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갑질'에 관한 공동체적 고찰
‘갑질’이란 말의 쓰임새는 널따랗다. 본래는 업무상 종속관계, 업체 간 하청관계 등 확고한 권력관계에 포획된 사건을 일컫지만, 사회적 지위를 앞세운 행패를 가리킬 때도 있다. 최근의 화두는 ‘소비자 갑질’이다. 백화점 VIP 모녀는 물론 ‘땅콩 회항’ 조현아 역시 오너 일가란 성검을 고객의 권좌에 앉아 휘둘렀다. 숱한 ‘진상’ 손님 목격담, 감정 노동자 학대와 자살 뉴스도 더 이상 놀랍지 않다. 그러니까 소비자란 이름은 어느 틈에 권력이 되었고, 소비 시장은 상명하복의 생태계가 되었다. 매우 보편적이라서 느슨하고 유동적인 권력이지만, 반대로 보편적인 것이라 사태는 작지 않다. 지금 여기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와 나, 모두는 소비자란 호흡기를 떼고 신진 대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격적 논의에 앞서 일러둘 것이 있다. 소비자 ‘갑질’은 두 부류가 있다. 첫째는 말 그대로 부당한 요구를 하는 소비자다. 이것이 잘못이라는 점은 재고할 여지가 없다. 둘째는 부분적으로는 타당한 요구를 하는 소비자다. 그 자체론 일리가 있지만, 서비스 시스템의 결함으로 일선에서 수용할 수 없는 불만을 일선 종사자에게 쏟아붓는 경우다. 이 경우 분별력을 잃은 고객에게 잘못이 있지만, 근본 문제는 서비스 시스템의 부조리다. 둘은 싸잡아 다룰 수 없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빈도와 양상을 각각 자세히 가려봐야 한다. 다만, 여기서는 첫 번째 쟁점에 선을 긋고 집중하려 한다. 서비스 시장을 횡행하는 왜곡된 소비자 정체성이 거기서 극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쟁점 또한 장차 서술할 공동체적 주체의 상실이란 개념으로 어느 정도 설명될 것이다.
시장이 하사한 힘을 휘두르는 소비자를 단적으로 일컫자면 속물snob이다. 관용적으로 말하는 속물근성 따위와 다른 의미다. 프랑스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헤겔의 ‘역사의 종언’ 이후 등장할 생존 양식으로 동물적인 것과 속물적인 것을 정의했다. 코제브에게 속물적인 것, 스노비즘snobbism은 아무런 실질적 이유가 없음에도 형식적 가치에 입각해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는 행동양식이다. 비록 부정할 계기가 전혀 없다 해도 속물은 구태여 무언가를 부정하고 형식적 대립을 고집한다.
소비자라는 지위는 화폐와 (물질적/비물질적)상품의 교환행위로 성립한다. 적정한 가격에 적정한 상품을 구매했다면 소비행위는 이행했다. 가령, 무형의 서비스를 구매할지라도 감정노동자의 인격은 교환 대상이 아니란 말이다. ‘고객의 권리’를 넘어 ‘고객의 권력’을 영위하는 소비자들의 버릇을 떠올려보라. 항상 교환행위와 관련이 없거나 적은 권리를 내세운다. 확인할 필요 없는 자명한 사실을 점원의 입으로 들으려 하거나, 별달리 쓸모도 없는 사소한 이해관계를 까다롭게 어필한다. 상대방과의 상하 위치를 음미하듯 능숙한 제스처로 잔심부름을 부탁하고, 상품의 상태가 아닌 점원의 태도에 불만을 제기한다. 그들에게 고객 상담 센터는 상품이 아닌 상품을 사는 과정에서 벌어진 불쾌를 요란하게 쏟아내는 변기통이다. 자신에게 제공된 서비스 환경을 하여간 부정하거나 격하하는 방식으로 ‘손님은 왕’이란 형식적 가치를 고양하는 것이다. ‘돈 주고 물건 샀으니 대접받아야 한다’는 확신의 소산이다. 그것은 실질 성격에 비해 과잉된 권리지만 정당한 권리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갑질’의 사달은 왕왕 저들이 빼앗긴 고객의 권리를 찾으려 할 때 벌어진다. 빼앗긴 권리라고? 그렇다. 그것은 손님, 고객, 소비자의 당연한 특권이다. 화폐의 교환 능력에 부가된 속물적 효용을 관철하는 데 실패했을 때, 권리의 과잉을 충족하지 못했을 뿐인데도 권리의 본질이 침탈당한 것처럼 분노한다. 그 분노에는 소비 행위가 위무하지 못한 자존심, 오만함, 열등감, 자격지심 같은 감정의 찌꺼기가 눌어붙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무리한 명령을 퍼부으며 숫제 울분을 토한다. 권리에 대한 항변은 빼앗긴 자의 특권이며, 빼앗긴 자일수록 정당하게 항의할 수 있다. ‘갑질’의 다른 이름은 그러므로 피해자 코스프레다. ‘백화점 갑질 모녀’가 모 시사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실패한 유머 같은 토로는 의미심장하다. “갑의 횡포다? 이건 을의 횡포라고요!” 한마디로, ‘상처 입은 속물’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왜 사람들은 상처 입은 속물이 되어 가는가. 나는 공동체의 소실이란 키워드를 뽑아 들고 싶다. 한국사회는 비교적 최근까지 전근대의 도상에서 산업화의 격변을 겪었다. 아마도 사회에는 80년대까지 전근대적 삶의 토대가 존속했을 것이다. 대인관계로 결속된 채 분업으로 의식주를 자급자족하는 단독 주택 공동체다.
TV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70·80년대 마을 풍경을 펼쳐보자. 주민들은 폐쇄적이고 일상적으로 부대끼며 마을의 대소사를 함께 경유한다. 상점과 쌀집, 정육점과 이발소, 국밥집과 철물점이 있어 서로의 생활 요구를 거래 관계로 분담한다. 점포를 운영하는 것은 주민이며, 점포를 이용하는 것도 주민이다. 즉, 저들은 자영업자 이전에 주민이며, 손님 이전에 주민이다. 복덕방 김씨, 정육점 박씨, 목욕탕집 이씨 같은 ‘주민으로서의 호명’을 부여받았다(90년대 초반에는 모 공영방송사 PD의 애칭이 ‘쌀집 아저씨’였다). 그것은 소비 시장의 자장이 도래하기 이전의 수평에 가까운 거래 관계였다. 인간관계의 긴장과 책임이 서로에 대한 횡포를 방지하였을 것이다. 들르는 점포마다 ‘고객의 권리’를 꺼내 드는 주민이 있다면, 뒷말과 따돌림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전근대적 공동체를 낭만화한다는 반론은 그만두시길. 그때 그곳에서는 전근대적 신분질서에 따른 차별이 음지를 드리웠을지 모른다. 영화 <친구>에서 장의사 아들 동수는 “죽은 사람 염하는 아비”를 둔 원죄로 아이들에게 놀림당한다. 어쩌면 그렇게 작고 단단한 공동체일수록 배제는 은밀하고 조직적으로 수행된다. 하지만, 시체를 닦는 건 여전히 고되고 궂은일이되, 오늘날 상조 회사 사업가가 멸시당하는 일은 없다. 거기엔 공동체의 분업 구성원 ‘기술자’나 ‘장사치’가 아닌, 이윤의 집적에 따라 공동체의 말뚝을 넘나들며 의식주를 거래하는 자본이 있다.
1960년대는 단독주택의 시대였다. 1970년대에 아파트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1989년 수도권 1기 신도시 개발 계획은 주택 200만 호 건설을 장담하였다. 1992년 말 입주가 끝난 신도시는 도시 중산층의 아파트 거주를 정착시켰다. 사람들은 이촌향도의 터널을 지나 도심 인구 과밀현상에 도착했으며, 부동산 분양가를 지도삼아 교통과 교육의 요지로 이삿짐을 쌌다. 경제 규모 성장과 대중교통, 통신수단 발달은 일상의 반경을 넓히며 ‘유동인구’라는 신세기 노마드를 창조했다. 마을단위 공동체는 아득하고 빽빽하게 솟은 건물에 칸칸이 들어선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가구단위 공동체로 분할 재편되었다. ‘주민’들은 밀폐된 칸막이 안에서 ‘개인’으로 원자화했다(또는 오피스텔과 원룸 건물 속으로 깊숙이 침잠했다). 통장과 반장은 입주자 대표로 바뀌었다. 주민들은 한 달에 한 번 입주자 회의에서 회동하며, 경비원 임금 삭감과 관리비 절감을 모의한다. 생활 단위 공동체는 이권 단위 공동체로 이행됐다. 아파트엔 상가 건물이 들어섰고, 몇백몇천의 낯선 사람이 출입문을 민다. 이제, 너와 나는 서로를 모른다.
생활 구역 해체와 인구 밀집에 따라 의식주 공급을 융단 폭격하는 대형 유통업체가 등장했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났고, 그들은 장 볼 시간을 줄이려 주말에 한 번 카트를 끌고 마트를 순회한다. 그곳은 화끈한 바겐세일과 만국박람회를 방불케 하는 제품들을 전시한 ‘고객 감동’의 신천지다. 아파트 입주민들이 떠난 자리에서 쌀집과 식육점, 철물점, 구멍가게는 휘청거리며 아사해갔다. 잔존한 단독주택들은 도심 재개발의 삭풍에 스러지며 주상복합 건물의 빈터가 되었다. 유동인구라는 수요의 나침반을 따라, 거리에는, 온갖 업종의 프랜차이즈 간판이 세워졌다. 불과 몇 백 미터를 사이에 두고 편의점 불빛이 눈부시게 명멸한다. 점원들은 표준화된 유니폼을 입고 표준화된 인사말과 표준화된 서비스로 ‘고객’을 맞는다. 인격의 자취는 가뭇없고 소비 시장의 부품만 손님 앞에서 바코드를 찍는다. 그의 잘못으로 고객 만족의 톱니바퀴가 어긋난다면, 그와의 대면마저 우회한 채 본사에 ‘컴플레인’을 넣으면 된다.
공동체 분업 종사자들은 거주 터전과 노동 시장에서 떠밀린 채, 월세와 권리금, 유동인구 수치의 등심선을 따라 생계의 닻을 내리는 체제의 난민, ‘자영업자’가 되었다. 우리는 그들과 대화하고 동락하고 다툼하지 않는다. 다만 거래할 뿐이다. 인격적 긴장과 책임의 방벽은 철폐되었다. 전체 근로 노동자 가운데 자영업자 비율이 30프로에 달하고, 서비스업 종사자가 1000만 명을 넘어서는 나라에서, 이 사실은 국민이 두 부류로 유사 계층화하였음을 뜻한다. 공동체 구성원은 사라지고 서비스 공급자가 남았다. 그리고 그 위에 소비자가 있다. 너는 나요, 나는 너라는, 정체성의 동류의식을 지지할 거치대는 부서졌다. 소비자이기 이전에, 공급자이기 이전에, 동등한 ‘인격’이라는 진실은 체감되지 않는다.
물론 공동체가 망가지고 유대감이 조각났다는 현실에서 곧바로 소비자의 특권적 입지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소비시장엔 위계의 사다리가 놓여있다. 그 사다리의 발판 하나는 서비스업 종사자를 천대하는 사농공상의 전근대적 인습이다. 또 다른 발판은 ‘서비스 품질 차별화’를 통해 브랜드 가치를 재고하고 고객을 유치하는 경쟁 전략이다. 그 전략에 공모하게 하는 것은 과포화된 서비스업 시장의 경쟁압력이다. 그렇다면 사다리의 꼭대기, 시장의 추상적 질서의 커튼 속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상품 교환가치에 그것을 초월하는 소비 권력을 끼워 팔며 화폐와 맞바꿀 때, 결과적으로 증폭되는 것은 돈이 뿜어내는 강력한 물신이 아닌가?
소비자란 정체성은 소비의 원천, 돈에 의해 구성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스마트 매체를 막론하고 온갖 대상과 포맷으로 구축된 소비 시장을 떠나서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지금 사회를 덮고 있는 가장 뚜렷한 정체성은 소비자다. 내가 지닌 부에 따라, 지불 한도 여력에 따라, 소비자는 경배받거나 소외당한다. 고액의 구매자는 당연하게도 거대한 권력을 원하며(“한 시간에 내가 700만 원 쓰는데 너희도 쓸 수 있냐”) 소액의 구매자는 일상적 소외감과 계층적 열등감을 만회할 권력을 얻는다. 또는 내가 내는 돈만큼 대우해달라 대거리를 한다(“내가 왜 돈을 쓰면서 이런 경우를 당해야 하는데!”). 그것은 잠재적 신분관계를 눈 앞에 드러내거나, 일시적 신분상승을 일거에 쟁취하는 놀라운 기적이다. 그러나 ‘내’가 아닌 ‘내게서 탈부착’되는 화폐에 의한 잠정적, 가변적 권능이므로 포식은 곧바로 굶주림을 낳는다. 그렇게 소비자는 돈의 물신에 길들여진 속물, 돈의 파괴적 속성에 학대당하는 마조히스트가 된다. 2014년 대한민국에서 공급자는 물론 소비자 위에 군림하는 최종 승자는 자본주의 자체다.
숱한 ‘갑질’ 가운데 ‘소비자 갑질’은 특히나 비극적인 면이 있다. 사실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계층에 속한 평범한 사람끼리 폭력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자존감을 잡아먹으며 나의 자존감을 채운다. 그러한 동족상잔의 대안으로서 “사람이 희망이다” 같은 낭만적 구호가 허망한 콧노래인 까닭이 여기 있다. 우리는 구조적, 문화적, 관습적 차원에서 수평적 유대감이 전 방위적으로 포위당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은 머리로는 긍정해도 몸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가치다. 해답은 무엇일까? 자영업 지옥을 만든 경제 체제를 손질하고, 대형 서비스 업체 고용자 페널티 체계를 허물어야 한다. 불합리한 서비스 시스템의 총알받이로 일선 근로자를 앞세우는 악습도 뜯어고쳐야 한다. 감정노동자 보호법 같은 제도적 안전망도 입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이념적 대안을 말하겠다. 먼저 돈의 유물론적 성격을 직시하고, 화폐와 상품의 교환 관계를 철저하게 추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돈의 물신을 벗겨내고 소비자 권리의 논리적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 다음으로 각자의 인격적·계층적 상동성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재구성하는 사회적 노력을 통해, 소비자란 이름에 앞선 공통 정체성을 개발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가 처한 깊은 곤경 하나는 전근대적 주체에서 근대적 주체로의 이행이 이뤄지지 않았고,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가 의문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결국 과제는 새로운 공동체적 주체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속물의 시간을 넘어 인민의, 시민의, 연대의 시간으로 나아가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