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의 사회적 영향력에 관한 진실
트위터는 '찻잔 속 태풍'이란 비웃음이 아직까지 떠돈다. 어제 보도된 김훈의 인터뷰를 봐도 알 수 있다. ‘언니의 폐경’은 인스티즈라는 커뮤니티를 거쳐 다름 아닌 트위터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트위터는 커녕 인터넷에 워드프로세서도 쓰지 않는 저명한 소설가가 기자회견장에서 입장을 밝혔잖은가. 트위터 사용자 수가 많은가? 세상 사람 중 몇이나 트위터 이용자 같은 생각을 하고 사느냐? 같은 질문을 한다면 트위터는 티 컵 사이즈 SNS가 맞다. 하지만 일정한 조건이 갖춰질 때 어떤 SNS보다 강한 이슈 파급력을 보여주는 매체다.
트위터가 '찻잔을 넘나드는 태풍'이 된 건 이슈를 선도하기 쉬운 매체의 복합적 특성 때문이다. 가입 및 이용 규약이 오프의 정체성과 연동돼 있지 않아 생활 이슈가 아닌 사회 이슈를 말하기 좋고, 짧은 글을 퍼트리는 데 특화돼있어 이슈에 빠르고 뜨겁게 반응하길 강제한다. 트위터는 포스트 열람에 제한이 적은 개방형 매체이고 강력한 검색 기능을 제공한다. 매체 안에서 큰 이슈가 형성되기 쉽고, 구독자들이 그 흐름을 확인하고 따라가기도 쉽다는 뜻이다. 포스트 공개 설정이 다양하고, 검색 기능이 약한 데다, 이슈가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댓글 달기를 통해 하나의 포스트로 수렴하는 페이스북과 정확히 대조되는 자질이다. 텍스트가 거세된 이미지 중심의 생활 포스트가 공유되는 인스타그램은 비교될 자격도 없다. 트위터 사용자 중에는 여성, 성소수자, 오타쿠, 아이돌 팬덤, 정치인 팬덤 같은 사회적 마이너리티와 특정한 관심사로 강하게 결속된 동류 집단이 많다. 이는 트위터가 정치 사회 논쟁을 위해 펼쳐진 전장인 한편 주류 사회와 차별화된 이슈, 어떤 분야에 특화된 이슈를 생산해낸다는 뜻이다.
트위터는 세상에 이슈를 보급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가령 트위터와 다른 SNS 혹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함께 쓰는 사람이라면 트위터 발 이슈를 다른 장소에 옮겨서 알리고 싶을 것이고, 기자들에게 트위터는 기사거리를 뽑을 수 있는 논란의 보고일 것이다(번외로 말하면, 트위터를 사용하진 않지만 논란거리의 동향을 확인할 목적으로 비밀 구독 계정을 파놓은 유명인도 꽤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는 트위터에서 히트한 트윗을 ‘불펌’해 구독자를 유치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트위터에서 태어난 ‘아무 말 대잔치’는 어느덧 개그 콘서트 코너 명으로 쓰이는 유행어가 됐다. 페이스북에서 오가는 사회 토론을 살펴봐도, 트위터에서 일어난 논란을 받아와 길게 정리하는 경우가 많고, 페이스북 안에서 생겨나는 독자적 이슈는 적다. 작년에는 이동진이 <캐롤> GV에서 영화의 퀴어성을 지웠다는 제보 트윗과 함께 비난의 봇물이 터졌는데, 이동진이 분노에 찬 글을 쓰며 트위터 여론에 직접 응전하기도 했다. 트위터는 사회 평균보다 한 발짝 앞선 이슈를 그 밖으로 던지고 있으며, 마이너리티에 특화된 여론 증폭장이다.
알다시피 트위터는 흉포한 SNS다. 조리돌림으로 불리는 온라인 어뷰징이 배회하는 밀림이다(사실 트위터 만의 문제도 아니지만). 하지만 여기에도 뒷면은 있다. 사회적 대상이나 인물을 비난하는 흐름이 끝없이 조성된다는 건 곧 이슈 생산력이 왕성하다는 말과 같다. 서두에서 인용한 김훈을 예로 들어보자. 트위터에서 비화한 논란이 페이스북과 커뮤니티로 퍼지고 언론 매체가 논란을 부른 당사자에게 공식적으로 전달한다, 당사자가 무어라 해명을 하면 그 해명이 트위터에서 분노를 지펴 다시금 논란이 증폭되는 순환 작용이 일어난다.
이런 경향은 2013년 경 SNS 대세가 트위터에서 다른 매체로 넘어가고, 트위터가 남은 자들, 마이너리티의 해방구가 되며 오히려 강화됐다. 그 후 일어난 사건을 꼽아보면 재작년의 #나는_페미니스트다와 작년의 #ㅇㅇ_내_성폭력을_고발합니다 같은 해시태그 운동이 있는데, 이것들이 미친 사회적 파장은 실로 육중했다. 문단 성폭력과 미술계 성폭력은 숱한 언론사는 물론, PD수첩 같은 공중파 다큐 프로에서 보도하였다. 여성주의와 소수자 운동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트렌드 하나를 끌어내는 데 큰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트위터는 다른 세상 같아서 적응이 안 된다" "트위터 하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예민해?;" "현실에서는 아무도 저런 거 이야기 안 함. 트위터는 찻잔 속 태풍이여" 같은 문화적 격차감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찻잔 속 태풍” 같은 비웃음은 사실과 다를뿐더러, 심지어 트위터의 병폐를 제대로 비웃는 것도 아니다. 정말로 트위터가 찻잔에 지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단순하다. 그 안에서 무엇으로 지지고 볶든 사회에 선물도 액운도 주지 않을 테니까. 박가분처럼 트위터를 향해 울분과 적개심을 표출하면서도 트위터를 떠나지 못한 채 헤매는 사람들 역시 트위터의 파급력에 얽매인 것이다.
설명했듯, 트위터가 보급하는 '이슈'는 주로 폭로, 고발, 조리돌림의 형식으로 생산된다. 막말로 가계정 하나 파서 유명인 하나 저격하면 리트윗 수백 회가 보장되고 페이스북과 언론사에서 받아쓴다. 이 점에 사회적 쓸모와 위험성이 있다. 트위터는 보수성과 전근대성이 과잉된 한국 여론 생태계에 균형을 잡아주는 점에서 희소가치가 분명한 한편, 그 균형을 과격한 방식으로 바로 잡는 점에선 균형감각이 없는 매체다. 트위터가 주류 사용자들이 자부하듯 '문명'과 합리성의 공간으로 우뚝 서려면 내부에서 의식적 거리감을 갖춘 채 매체를 사용하고, 외부에서 절차적 합리성을 보정하고 이슈를 걸러내며 호응해야 한다. 이런 문제 의식은 트위터의 영향력을 솔직하게 긍정할 때 비로소 도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