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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May 27. 2017

억압의 이름이 된 자유

동성애자 군인 처벌 사건에 관한 사회적 반응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사실상 권위주의로 전용되어 왔다. 반공독재 세력은 집권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자유 민주주의'를 참칭 했다. 그것의 진짜 의미는 북쪽 공산당 맞은편에 있는 자본주의 체제였다. 독재 정권은 자유 대한을 수호하려 정권에 반역하는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고, 자유 시장질서는 ‘기업 할 자유’를 위해 노동자를 탄압하는 데 쓰였다. 자유의 내용과 가치를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란 이름이 수호해야 하는 초월적 기표가 되었기에 벌어지는 사태다. 민주화 진영도 이런 함정에 빠져 있다. 오랜 민주화 투쟁의 역사는 민주주의를 수복해야 할 성지로 바라보게 했고, 다원주의 같은 민주주의 내용에 대한 접근을 친일독재 세력과의 성전으로 대체해왔다. 때문에 큰 싸움을 앞두고 내부 분열은 안 된다며,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다른 의견을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작태를 벌이는 것이다.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을 거냐”는 유시민의 명언이 모범사례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사회 기본 정서는 집단주의다. 일상 세계에서도 '자유'를 억압적으로 전유하는 사례는 흔하다. 가령 진짜 자유주의자라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고 특정한 단서를 달며 자유를 장려할 것이다. 반면 이곳에서는 자유에 무거운 조건을 붙이며 제약하려 하는 관습이 있다. 한국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자유에 관한 격언은 "자유(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일 것 같다. 옳은 격언이긴 한데, 개인의 자유에 대한 한계는 모든 이의 자유를 공평하게 보장하려 지워진다. 한국에선 "자유라고 다 용서되는 게 아니다"라며 경거망동하면 응징하겠다 경고하는 방식으로 회자된다.


집단주의를 비집고 개인주의가 출현한 구십 년대 이후에도 자유는 누명을 쓰고 있다. 구십 년대의 개인주의는 탈이념화 및 염세주의와 동의어였다. 개인주의를 평등한 개인들이 조직과 사회를 구성하는 주인공으로 서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저마다의 권리와 존엄, 사적 영역을 보장하려 공적 영역을 조직했을 텐데, 개인주의가 집단과 거대 서사로부터의 탈출로 이행된 것이다. 이럴 때, 개인주의는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해리와 고립이다. 현재 젊은 세대가 개인과 자유를 강조하는 양상은 굉장히 신경질적이다. 무슨 말이냐면, 남이 내 영역에 틈입하는 걸 못 참는다. 이른바 '민폐'에 대한 적개심이 사회적 코드가 되지 않았는가? ‘백팩충’, ‘흡연충’ ‘맘충’처럼 남(나)을 성가시게 하는 타인에 대한 혐오감이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의 행동을 규제할 수 있는 '에티켓'이 절대적 규범이 되어간다. 진정한 에티켓은 상생과 역지사지의 규범이다. 남이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게 에티켓이라면, 내가 남의 불가피한 ‘민폐’를 양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에티켓이다. 개인이란 개념에서 사회적 맥락이 뽑혀 나가면서, 나를 뺀, 나에 대한 세상 모두의 에티켓으로 굴절되는 것이다. 이런 판국이니 장애인 좌석을 만들자는 것도 ‘민폐’로 간주하고 미워한다. 왜 부족한 공공장소 좌석을 장애인이란 이유로 내주냐는 것이다.


이렇듯, 상대적으로 집단주의에서 벗어난 젊은 세대 역시 자유를 타자를 규제하며 내 안위를 확보하는 자위권으로 휘두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유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그 사회에서 내 자유인들 보장될 수 있겠는가. 간단한 계산 아닌가? 게다가 젊은 세대조차 사실은 집단주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현 상황은 개인들이 집단에서 풀려 떨어진 생활을 사는 것에 가깝지, 집단주의의 독소에 대한 성찰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의문스럽다. SNS와 포털 사이트 여론 재판은 주로 내셔널리즘과 결합해 난무하며, 거대한 것에 대한 소속감과 그것이 주는 힘의 쾌감을 향한 갈구가 사회를 휘두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민주주의를 다수결의 형식으로만 파악하고, 타인의 자유가 내 자유와 중첩되는 상태에 경기를 일으키며, 다수란 숫자의 권능이 철폐되지 않은 사회에서, 자유는 다수의 것으로 특권적 가중치를 얻기 마련이다. 다수의 자유를 위해 소수의 자유를 유보하고, 소수의 자유가 다수에게 불편하다면 억압하는 것이다. 평등한 권리를 달라고 말하는 성소수자에게 “나중에! 나중에!”를 외치고, "동성애가 자유? 내가 동성애를 싫어하는 것도 자유" "혐오할 권리도 있다"는 말이 빗발치는 현실은 너무나도 논리 정연한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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