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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Nov 09. 2017

사회가 조제한 비아그라

'영포티' 담론 비판

‘영포티’라는 신조어가 화제다. 나는 이 단어를 작년 초 한국일보 박선영 기자의 기사에서 처음 봤다(“한국사회 변화의 열쇠 ‘영포티(Young Forty)’”). 이 기사가 ‘영포티’란 표현을 입안한 최초의 기사인진 알 수 없고, 그게 중요하지는 않다. 최근 각광받는 이 신조어가 가리키는 바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자기가 좋아하는 걸 소비할 줄 알고, 과감하게 꿈에 도전할 줄 아느냐 여부”라고 한다. 그러니까 ‘영포티’는 ‘새로운 40대’의 소비성향에 초점을 맞춘 신조어다. 


70년대 생들이 과거의 40대들과 구분되는 코호트인 건 사실이다. 그들은 사회의 새로운 메인스트림이 된 삶의 양식을 일상화한 첫 세대다. 90년대는 국내 차원에서는 민주화 항쟁이 종료되고, 국제 차원에서는 공산주의 블록이 붕괴되며 ‘이념의 종언’이 언도된 시대이다. 핵가족화와 해외 문화 개방, 대중문화의 번성, 컴퓨터 기기 보급 등이 저들이 성장한 나날의 배경화면이다. 소비 성향과 개인주의, 대중문화 친화력, 퍼스널 컴퓨터와 인터넷에 기반을 두어 스마트 매체를 아우르는 미디어 리터러시의 맹아가 그렇게 퍼졌다. 때문에 현재의 40대는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에서 5060보다 1020과 가깝고, 전체 세대의 성향을 정확히 둘로 가르는 절취선이다. 90년대에는 이런 사회문화적 단절이 '신세대'란 이름으로 인격화됐었다. '영포티'는 오래된 이름 '신세대'의 귀환이다. 다만 70년대 생들에게 이제와서 '젊음'의 수식어가 헌사된 데는 그 이상의 내막이 있다.


솔직해지자. 40대는 어떤 기준에서도 젊은 나이가 아니다. 아무리 기대 수명이 82세까지 늘어났다지만, 인생의 절반을 산 사람은 청년보다 중년에 가깝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발기부전이 찾아오는 나이를 청춘이라 부를 수는 없다. ‘젊은 40대’라는 형용모순의 타이틀은 인구학적 변화와 재편 때문에 제작된 것이다. 요 10년 동안 문자 그대로의 젊은 세대 10·20대 인구는 급감했다. 현재, 전체 세대 중 가장 병력이 많은 인구 집단이 40대다. 90년대와 00년대까지 소비 시장의 주역이었던 20·30대의 자리를 40대로 대치하는 데 따른 사회적 이름을 선물 받은 것이다.


젊다는 것은 아직도 미래가 멀다는 뜻이다. 흘러간 과거를 슬퍼하거나 닥쳐 올 늙음을 근심하기보다 현재를 즐겨도 좋다는 거다. 70년대 생들은 최신 라이프스타일에 적합한 특질을 안성맞춤으로 지니고 있다. 이들에게 소비 주체로서의 자존감을 불어넣으며 시장의 주인공으로 호명하는 흐름이 바로 '영포티'다. 이 흐름은 꽤 오래전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2010년대 초반 신드롬을 일으킨 90년대 복고는 ‘영포티’들이 청춘을 보낸 시절을 미디어에 현현시키는 기획이었다. 그 후 보급된 유행어 '아재'는 일견 젊은이들이 보는 중장년 남성의 모습을 풍자하며 세대 차이를 드러내는 것 같지만, 실은 중년 남성들에게 젊은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구실로 인터셉트당했다. 구닥다리라고 구박당하는 ‘친근한’ 이미지 말이다. 급기야 저 말이 ‘아재 파탈’로 진화한 판이었으니 볼 장 다 봤다. '영포티'는 '아재'를 엘레강스하게 조탁한 버전이며, 저출산-고령화와 함께 진행된 70년대 생 '회춘' 프로젝트가 완료 단계에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여기엔 그만큼의 이데올로기와 폐단이 있다.


‘영포티’란 호명에서 40대 여성들은 배제돼있다. 가령 “'사초남'이 워길래? 꾸미는 남성이 유통업계를 움직인다”(스포츠조선) 같은 헤드라인은 ‘영포티’의 주인공이 직장 중간 관리자급으로 경제력을 보유한 40대 남성임을 시인한다. 대중문화에서도 그렇다. 요즘 방영되는 멜로드라마에서는 연상연하 커플이 이전보다 빈번하고 나이 격차도 커졌는데, 늘 나이 든 남성과 젊은 여성이 '마음'을 나누는 연애담을 그려낸다. 이런 격차 로맨스는 일상을 향해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취업난으로 경제력 있는 20대 남성이 줄어들면서, 아마도 20대 여성들이 그 윗세대 남성들을 대체재로 택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문제는 중장년 남성들이 자신의 남근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상패로 젊은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위험이다. ‘영포티’의 장력 아래 있는 저 로맨스 드라마들과 남성 뷰티 프로그램들은 위험한 모범사례를 전파하는 셈이다. ‘영포티’의 ‘젊음’이란 접두사가 남성들에게 독점된 것엔 전통적 젠더 권력은 물론, 여성들이 30대를 거치며 경력단절을 겪고 ‘경제력=구매력’이 약해진다는 이유가 있다. 여성들은 40대에 이르러 자식들이 입시 교육에 투입되고, 자신이 성적 매력을 상실했다고 규정당한다. 아내와 엄마라는 정체성에 포획당하면서 스스로를 위한 독립적 활동을 하기 힘들고 사회적 주체로 인정받기도 힘들다. ‘아재 파탈’이 ‘영포티’로 진화하는 동안, 이 사회는 중장년 여성들을 '맘충'이란 이름으로 불러줬을 따름이다.


영포티는 10·20대를 청춘의 지위에서 밀어내고 그 상징 자본을 차지하는 성격도 짙다. 40대가 젊은이라면 그 아래 세대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저 늙은 젊은이들의 사회에서 그들은 젊은것이 아니라 '어린' 존재이지 않겠는가? 이런 세대 정의의 교란은, 젊다는 상태에 따른 사회적 후의 및 치기와 도전, 책임보다 자유의 강조 같은 ‘청춘의 특권’을 중년들에게 이전할 수 있다. 70년대 생은 역사상 어느 세대보다 그 특권을 화끈하게 누린 세대다. 80년대 사교육 금지 정책의 여진과 90년대 마지막 호황으로 ‘신세대’의 해방감을 들이켠 사람들이 또 한 번의 청춘을 탐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고착된다면, 젊은 세대는 청춘의 주인공이 아닌 들러리로서 한층 주변화되고 대상화된다. 2000년대 후반 속칭 ‘88만 원 세대’로 청년 담론이 부흥했고, 그 10 년 후 '영포티'가 대두한 상황 역시 의미심장하다. 10년 전엔 에코 부머(79년생~) 중 인구수가 많은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생들이 취업난에 직면했지만, 그들은 이제 그 시기를 통과했다. 현재 10·20세대는 전체 세대 중 최소 인구집단이라 사회 자원과 담론을 투자할 시장가치도 적은 것이다. 40대는 사회경제적으로 중간 관리자에 이른 기성세대다. 이들이 젊은 세대의 자의식에 부푼다면 그 아래 세대에 대한 그들의 책임감이 옅어질 것이고, 미래 세대를 위한 자원 분배도 교란될 수 있다. 이상의 시계열적 구도는 흡사 88만 원 세대론에서 ‘영포티’라는 세대론으로 궤적이 이어진 듯한 그림을 그려주는데, 세대론의 ‘내용’은 흩어지고 그 ‘형식’만 채택되어 활용되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88만 원 세대’ 저자들은 젊은 세대의 불안정 노동을 고발하기 위해 세대론이란 ‘당의정’을 입혔다고 밝혔지만, 그 단맛은 지나치게 달콤하고 중독적이었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영포티’의 뒷면을 신랄하게 까발렸지만, 이상의 지적은 일정 부분 캔슬해야 한다. ‘영포티’란 기획은 사실은 40대들 자신에게도 꽃노래만은 아니다. 앞서 들춰낸 ‘영포티’ 내부의 젠더적 배제가 그렇거니와, 세대론 자체가 그것에 포섭되지 않는 다양한 갈등과 균열을 반영할 수 없는 비전이다. 40대는 과로사 인구가 가장 많은 세대이고 단축된 노동 연한으로 퇴직에 직면한 세대다. ‘영포티’는 가정을 부양할 부담에서 자유로운 중상류 계층 및 최근 증가하는 1인/비혼 가구와 연계된 기획이지만, 현실에서 문화소비의 자존감을 실현할 만큼 기름진 삶을 사는 40대는 많지 않다. 혹은 그만큼 혁대를 졸라매며 소비에 나서는 모험적인 가계부를 꾸려야 한다. 40대 내부의 상이한 계급과 정체성, 나아가 계급 문제 자체를 은닉하며 한 세대를 문화소비주체로 단일화하는 판타지, 그것이 '영포티'다.


‘영포티’는 마치 나이에 얽힌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자유와 해방의 찬가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남성의 연령적 대상화를 풀어헤치면서 여성의 연령적 대상화는 조여 매고, 40대와 젊은 세대 사이 높낮이를 세우는 사회적 비아그라다. 섹스 없는 삶은 암담하겠지만, 상상 속에서 부풀어 오른 남근이 삶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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