴라를 시작하긴 전 나는 공원 화장실에 들렀다. 문을 열자마자 강한 악취가 났는데 화장실 안에서 노숙인 두 명이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그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왔다. 어떤 역사를 기억할지는 선택이고, 헤게모니 싸움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 선택의 이유를 물어야 할 때도 있다. 냄새는 코에 오래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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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을 읽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서 마이크에 대고 드문드문 말을 이어갔다. 참가자들은 조금 떨어진 채로 말없이 걷고 있었다. 밖에서는 집회에서 들리는 마이크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고, 기차와 사람들이 교차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귀에 내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고, 작은 반응들을 통해서 미약하게나마 우리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두 번째 도착한 장소는 서소문(소의문) 터였다. 표지석이 남아 있고 땅은 공사 중인지 패널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는 그 앞에 서서 딕테를 읽었다.



2. <딕테> 클리오 역사 38p-41p 발췌 및 편집

그녀는 잔 다르크 이름을 세 번 부른다.
그녀는 안중근 이름을 다섯 번 부른다.

국가가 없는 민족은 없고, 조상이 없는 민족은 없다. 아무리 영토가 작다 해도 자주성을 지킨 나라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오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도, 일본에 그것을 빼앗겼다.

“순서와 지위에 대한 일본인의 집착으로 말미암아 고급 관리의 부인들에게도 정확한 명예의 칭호가 부여되었다. 이것은 아홉 단위의 지위로 나누어졌다: ‘순수하고 공손한 부인’ ‘순수한 부인’ ‘순결한 부인’ ‘순결한 귀부인’ ‘가치 있는 귀부인’ ‘예의 바른 귀부인’ ‘공정한 귀부인’ ‘평화로운 귀부인’ 그리고 ‘고결한 귀부인. 이와 마찬가지로 왕의 후궁들도 지위가 나뉘었는데, 여기에는 여덟 개의 등급으로 충분했다. ‘첩’ ‘고상한 부인’ ‘빛나는 본보기’ ‘순결한 본보기’ ‘빛나는 품행’ ‘순결한 품행’ ‘빛나는 아름다움’, 그리고 ‘순결한 아름다움’.

관순은 애국자 아버지 어머니의 네 자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의 행동은 남달랐다. 역사는 그녀의 짧고 격렬했던 삶의 전기를 기록한다. 그녀의 행동은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역정과 갈라놓는다. 그러한 인생 역정의 정체성은 역사 속의 어느 다른 여성 영웅들과 바꾸어도 상관없다. 그들의 이름, 시대, 행위들은 관대함과 자기희생의 헌신으로 따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다.

관순이 16세 되는 해, 1919년, 한국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일본의 음모는 명성황후와 그의 왕족들을 암살함으로써 성취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관순은 동료 학생들과 함께 항거 단체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혁명운동을 시작한다. 이미 민족적으로 조직된 운동 단체가 있었는데, 그들은 관순의 진지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어린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그녀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녀를 설득해 단념시키려고 했다. 그녀는 용기를 잃지 않고, 그들에게 자신의 신념과 헌신을 보여주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적 대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그녀는 40여 군데의 마을을 도보로 여행하며, 천명을 받은 사신의 역할을 해냈다. 이날은 역사의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이날의 시위는 한국인들이 일본의 지배에 항거한 최대 규모의 시위였으며, 그들은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

네 자녀 중의 외동딸인 그녀는 다른 형제들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삶을 완성해나갔다. 그녀의 어머니 그녀의 아버지 그녀의 오빠들.

“나는 네 곳에서 적군과의 교전을 보았다. 한 곳에서는 일본이 다섯 명의 사상자와 함께 후퇴한 무승부 전쟁이었다. 다른 세 곳에서는 장거리 총과 우세한 탄약으로 인해 일본이 승리했다. 그중 사상자 없이 이긴 곳은 단 한 군데였다. 일본인들에게 이것이 단순한 소풍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충분히 보았다.”

“산도적에 불과한 이 남자들은 도대체 누가 지휘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전쟁 방식은 순진무구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미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해낸 것 같다. 이것이 그들의 목표인가? 아니라면, 왜 그들은 이다지도 악랄하고, 광적인 정책을 실행하는가? 공권력으로 하여금 호의를 잃은 지역을 효과적으로 정당하게 순찰하거나, 아니면 한국에 대한 통치에 있어서 무능력함을 고백하라!”



딕테는 작년 리서치 클럽원들의 열렬한 소개를 받고 읽게 되었고, 김지승 작가의 함께 읽는 모임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겐 어려운 숙제 같은 텍스트였다. 남성의 몸으로, 이 시대에 한글로 딕테를 읽는다는 것에 난관도 있었고, 딕테의 공동체에 아직 들어가지 못했음을 절감했다. 그럼에도 지금에서부터 계속 반복해서 읽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테레사 학경 차가 유관순을 이야기한 것, 그것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제시가 아니라 자신, 여성, 역사, 시간성을 연결하려고 했던 시도였던 것을 같이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반복되는 역사에 대해서도) 테레사 학경 차가 자신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던지며 어떤 기대를 가지고 대한민국에 방문한 일, 거기서 더 크게 느낀 혼란함을 생각해 봤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테레사 학경 차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역사는 과거를 기다리지 않고 달려 나갔고, 그 안에서 희생된 이야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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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부터 시위 소리가 커졌다. 시청에 다다르자 경찰이 길을 막아 생긴 커다란 광장에 흰색 태극기의 물결이 나타났다. 사랑과 영혼의 OST가 흘러나오고, 이어서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광장이 주는 스펙타클에 잠시 압도되었다. 저들과 내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음을 생각했다. 탄핵반대 집회 연단에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악다구니했다. 우리는 태극기를 든 군중들 사이를 이질적으로 헤치고 걸어 나왔다. 순결한 태극기 가운데 불순물이 된 것 같았다. 이때 나는 말을 하지 않고 누군가를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뒤를 자주 돌아보았고 함께 걷는 이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누군가는 인상을 썼고, 누군가는 흥미로운 얼굴로 주위를 관찰하며 사진을 찍었다. 군중 속에서 그 얼굴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음이, 그 모습이 위험하지 않게 느껴졌단 사실이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우리는 무사히 환구단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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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카 마리 <기억·서사> 56p-63p 발췌 및 편집

먼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던 사실을 최초로 공표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을 때의 충격에 대해 오고시 아이코가 쓴 다음과 같은 글을 보자.

예전 ‘위안부’들이 전쟁 중에 일어난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사건의 산증인이라는 사실은 그녀들의 신체에 각인된 것에 의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그녀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직접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사실을 가리고 있는 두꺼운 장막이 한순간에 찢겨나가고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주저될 만큼의 가혹한 현실을 그녀는 온몸으로 이야기했다. 17세 때 당한 강간, 그리고 그 뒤 계속되는 '위안부'생활의 후유증 때문에 그녀의 신체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렇게 신음하듯이 그녀는 "나는 여자로서의 기쁨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자기 자신을 찢어발기는 듯한 그와 같은 증언은 그녀의 신체 깊숙한 곳에 뿌리박혀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자칭 애국적인 '역사학자는 이와 같은 그녀의 증언을, 나아가서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밖에 알지 못한다. '역사학자는 그녀가 소녀 시절 기생 수업을 하는 학교에 다닌 일을 예로 들어 그녀는 '매춘부'였다고 멸시하며 '상행위'라는 말만 함으로써 전시에 일어난 강간, 성적 노예생활을 고발하는 그녀의 인간적 권리를 빼앗으려 한다.
- 오고시 아이코, 「여성·인권·전쟁」, 『미래未來』, 1997년 5월

한편, '사건'을 입증하는 것은 증언이다. '사건'을 경험한 당사자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사건의 유일무이한 증언, 그것이 '사건'의 '진실'을 보증한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그 증언이 육신을 찢어발기는 듯한 것이기 때문에 유일무이하며 그로 인해 그 증언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건'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 증언에서는 '진실'이 충분히 말해지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고문의 논리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느끼는 '저항'의 또다른 하나는, 그것은 어느 날 문득 떠오른 것인데, "나는 여자로서의 기쁨을 알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한 김학순 할머니의 그 말의 진부함이다. 물론 그 말이 진부하다고 해서 그녀의 증언이 자기 자신을 짓이기는 듯한 육신 깊은 곳에 뿌리박혀있는 것임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다. 그 지나친 진부함 때문에 나는 그것이 '사건'의 폭력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온 소리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여자로서의 기쁨' 이 얼마나 진부한 표현인가. 여성의 심리를 꿰뚫고 있다고 떠들어대는 남성 작가의 대중소설에서나 사용할 법한때가 묻은 표현이다. 나는 신체 깊숙한 곳에서 몸을 비틀어 쥐어짜낸,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뿐더러 글로 다 표현할 수도 없는 폭력적인 '사건'의 그 폭력성을 입증하는 그 말이 '여자로서의 기쁨' 따위와 같이 진부하게 사용된 판에 박힌 상투어구였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거리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때 그와 같은 '사건'의 유일무이한 당사자였기 때문에 그녀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도 리얼한 말로 그것을 이야기할 것을 기대하고 있던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은 그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언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필설로는 다 전할 수 없는 '사건'이, 설마 '여자로서의 기쁨' 따위라고 하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말로 드러난다는 것이 그 '현실'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고는 예의 남성작가조차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 '사건'의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건'에 대한 유일무이한 증인이기 때문에 진부하기 짝이 없고 판에 박힌 듯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언어가 매개하는 의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어긋남, '사건'과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말해진 언어 사이의 끝없는 괴리 또는 단절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언어는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의 단절, 그리고 그 단절 속에서 드러나는 ‘사건’과 타자의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의 깊이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환구단은 고종이 스스로 황제에 등극하고 하늘에 제를 지냈던 터이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이 하늘에 제를 지내는 것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실제 환구단 본터는 일본이 없앤 후 웨스틴 조선 호텔을 지었고, 지금 남은 건물은 상징물 격인 황궁우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향년 66세로 사망했는데 사망 직전 건강에 문제가 없던 것으로 알려져 일제가 고종을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고종의 장례식이 1919년 3월 3일로 정해졌고 고종의 장례식 예행 연습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춰 대규모 만세 시위가 기획되었다. 당시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지방에서 상경했으며, 이들이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지방으로 돌아가 똑같이 시위 운동을 벌임으로써 만세 운동인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이 장소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기억과 증언에 관한 글이 낭독된 사실, 그리고 탄핵반대 집회에서 방송한 애국가가 함께 퍼졌다는 사실이 공교로웠다. 앞서 기억이 헤게모니라고 한다면 그 기억을 역사화하는 데 있어서 증언과 언어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다른 언어로 대체하려고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역사를 자신의 언어로, 자신이 주장하는 기억으로 끌고 가 무엇이 진실에 가까운지 알 수 없게 흩어놓는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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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을 나오면서 우리는 시민 행렬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큰 마이크가 설치된 트럭에서 ‘탄핵 무효’와 같은 구호가 울려 퍼졌다. 종각에 이르러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봤다. 전봉준 장군 동상에 붙은 제목은 ‘전봉준 장군의 시선’인데 그는 연단 위에 방금 압송되어 온 듯이 지친 자세로 앉아 오른쪽 아래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땅과 민중을 내려보는 것 같기도 하고 보신각 쪽을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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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열을 맞춰 도로로 나아가는 해병대전우회의 행진을 마주했다. 대부분 머리가 하얗게 세고 다리를 절기도 했지만, 훈장으로 수놓은 군복을 입고 화려한 모자를 썼다. 깃발을 든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웃었고, 주위 시민들이 보내는 환호성에 등을 더 곧추세웠다. 해병대 행렬이 멈춘 사이에 일부가 길을 건넜는데 다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행렬에 의해 반으로 갈라졌다. 빠르게 그 사실을 알아채고 손을 위로 치켜들어 흔들면서 서로가 어디에 있음을 확인했다. 행렬이 멈추고 우리가 다시 합쳐지기를 기다리는 시간, 나는 그 순간에 아래 인용문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라진 무리를 안심시키고 우리가 함께 있음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내 목소리가 갈라진 자들에게 들릴 테니까.



4. 김사과 <귀신들> 16p-30p 발췌 및 편집

1
하지만 언제? 대체 무슨 결투가 언제 시작된 것일까? 도대체 왜……?

2
전혀 모르겠지만 이상과 같은 해괴한 전투는 도시에서 매일같이 반복된다. 똑똑히 목격했다. 뜯겨져나가는 감정들, 살점들, 좌절과 기쁨……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걸까? 결국 모두가 원하는 것은 어둠인데, 왜 대낮에 뭔가를 썰고, 씹으며 웃는 걸까? 어둠 속에서 누구보다 밝게 빛나기 위한 기원 같은 것일까? 왜 인간들은 어둠 속에서만 밝게 빛나는 것일까? 왜 밤이 되면 시린 이를 딱딱거리며 온갖 사악한 짓을 저지르는 것일까? 그들의 마음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앉은 것일까?

6
내가 인간세계에서 목격한 가장 이상한 현상은, 어떤 인간들은 산 채로 귀신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희귀한 현상이라기에는 꽤 흔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 과정은 꽤 생경하고 또 고통스러워 보인다. 왜냐하면 산 채로 귀신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생체실험, 기적일 테니까? 하지만 정말로 놀랍도록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 되고 싶어하는 것을 나는 목격했고, 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 되기를 바란다. (바로 지금 당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 뜨끈한 엉덩이들 얘기다.) 물론 그들이 대놓고 “헤이, 나의 꿈은 귀신이 되는 것이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엄청난 놀림거리가 되리라는 것을 그들도 안다. 무얼까, 그 비웃음의 용도는? 사실상 모두가 귀신이 되고 싶어하는데? 귀신이라는 말의 어감이 문제일까? 그렇다면 홀로그램이라 부른다면 어떨까? “저는 홀로그램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도 그렇게 멋있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귀신이 되길 원하는 사람들은 대신 이렇게 말한다. “저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저는 제3세계 여성들의 권리를 증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전인류의……” “저는 제가 속한 커뮤니티를 위해서……” “……건강한 먹거리……” 이상이 귀신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의 레퍼토리다. 귀신들의 권리? 귀신들의 커뮤니티? 귀신들의 먹거리? 하나같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 귀신워너비들은 모순화법에 사로잡혀 있다. 하긴 산 사람들이 귀신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7
세상에 대해 정직하게 묘사하려고 했을 때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결과물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헛헛한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당신은 깨달을 것이다. 걸신들린 귀신들에게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세상은 우습다. 하지만 절대로 웃음을 터뜨려서는 안 된다.

8
“왜 인간들은 도시를 만들었나요?” 나는 아빠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기분 나쁜 가짜 미소를 지으며 적선하듯 대답했다. “문명 속에서 다 함께 조화로이 살아가기 위해서이지.” 틀렸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빠 또한 귀신이었던 것이다. 왜 몰랐지? 물론 모른 척한 것이다. 친아빠가 귀신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나도 우울해져서 죽고 싶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깨달을 때가 왔다. 내 아버지는 어둠 속 아름다운 빛에 이끌려 귀신이 되어버린,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인간들에게 진절머리가 난다. 나에게는 비슷하게 인간들에게 학을 뗀 친구가 몇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인 친애하는 랭보, 그 또한 산 채로 귀신이 되어버린 수많은 인간들을 보았고, 그런 귀신들을 햄버거처럼 찍어내는 도시라는 악마를 대면했더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동자를 너무나 낭비했고, 하여 결국은 눈을 뽑아버리고 신발이 되었다. 신발이 된 눈동자, 맹인이 된 신발……! 그는 자신이 시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그저 신발과 눈동자, 눈동자와 신발이라는 한쌍의 괴짜 커플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또한 마침내 귀신이 되어버렸다. 그 또한 귀신이 되어 인간들을 잡아먹기 시작했고, 결국 배탈이 나서 뒈져버린 것이다. 알겠지? 귀신이 되려는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것이다. 그 사실에 대해서 번번이 이렇게 슬퍼지고 마는 것은 물론 내가 고작 열세살이기 때문이겠지.

13
거리는 너무 어둡고, 그곳은 신기한 빛을 내뿜는 썩은 영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오 나의 장터,

이다지도 지저분한 보석 상자여, 쥐들의 화장대. 너무 어둡고 또 반짝거리는 이곳에서 살아남기에 내가 가진 것은 오직 눈동자와 신발, 한쌍의 눈과 한쌍의 신뿐. 나는 볼 수 있고, 걸을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한……



낭독은 무리가 다시 합류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이어졌고 흥선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웠던 표지석 앞에서 끝났다. 보신각 터가 3.1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는 사실, 눈앞에 당연하게 존재했던 것을 어떤 맥락에 놓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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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의 소설은 아마도 그날의 맥락과 가장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이 되려는 자들, 숭고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자들이 있고, 이미 귀신이며 한 쌍의 눈과 한 쌍의 신발을 가진 자들, 눈으로 보고 발로 걷는 목격자들이 쓰고 읽고 들으며 행하는 사실들이 있다. 그 사실들이 서로에게 전해지고 있는지, 전해지고 있지 않은지보다 우리가 함께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종종 대낮임에도 거리가 어둠에 휩싸인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전혀 다른 것을 경유할 때에야 조금 느껴지기도 한다. 그때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건 참 다행인 일이다. 나 또한 귀신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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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걷기는 1시간 20분을 넘었다. 보신각에서 탑골공원으로 이동하며 함께 걷기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나는 귀신 이야기를 하는데 귀신 잡는 해병대가 나와 무서웠다는 농담을 했다.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사람들과 친구가 된 기분이었던 것 같다. 집회의 중심에서 벗어나면서 큰 소리가 잦아졌다. 탑골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하고, 탑골공원 팔각정에서는 청년 정재용이 선언서를 낭독했다. 이후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종로통으로 터져 나왔다. 우리는 공원 한편에 둥그렇게 서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길게 늘어서 흘끗흘끗 확인하기만 했던 얼굴들이었다. 조금 지친 듯했지만 빛이 스며있었다. 역사를 통과해 온 동지라는 느낌에서 일지도 모르겠다. 낭독을 시작했다. 모두가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각자의 방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5. 김홍중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 88p-92p, 269p-272p, 발췌 및 편집

민중의 생존주의

“민중은 줄곧 생존의 위협에 시달려왔습니다. 구체적으로 의식주의 문제 해결이 삶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므로 관념적이라기보다 물질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그렇다고 민중은 유물론자도 아닙니다. 유물론은 관념에서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성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민중은 ‘논’하지 않습니다. 삽니다. ‘논’하면 삶은 추상화할 수밖에 없고, ‘관’을 세우면 관념에서 탈피할 수 없습니다. 민중은 삶을 ‘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삶을 삽니다. 그들은 어떤 가설을 갖고 그것이 맞는지를 실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삶의 경험에서 지혜를 낳습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아귀다툼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아귀다툼이 더럽고 치사하고 부도덕하게 보인다. 그들은 교육받은 점잖은 사람들처럼 삶의 의미를 몰라서 불안해하거나 죄책감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는 것 같다. 한탄과 탄식을 하며 ‘개같은 세상’을 저주하면서 고독이나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자살도 하지 않는다. 아귀다툼을 하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한다. 그들의 오장육부 속에는 ‘불안’, ‘고독’, ‘절망’보다 더 지독한 아픔, 그런 말들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더 깊은 한이 맺혀져 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한 ‘아귀다툼’이라는 표현에 집약된 생존에의 가열한 추구, 생존 지향적 인생관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현영학이 이러한 경향의 바탕에서 “표현할 수 없는 더 깊은 한”을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민중의 생존주의적 태도를 외부에서 비판하기보다는, 그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려 한다. 왜냐하면, 민중의 저 더럽고 치사하고 부도덕하게 보이는 아귀다툼은 사실 민중이 겪는 고난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 표현하면, 민중은 생존주의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주의를 겪고 있다. 생존 지향적 삶이 그들의 성정에 맞아서, 자발적으로 생존주의자가 되어 생존을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악착같이 모진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도저히 가혹한 삶의 조건을 버텨낼 수 없기 때문에, 생존주의를 감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병무는 이런 생존주의적 경향을 경멸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그가 놀랍게 여기는 것은 생존에 함몰되어 있는 듯 보이던 저 민중들이 생존주의적 통치성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으로 솟아오르는 자기초월의 역량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민중에 관해서 내가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한 가지 점은, 민중은 ‘자기초월’을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민중들이 자기초월하는 것을 나는 많이 봤어요. 근로자들, 학생들, 그들의 어머니들을 봐요. 그들은 그 고통을 자기가 당할 필요가 없는데, 그리로 뛰어들어가지 않나요? 그것이 자기초월의 사건입니다.”
“반면에 동학의 민중봉기나 3.1운동 같은 것,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민중운동은 성령운동과 일치시킬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기준에서 그렇게 구별할 수 있느냐고 할 것인데, 지나친 단순화일지는 몰라도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자기초월입니다. 자기 이익, 자기 능력, 결국 자신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해방의 극치상태이지요. 이는 그 어떤 기존의 것일지라도 그로부터 자유한 힘의 발휘입니다.”

우리는 아직 이 민중들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이들은 때로 오순절 교회의 강력한 번영신학에 휘감겨 치부와 안녕을 꿈꾸는 강력한 현세적 생존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박정희 정권의 개발적 생존주의에 감응되어 반공주의적 국민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신자유주의적 경쟁주의를 체화한 채 소진된 삶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영토화가 이들의 주체성을 완벽하게 생존주의라는 지층에 가두어 놓지 못한다. 민중은 탈지층화하고, 탈주체화한다. 생존주의의 외부를 찾아나간다. 역설적으로 민중에게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철학적 성찰을 통해서 생존주의를 이념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휘감은 생존욕망 그 자체가 근원적인 탈주가능성, 탈주체화와 탈영토화의 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국 모더니티의 참된 비밀은 사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생존주의적 통치성’의 논리나 정주영이 보여준 독특한 ‘자본주의 정신’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민중들이 육성하고 실천하고 보여준 일종의 미지의 생존주의에서 찾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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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에 나온 인파, 그리고 그 장소를 관통해 온 우리라는 무리. 개개인이 어떤 이념과 생각으로 이곳에 나왔든 우리는 집단으로써, 민중이라는 단위가 되는 순간이 있었다. 100여 년 전 1919년 3월 1일에 맞춰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던 이들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생존에 기초하여 자기 초월의 상태를 이룩한 무엇인가는 아니었을까, 나는 그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저 살면서, 포착되지 않으면서,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늘 두려운 상태로 존재하는 민중이라는 존재. 집회에 나온 이들과 우리의 어떤 면을 겹쳐보면서, 또 완전히 다른 면을 감각하고 싶었다.

한편으로 이렇게는 설명되지 않을 찌꺼기 같은 생각이 분명히 남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마 저들도 절대로 언어화하지 못할 마음으로, 신체를 동원해 그 자리에 서서 무언가를 말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 함께 걷기의 끝에서는 자신만의 기억을 안고, 각자가 믿는 것을 새로운 이야기로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이 걷기의 기획자 정아 님이 그걸 바라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는 탑골공원에 서서 잠깐 소감을 이야기했다. 나는 하나의 겹처럼 얇아 보이는 이 땅 위에, 얼마나 많은 역사가 겹겹이 쌓였다가 지워지고 다시 쌓여왔을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고 말했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 글을 낭독했다. 순간의 공동체였던 우리가 다시 헤어지게 될 것을 예견하면서 준비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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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54p-55p 발췌

샤론의 사건(알제리 전쟁 당시에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던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9명의 군중이 파리의 샤론 지하철역에서 살해된 사건). 샤론에서 죽었던 자들의 장례 행렬에 침묵의 무리들은 함께 모여 부동 가운데 있었다. 그 무리들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거기에 더할 수 있는 것도 뺄 수 있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무리들 전체는 헤아리거나 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전체는 닫힌 전체성이 아니라, 전체성 너머의 완전성 가운데 조용히 군림하면서 거기에 있었다. 최고의 힘, 왜냐하면 그들은 약해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잠재적이지만 절대적인 무력과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절대적 무력을 상징하기 위해 그들은 더 이상 거기에 있을 수 없었던 자들(샤론에서 살해당한 자들)을 대신해 계속 거기에 있었다. 다시 말해 무한이 유한성의 부름에 응답하였다. 무한이 유한성을 부정하면서 유한성의 뒤를 이었다. 나는 거기에 우리가 그 성격을 정의할 수 있는 공동체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가 있었다고 믿는다. 공산주의와 공동체가 결합되는 동시에 즉시 그 자체 사라지는 과정에서 실현되는 한 순간, 그러나 그렇게 실현된다는 것을 알 수 없는 한 순간이 있었다고 믿는다.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지속이 어떠한 것이든 거기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이 예외적인 날 이해되었다. 어느 누구도 해산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자들이 모일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과 같은 필연성에 따라 우리는 헤어졌다. 남아 있는 자 없이,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혀 전투 집단으로 남아 있기를 열망하면서 진정한 시위를 변질시키는 일당들의 그룹이 형성되는 일 없이, 우리는 즉각적으로 헤어졌다. 민중은 지속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민중은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다. 민중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만들려는 모든 구조들을 무시한다. 민중은 현전과 부재, 아니면 현전과 부재의 섞임, 적어도 잠재적으로 뒤바뀔 수 있는 현전과 부재이다. 그러한 점에서 민중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권력의 소유자들에게 두려운 존재인 것이다. 민중은 포착되도록 스스로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민중은 사회적 현실의 와해를 통해 드러나지만, 동시에 민중은 법에 의해 한정될 수 없는 최고 주권을 통해서 사회적 현실을 재창조하려 하는 비순응적 집요함 가운데 존재한다.



낭독을 끝으로 인사를 하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잠시 공원에 서서 감상을 나눴다. 그리고 아주 긴 뒤풀이가 있었다. 기록되지 않은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각자의 시간에 하나둘씩, 결국 모두가 자리를 떠났다.



함께한 사람들

운영: 강정아, 이연화, 이인현

텍스트 큐레이션: 이인현

진행 및 해설: 이연화

함께한 사람들: 이연화, 김예인, 원상은, 이태정, 최홍규, 박서희, 이인현, 한승우, 남궁예은, 강정아, 김솔지, 유은, 황보린, 강병우

사진촬영: 피읖


참고도서

김민호. 『데리다와 역사』. 에디스코. (2024)

김명식.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뜨인돌. (2017)

테레사 학경 차. 『딕테(DICTEE)』. 김경년 역. 문학사상. (2024)

오카 마리. 『기억·서사』. 김병구 역. 교유서가. (2024)

김사과. 「귀신들」,『하이라이프』. 창비. (2024)

김홍중.『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 이음. (2024)

모리스 블랑쇼, 장-뤽 낭시.『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박준상 역. 문학과지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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