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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Aug 24. 2020

우리를 믿던 나에게 (Short Ver.)

for <XYZ:얽힘>

숫자가 매겨진 단락은 2017년,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의 기록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를 읽고 +표시를 통해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주석을 달았다.


01

H형과 나는 그날 대학로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만난 선후배 사이로, 같이 언론사 입사를 준비했고, 가끔 만나 안부를 묻는 사이였다. 그날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나 촛불집회의 추세가 거의 최고점을 찍을 때였고, 우리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부터 시작된 들뜬 분위기에 동조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낙관적으로 보였고, 사람들은 웃으면서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비폭력 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로니에 공원에서부터 시작된 대열에 합류했다. 각지에서 온 노동단체, 학생단체, 문화단체들과 나란히 통제된 차도를 걸으면서 노래를 부르고, 길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환호를 보내며, 방송장비를 싣고 달리는 트럭을 쫓아서 달리며 소리를 질렀다.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우리는 처음 경험해본,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을 ‘우리’라고 부르고 실제로도 그런 소속감에 가슴이 고양되던 때이기도 했다.      

+

그때 H형과 나에게는 개인으로 와 닿는 불안감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것이 때로는 우리의 실존에 대한 불안정이라고까지 느껴졌으나,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좌절을 겪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이 완전한 불안정성의 토대 위로 올라갈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우리는 제법 좋은 대학을 다녔고, 주위에서 충분한 성공사례들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둘 다 지방에서 우리 스스로의 힘이라고 믿는 노력을 통해 그때의 상태까지 당도했고, 당장의 어려움들을 또한 그런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처한 당장의 불안정함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02

종로 5가에서 시작해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은 경찰에 의해 곳곳이 통제되어 있었고 차벽이 세워져 있었지만, 중심 차도만큼은 열려 있었다. 곳곳에서 충돌과 폭력이 일어났는데 집회의 참가자들은 버스를 힘으로 밀어서 흔들었고, 경찰들은 최루액이 섞인 살수차를 동원해 물을 뿌렸다. 물론 경찰의 방패와 시민들이 직접 부딪히는 종류의 충돌도 있었지만, 그런 행위들은 비폭력 집회를 유지하라는 요구가 집회를 가득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금세 제어되고 있었다. H형은 그때부터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켜서 영상을 찍었다. 물론 그건 역사적 순간에 동참하고 있다는 고무된 기분, 주위에 있는 모든 시민이 서로에게 우호적이라고 느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내가 집회의 권리가 보호받을 것이라 낙관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후에 박근혜 정부가 계엄령을 고려했던 사실이 밝혀진 것처럼), 우리는 집회에 참여한 우리의 신체를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는 공권력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때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어떤 사람이든 집회의 현장에 출현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지나친 낙관은 한편으로는 그 집회에 나타날 수 없던 이들이 충분히 존재했음에도 그들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게 해 주었다. H형과 나는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우리’에 취해있었다.     


03

H형과 나는 집회를 눈에 담으면서 카메라를 켜고 광화문 광장까지 가게 되었다. 광화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있어 우리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광화문에서 시청으로 가는 길목으로 나갔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일군의 사람들이 차벽에서 이탈한 한 대의 경찰버스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때 차벽을 구성했던 그 차는 유리창이 거의 박살나 있었고 사람들은 버스에 끈을 연결해 당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차가 마치 어떤 공권력이나 정당하지 못한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것처럼 돌을 던지고 야구배트로 내려치고 침을 뱉었다. H형은 그 장면을 카메라로 찍으면서 말을 했다. 시민들이 경찰차를 부수고 있습니다.

+

그때 나는 시민들이 경찰차를 부수는 그 장면이 상징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행위가 공권력에 대항하는 적절한 행위인가, 그것이 우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감정의 분출을 통한 카타르시스에 불과한 건 아닌가. 가장 중요한 생각은 그 행위들이 암시하는 것, 또 그 행위들이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면서 내려질 결정들, 즉 그게 결국은 우리의 안전에 위협을 가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04

이어서 H형이 한 말은 '여기를 보십시오'였다. H형의 말이 울려 퍼지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뭐라고 그랬어? 여기를 보라고? 그들에게는 영상을 촬영하는 우리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채증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어디 소속이야 라는 질문을 던졌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당연히 할 말이 없었고, 질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재미로 찍는 거예요 라는 답변을 했는데, 그때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태도를 의심에서 분노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재미로 찍는 거라고? 이 새끼들 프락치 아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리에게 다가와 휴대폰을 뺏으려 했고 우리는 말문이 막힌 채 두려움에 떨며 사람들의 적대적인 시선과 질문에 갇혀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우리가 촛불집회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안전하다고 믿던 집회에 위험을 느꼈을 때, 나는 그때의 일을 되돌아보며 이 집회에 안전하게 발을 디딜 수 있는 권리가 모두에게 있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집회에 참여한 우리가 실은 다른 종류의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치권력의 사유화로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에 대한 하야 요구, 그 이면에 각자의 삶의 불안정성에 대한 불만과 그런 불안정성을 해결하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나와 있던 개인들이 먼저 떠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촛불집회가 말하는 것들, 거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이들, 또 정상성의 기준에 맞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안정성과 집회가 주장하는 것들을 겹쳐 놓을 수 있었을까?           


05

그때 H형과 나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살수차였고, 갑작스레 원을 그린 사람들의 무리를 흩어놓기 위해 물줄기가 쏟아졌다. 대부분의 사람이 물을 맞으면서 흩어졌고, 그 틈을 타 H형과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뛰었다. H형은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 자신이 찍은 영상을 모두 지웠다. 우리는 황급히 촛불집회를 빠져나와, 다시 종로로 돌아갔고, 지하에 있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그 중국집에는 어디선가 밀려온 것 같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우리는 거기 앉아 중화요리를 시켜 술을 마셨고, TV로 촛불집회를 지켜봤다. 역대 최대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는 뉴스가 흘러나왔고, 촛불들이 파도를 타고 있었다.

+

수년이 지나서야 겨우 던질 수 있게 된 질문. 그렇다면, 그런 촛불집회에서 벗어난 불안정성들의 일부, 여성들, 퀴어들, 트랜스젠더들, 빈민들, 장애인들, 무국적자들, 아울러 종교적 인종적 소수자들 또한 자신들의 불안정성을 촛불집회를 통해 이야기했었는가? 그들의 이야기는 받아들여졌는가? 촛불집회에서 그들의 자리는 어디에 있었나? 나는 그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나? 내가 느낀 연대는 진정한 연대가 맞는가? 그들은 어떻게 비존재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나는 이제야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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