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화제 <알쓸신잡>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그저께 방영분을 보니 육필과 타자로 글 쓰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둘 중 어느 것이 글 쓰는 데 유리하냐는 갑론을박이 오가는 가운데, 정재승은 과학 연구에 따르면 두 방식 사이에 글의 품질 차이가 없다고 알려줬다. 그냥 내 경험을 말하자면 다르긴 다르다. 내용이 차이 날 건 없는데 문장은 차이가 난다.
나는 글쓰기 연습을 도서관에서 했다. 노트북도 없었고, 이십 매에서 오륙십 매 분량의 글을 연습장에 플러스 펜으로 쓴 다음 워드로 쳐서 컴퓨터에 아카이빙 했다. 그런 과정을 거듭 반복했는데, 그러는 동안 문장력이 많이 늘었다. 표현력이 는 건 아닌데 문장 구조가 반듯해지고 주술 호응을 놓치지 않게 됐다.
정확히 어떤 차이냐면, 글 쓰는 '호흡'이 다르다. 타자는 열 손가락을 놀려 글자를 빠르게 입력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손가락이 헛돌며 생각보다 글이 먼저 나갈 때가 있다. 육필은 한 자 한 자 또각또각 박아 넣는다. 글과 생각이 이인삼각으로 함께 나아가는 기분이 들고, 글을 쓴다는 행위가 마음을 차분하게 정돈해줬다.
쉽게 고치기 힘드니까 숙고하며 글을 쓰는 효과도 있다. 유시민 말대로 키보드로 쓴다고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닌데, 그러려면 좀 더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육필은 글쓰기에 앞서 생각하기를 강제하는 성격이 있다. 머리 속에서 단락의 흐름을 구조화하는 훈련을 하게 되고, 그건 응집력 있고 정교한 문맥을 구성하는 능력으로 통한다. 키보드를 두들기다 보면 생각 나는 대로 "촤르륵" 일필휘지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렇게 쓰고 난 후 퇴고하다 보면 문맥의 초점이 흩어져 있고 중구난방일 때가 있다.
지금은 펜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귀찮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문장이 지저분하다 싶으면 기분전환 삼아 쓰고 싶은 글을 원고지에 연필로 썼다. 그러면 문장력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순전히 내 느낌에 불과할 수도 있다. 정재승이 말한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 과학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하니 그게 맞을 거다. 그런데 글쓰기에 재미를 붙일 무렵에 글솜씨가 늘고 있다는 그 '느낌'이 동기와 자신감을 부여해줬다. 개인의 경험 세계 안에선 느낌이 차이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