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모델, 하향식 축구 발전 시스템이 끝나다
2018 러시아 월드컵 한국 팀의 첫 경기가 있었다. 예상대로, 그러나 예상보다 더 무력하게 스웨덴에게 패했다. 유효 슈팅을 하나도 쏘지 못한, 나름은 충격적인 경기였지만 여론의 반응은 싸늘하달지 담담하달지. 이번 대회엔 적지 않은 국민이 한국 팀에 흥미가 없어 보인다. 특히 신태용 감독과 축구협회 김호곤은 대회 전 부터 도발적인 인터뷰로 논란을 샀다.
국민들이 대표팀을 비난하는 만큼 케이 리그에 관심을 가진다면 좋겠다
예의 그 (평가전 부진은) ‘트릭’ 발언과 함께 대표팀을 향한 환멸에 기름을 부은 발언이다. 대표팀 감독이 할 말은 아니지만, 말 자체는 옳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평소 실력이 뒷받침돼야 선전할 수 있는데 월드컵에만 기대를 거는 건 잘못이란 거다. 저변이 탄탄해야 최대치도 확장된다는 논리다. 동감한다. 정론이다. 그런데 한국 실정에 곧장 대입될 수 없는 논리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저 말이 옳다. 유럽과 남미는 오래전부터 축구를 즐겼고 축구가 나라의 국기인 데다 생활권에 파고든 스포츠다. 높은 인프라를 기반으로 대표팀 수준도 높다. 한국은 정확히 반대다. 국내 리그 활성화가 대표팀 성적을 추동한 게 아니라, 대표팀이 국가 대항전에서 거둔 실적이 국내 축구 인프라를 거미줄처럼 뿌렸다. 축구는 남미, 유럽과 달리 아시아에 없던 스포츠다. 한 발 앞서 안착한 프로 야구가 국민 스포츠의 왕좌를 점해왔다. 프로 축구 선수들은 대표팀 경기를 통해 인지도를 얻었고 그 점이 유명세와 몸값에 반영되는 구조가 형성됐다. 그러니까 상향식이 아니라 하향식으로 발전한 스포츠다.
02년 월드컵은 하향식 시스템의 정점이었다. 월드컵 4강의 기적이 강림했으며, 전 국민이 축구로 하나 되는 경험을 했다. 축구란 스포츠에 관한 인식이 재고됐고, 월드컵 직후 케이리그가 전에 없는 특수를 누렸다. 관중과 서포터가 유입했다. 이때 대표팀에서 활약한 젊은 세대는 꿈의 리그 유럽에 진출했다. 그들이 향후 10년 간 대표팀을 이끌며 남아공 16강까지 이뤘다. 유럽 리그 중계 인프라가 갖춰졌고, 한국 축구의 위상도 높아졌다. 내셔널 스포츠로서의 위상 재고는 국내 프로 리그에도 반영이 된다. 또한 4강 신화와 박지성을 지켜보며 축구를 시작하고 해외 진출을 꿈꾼 02년 키드가 탄생했다. 이 선수들이 현재 대표팀 주축이다.
구조적으로도 월드컵 붐은 인프라를 개혁했다. 4강 신화를 지속하려면 축구 강국들처럼 체계적으로 선수를 육성해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각인됐다. 02년 월드컵 수익 수 백억이 유소년 축구에 투자됐고, 유소년 정책 추진력이 현재 전국 학교 운동장에 잔디를 깔았다. 늘 이래 왔다. 월드컵은 한국 축구의 세계화를 고대하는 국가적 사육제라 좌절감을 재울 제물도 낳았지만, 세계 경쟁력 강화를 위한 투자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터닝 포인트였다. 02년 케이 리그 붐도 "자국리그가 발전해야 대표팀도 발전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낳은 현상이었다.
이건 한국적 특수성이다. 한국은 사회 전체적으로 역동성과 내셔널리즘이 강한 데다, 엘리트 집단의 성취가 국가를 대표하는 하향식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사회 전 분야에 들끓는 세계화(두유 노우 김연아? 지성팍?)의 열망이 여기서 분출되어왔고, 스포츠 분야에선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으로 나타났다. 전통 있는 국제 대회가 없는 야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스포츠가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단언컨대, 축협은 이 하향식 시스템의 최고 수혜자다.
축협은 축구 대표팀 전 분야에 특화돼 그를 관장하는 단체다. 케이 리그를 운영하는 단체가 아니고, 축협 운영비에 들어가는 세금도 별로 없다. 스폰서 유치로 협회 운영비를 조달하고, 스폰서는 대표팀의 국제 대회 성적, 내셔널 팀으로서의 입지에 따라 유치한다. 축협이 현재 규모로 성장한 결정적 계기가 02년 4강이었다. 축구는 월드컵 덕분에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가 됐다. 축구는 내셔널리즘이 가장 강렬하게 투여되는 스포츠다. 그 덕에 야구 협회보다 훨씬 덩치가 큰 거대한 협회가 탄생했다(야구 협회 예산 백억 미달, 축협 예산 천억 육박). 단일 종목 협회로선 가장 규모가 크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시스템이 옳은지 그른지, 더 건강한 대안은 없는지 고민할 수 있고, 중요한 고민이다. 엄밀히 말하면 역 피라미드형의 안정성 없는 구조이며,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한국 사회 뿌리에 박힌 구조다. 축구계를 떠나 사회 전체에 주어진 조건이며, 이 점에 대한 이해 없이 한국 축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만큼 국민적 주목을 받는 축구 대표팀이 왜 이 모양이 됐을까.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1) 더 이상 월드컵이 선수들에게 투쟁심을 일으키지 못한다.
90년대까지는 월드컵 선수단 절대다수가 국내파였다. 몸값을 올리고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월드컵이었다. 이제는 세계 각지에 유럽 구단의 스카우터가 파견돼 있고 유스 시스템이 활성화돼 해외 진출 통로가 따로 형성됐다. 이미 해외에 진출한 선수들은 리그 활약이 훨씬 중요하고, 유럽 국적 선수들과 달리 대표팀에 참여하려 장거리 이동을 감행한다. 무릎 부상에 시달리던 박지성이 대표팀에서 일찍 은퇴한 이유다. 부족한 현실적 동기를 애국심이란 추상적 동기로 대신해야 하는데, 알다시피 젊은 세대에선 내셔널리즘이 약화되고 개인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축구는 여타 '진짜 비인기 종목'처럼 국제대회 수상 하나가 선수 인생과 지도자 인생을 좌우하지도 않는다. 그 밖의 리그와 해외 진출을 통한 보상체계가 훨씬 강하다. 이런 구조적 변화가 일으킨 파열음이 조광래 시절 손흥민 등 해외파 차출 논란, 최강희 시절 기성용 등 해외파 항명 소동이다.
2) 조직력이 와해됐다.
팔구십 년대 대표팀이 지금 대표 팀보다 선수 개개인 기량이 부족함에도 인상적인 파이팅을 보여준 건 동기 부여에 의한 '투지'도 있지만, 조직력 덕분이기도 했다. 선수단 전원이 국내 리그에서 뛰어 서로를 잘 알고 발맞춰 본 경험이 많았다. 이제 선수들은 해외 리그로 뿔뿔이 흩어졌다. 러시아에 가 있는 대표팀 스쿼드 23명 중 국내파는 11명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유럽파이거나 중국 리그, 일본 제이 리그에서 뛴다. 유럽은 그렇다 치고, 중국과 제이 리그는 케이 리그보다 수준이 높다고 하기 힘들다. 이런 측면에서, 자국 리그 약화가 대표팀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이 분명 있다. 어쩌면 현시점은 02년 월드컵으로 대변되는 하향식 시스템의 효용이 고갈된 순간일지도 모른다. 축협은 이 기로에서 아무런 수완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 상황은 국민의 성원이 부족해서 생긴 것만은 아니다. 케이 리그가 프로 야구 수준으로 성장한다 가정해도 작은 시장 한국에선 돈질에 한계가 있다(지금도 프로 야구와 케이 리그 평균 연봉은 별 차이 안 난다. 전자가 이억 좀 넘고 후자가 이억 정도다). 중국 리그가 자금 융단 폭격을 퍼부으며 케이 리그 자원을 빼내 간 순간부터, 지정학적으로 결정된 현실이다. 축협이 할 일은 "케이 리그에도 관심을 달라" 말하는 게 아니다. 국민에게 국가 대표팀을 응원할 애국심은 있어도, 자기 돈 쓰며 특정 종목 프로 리그에 관심을 가질 의무감은 없다. 그런 건 자연스레 계기가 마련되고 흥미 부여를 통해 이뤄지는 여가 행위지 ‘국민으로서의 죄의식’을 건드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주어진 조건을 타개할 구조적 방안을 모색하거나, 조건에 순응하며 대표팀 내부에서 지도력으로 조직력을 형성해야 한다. 그게 축협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다. 케이 리그 안 보는 국민 운운은 무능함을 자백하는 면피성 발언밖에 안 된다. 그동안 축협이 케이 리그를 딱히 지원이라도 했으면 모르겠다. 올 초엔 케이 리그 연맹 전 관계자들이 "축협이 스폰서를 독식하려고 케이 리그를 견제하고 지원을 안 해준다" 언론에 제보한 사건마저 있었다.
3) 대표팀 체계를 세울 감독 인선에 실패했다.
바로 이 점에서 축협은 최악의 행보를 걸었다. 하기 싫다는 최강희를 대표팀에 끌고 온 것도 그랬지만, 불과 브라질 월드컵 1년을 앞두고 홍명보를 감독으로 세운 것에서 단추가 어긋났다. 홍명보는 런던 올림픽 동메달 쾌거를 이뤘지만, 아직은 경험이 더 필요한 성장하는 지도자였다. 위험부담이 큰 시기에 선임하며 대표팀도 홍명보도 장래가 수틀렸다. 오죽하면 홍명보한테 상담받은 히딩크도 월드컵을 맡지 말라고 했을까. 그때 감독을 해보겠다 자청한 귀네슈 같은 검증된 감독에게 한시적으로 팀을 맡겼다면 단기적으로 장기적으로나 이득이었을 거다. 그런데 축협이 잘랐다. 영어가 안 된다는 석연찮은 이유를 대며. 그러고서 데려온 게 유럽 최하급 감독 슈틸리케다.
슈틸리케를 여지없이 자른 후엔 또다시 홍명보의 전철을 밟아 신태용을 불렀다. 히딩크 선임과 관련한 잡음에 어리석게 대처하며 그 불똥이 신태용한테 튀어버린 건 옵션이다. 이 분위기라면 신태용도 홍명보처럼 잘린다. 월드컵 끝나고. 성인 대표팀에 한한 문제가 아니다. U20 대표팀이 부진하자 그때도 U20 월드컵 육 개월 남긴 채 안익수 자르고 성인 대표팀 수석 코치하던 신태용을 투입했다. 이번엔 슈틸리케 자르고 또 신태용을 투입한 거고. 퀘이로스가 이란에서 7년 동안 근무하며 수비력을 짠 사례와 비교하면 지독히도 행정력이 무능하다. 퀘이로스 같은 해외파 감독을 데려오란 말이 아니다. 장기적 계획과 일관된 원칙의 부재를 지적하는 거다.
문제의 핵심은 감독도 국민도 아니라 축협이다. 불리한 상황에 팀을 맡은 젊은 감독이야 야속한 기분에 국민을 탓할 수도 있다. 세계 어디를 가도 국가 대표팀은 국민의 ‘가혹한 기대’를 받는다. 축협 부회장 김호곤 같은 양반까지 "평소엔 축구 안 보다가 월드컵 때만..." 운운하면 어쩌자는 걸까? 조목조목 설명했듯, 이건 경우에만 안 맞는 게 아니라 사실에 안 맞는 소리다.
국민? '냄비 근성' 펄펄 끓는다. 대표팀 성적에 일희일비하는 여론이 있으니 축협도 면피성 감독 인선을 즐겁게 지르는 거다. 그런데 격정적인 열광과 비난을 퍼붓는 국민 덕에 한국 축구가 이만큼 컸고, 축구 인사들이 스포츠 관료로 한 자리씩 해 먹는 거고, 협회 운영비도 횡령할 수 있었다.
케이 리그는 축협이 과소평가하듯 작은 리그가 아니다. 국가 제2의 프로리그는 결코 소외된 자리가 아니다. 말했듯이 케이 리그 평균 연봉은 프로 야구에 버금간다. 간단하게 생각해도, 나라를 대표하고 나라 이름으로 스폰서 따는 국가 대표팀을 국민이 비난하지 말라는 건 이상하다. 잘라 말해서, 대표팀의 인기 실추는 축협의 자업자득이다. 썩어빠진 자리 지키기 논리, 예산 횡령, 구조적 정세를 인식조차 못하는 무능함, 국민을 기망하는 인터뷰로 막 나가는 언론 플레이를 향한 불신.
국가를 대표하는 큰 이름의 영광으로 낙수 효과를 얻어 온 관행이, 스포츠 분야에서도 작동해왔지만 그만큼 현실을 왜곡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이 행간을 공유하고, 나머지는 관계자들이 바꿔야 한다. 현재 축구 대표팀 부진은 성인 대표팀을 넘어 각급 연령 대표팀, 여자 축구를 막론하는 현상이다. 모두 정몽규 집행부 취임 이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축구 협회 개혁 없이는 한국 축구의 추락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