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코드가 맞으려면 세계관이 공명해야 한다. 유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세계의 허당스러운 빈틈이 출현하는 순간이다. "나라의 경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파리가" 앉는다거나, 교수님의 엄숙한 말투를 불현듯 따라 한다거나. 유머는 이렇게 상황과 좌중의 의표를 찌르며 나타난다. 다르게 말하면, 어떤 높낮이와 시간,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같거나 다른 빈틈을 발견한다.
"지금부터 농담을 하겠습니다" 포즈를 취하고 말하는 얘기는 유머가 아니라 일종의 공용어다. "오늘 날씨가 참 좋은데요?" 같은 인사말과 다를 바 없다. 유머는 체계 없이 툭툭 던지는 말이다. 코드라 부를만한 개성은 그런 무질서와 분방함 속에 있다. 남들이 들었을 때 대체 뭐가 웃기는지 알 수 없는 말로 킥킥 거린다면 그와 나의 세계는 열정적으로 떨리고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사람과 염세적인 사람이 유머를 나눌 수 있을까? 염세적인 사람의 농담은 긍정적인 사람에게 사회를 향한 야유처럼 들릴 테고 긍정적인 사람의 농담은 염세적인 사람에게 자기계발을 위한 유머 서적의 예문처럼 들릴 거다. 유머 코드가 맞아야 친해질 수 있다거나 친하지만 유머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말은 비문이다. 유머 코드가 맞는다면 이미 친한 상태다. 그와 나만 아는 세상의 놀림거리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우스갯소리로 죽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즐겁고 편안하고 용기가 솟는다. 세상을 보는 내 관점을 꾸밈없이 표현해도 되고, 나와 같은 부류가 또 있다는 동질감에 이대로 살아도 혼자가 아니겠다는 안도감을 얻는다. 농담을 던진다는 건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 밟는 과정이라기보다, 나와 친한 사람이 누군인지 찾아내려 물어보는 퀴즈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