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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Mar 20. 2022

이 고난에 동참하시겠습니까?

<레벤느망>과 <축복의 집>

* 영화 <레벤느망>과 <축복의 집>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최근에 연이어 보게 된 두 영화는 내게 비슷한 감정을 선사했다. 공교롭게도 하루의 간격을 두고 관람한 두 영화는 이상하리만치 동일한 파동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국적도 시대도 다른 두 영화가 내게 준 느낌은 고통과 고난이었다. 


우선 어떤 영화들인지 그 겉모습을 보자면, 



<레벤느망>은 196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여대생이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해 겪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의 에세이 <사건>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봉준호 감독이 심사위원장으로 참여했던 제78회 베니스 영화제에서(2021년)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반면 <축복의 집>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젊은 여성이 주인공인 점은 같으나, 한국의 여성이 겪는 사건은 가난과 죽음이다. 이 영화 역시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토론토릴아시안국제영화제와 평창국제평화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이력이 있다. 





이 두 영화의 외피는 분명 달라 보인다. 1960년대의 프랑스와 2020년대의 대한민국의 시공간적 차이만큼이나 영화의 결도 상당히 다르다. '인물이 겪는 고난'이라는 넓은 범위의 주제는 비단 이 두 영화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 영화들에서 느끼는 공통점은 고난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인물을 절대적인 피해자로 만들고(설령 절대적 피해자가 맞을지라도) 고난을 매개 삼아 쉽게 감정을 건드리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인물이 겪는 과정을 묵묵히 따라간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직접적이고 가깝게 보여준다. 결국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과정에 같이 참여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레벤느망>의 경우, 이 영화의 주인공은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낙태를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의 프랑스 사회는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동조하지 않는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영화는 그런 주인공의 심리적 불안이나. 두려움, 공포 같은 내면의 고난을 다루는 동시에 몸의 변화로 인한 신체적 고통도 함께 표현하고 있다. 신체적 고난을 보여줄 때는 그 표현 수위가 제법 높아 손을 꽉 쥐게 되고 미간이 일그러지기도 한다. 심지어 낙태의 순간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인물의 비명과 신음이 더해져 시청각적으로 매우 불편한 경험이 되기도 한다. 


<레벤느망>은 축복받지 못하는 임신을 한 여성의 고난에 집중하고 있다. 개인의 고통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함축한다거나 어떤 거창한 주제의식을 드러내기보단 개인이 겪게 되는 일련의 고통스러운 과정에 더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개인에 집중한 선택 때문에 그 인물이 속한 사회에 대해서 생각하게끔 한다. 마치 옆에서 보는 것 같은 그 고통의 순간들로 인해 시대의 야만성에 대해 느끼기 때문이다. 




<축복의 집>의 고난은 임신과 낙태가 아닌 가난과 죽음이다. 반어법 가득한 영화의 제목 때문에 이 영화 또한 내내 불편한 감정을 동반한다. <레벤느망> 보다는 덜 감정적이고 건조하게 진행되지만, 이 영화 역시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영화는 재개발 지역에 사는 영화의 주인공이 일을 하고, 돈을 받고,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장례를 치르고 하는 과정들을 자세하게도 보여주고 있다. <레벤느망>과는 달리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으로 그 과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레벤느망>이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그 현장에 데려다 놓았다면, <축복의 집>은 조용히 초대하는 느낌이 강하다. 


집에서 시작된 일을 축복으로 바꾸기 위해서 인물이 하는 노력들, 보험금 수령을 위해 자살로 죽은 엄마를 질병사망으로 위장하고, 가짜 검안서를 제출하고, 숨기고, 숨어 다니고, 걷고, 뛰고, 다치고, <축복의 집>의 인물들은 보통의 가정이라면 겪지 않았을 일들을 꽤나 상세하게도 표현하고 있다. 뉴스에서나 듣던 일을 스크린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말이다. 생경하고도 불편한 경험이고, 분명히 좋은 영화지만 함부로 '좋다'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영화다. 이건 결국 그저 바라보는 구경꾼이 아니라 함께 동참하여 그 고난과 고통을 간접적으로라도 느꼈기 때문일 거다.   




<레벤느망>과 <축복의 집>은 분명 보기 편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들은 보는 내내 불편한 감정이 뒤따르고, 그 감정에 푹 젖게 만든다. 과정이 고통스러웠으니, 영화의 결말은 속 시원한 해피엔딩이어야 할 텐데 그마저도 아니다.(물론 관점에 따라서 해피엔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동참이 결국 이 두 영화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며, 결국 <레벤느망>과 <축복의 집>은 나에게 좋은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두 영화를 통해 뜻하지 않게 고통에 참여하게 된 '사건'은 돌아보니 '축복'과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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