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
김상조 공정거래 위원장이 “경제민주화 청원 좀 해달라. 정치 민주화만 국민 책임이 아니다. 경제 민주화도 국민 책임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팀 동료를 따돌린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을 제명하라는 국민 청원이 40만 명을 돌파했다. 인터넷 국민 청원은 현 정부가 만든 제도이자, 현 정부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그 깊숙한 곳엔 한국 사회의 고름이 고여있다.
국민 청원은 사회 각 부문 내에서 절차를 통해 해결되거나 한바탕 여론으로 달아올랐다 꺼질 가십거리를 국가의 중대사로 공식화해준다. 온갖 찌라시가 사회적 논란이 되는 초 인터넷 사회 한국에 맞춤형인 제도이자 그 해로움을 부채질한다. 논의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안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십만 명만 모으면 청와대가 응답한다는데 이런 행정력 낭비가 어디에 있을까. 이쯤 되면 국가가 운영하는 네이트 판 아닌가.
사회 문제를 전담하는 관청과 제도가 있고, 사회 의제를 검토하고 채택하는 언론과 국회, 시민사회가 있다. 박상훈 박사가 세월호 사태에 관한 명문에서 이야기했듯, 한국사회의 난치병은 국가와 개인을 매개하는 저 중간 단계가 진공상태란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의 진공상태가 이명박근혜 시절 정치적 프로세스를 우회하는 장외 정치, 거리의 정치가 일상화되고, 안철수 현상/문재인 팬덤처럼 영웅적 개인에게 내기를 거는 심리가 만연한 배경이다. 한국사회의 근본 과제는 정치의 투입 과정을 복원하고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국민 청원제도는 이런 장기적 과제를 완벽히 역행한다. 모든 정치적 단계를 삭제해버린 채 국민 개인을 곧장 대통령과 대면시킨다. 야당에 대한 증오와 언론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며, 대통령 개인에게 사회적 신뢰를 집중시키는 현 정부의 통치 노선을 상징하는 제도다. 이건 국정 운영의 헤게모니를 확보하기 위해 사회적 기반을 불태우는 화전민의 정치다.
여기에는 성군 판타지라 부를 만한 것이 들끓고 있다. 억울한 백성이 상경해 신문고를 두들기면 임금이 나타나 친히 사정을 듣고 탐관오리를 일망타진하는 조선시대 판타지. 이를 통해 강화되는 건 대통령이 친히 내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소통의 환상과 대통령 개인의 사회 장악력, 대통령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거추장스러운, 그러나 국가 운영을 위해 필수적인 사회 절차와 집단에 대한 불신이다. 이럴수록 행정부는 삼권분립 위에 서는 존재감을 얻고, 여론은 무책임하게 동원된다. 청와대는 수십만 여론을 등에 업은 채 입법부와 사법부를 압박하는 ‘지침’을 내리거나, 뾰족한 해결책 없이 듣기 좋은 말 몇 마디로 무언가 해결되었다는 이미지 마케팅을 한다. 정부는 인터넷 패권을 쥐고 있는 지지자들을 장기 말로 쓸 수 있고, 의제 청원에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다.
이건 너무나 편리한 정치 방식이다. 의제를 제기하는 역할은 인터넷 여론에 맡기고, 정부는 응답을 하면 되니까. 공정거래 위원장이 "경제민주화 국민청원 좀 해달라"라고 하는데, 어느 집 불구경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게 정부의 역할인데, 그걸 국민들에게 외주 하겠다? 그래서 책임은 누가 지게 될까. 설마 지금껏 경제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가 국민이 ‘참여’를 하지 않아서였나?
참여 민주주의니 허울 좋은 소리로 포장을 하지만, 국민 청원제도가 시행 이래 어떻게 활용됐는지 보라. 미성년자를 감방에 집어넣고 여자를 군대에 보내라는 남초 사이트에서나 나돌 헛소리에 민정수석이 응답을 했고, 갈등관계에 놓인 여론들이 경쟁적으로 청원을 넣고, 서명이 조작되고 있다는 의혹이 일었고, 운동선수 하나 자르자고 대통령에게 읍소를 하는 막장이 펼쳐졌다. 국민의 정치 참여는 기층에서부터 개개인의 이해관계를 조직하는 결사체들의 공존과 계층을 대의하는 정당 정치를 거쳐 이루어진다. 운동권 혐오와 의회 혐오, 언론 혐오 등 민주주의의 기본 단위를 부정하는 정치 혐오에 바탕을 둔 채, 지도자 1인이 거대 여론을 동원하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 정치다.
지금 당장은 그 지도자가 어질고 현명한 성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청원된 사안 중 합리적 안건도 있고, 청원으로 긍정적 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왕이 물러난 다음에는 어찌할 것인가? 이렇듯 정치의 진공상태가 영구화한 후에, 작동 중지된 정치의 프로세스가 돌이킬 수 없이 녹슬어 버린다면 그때는 어찌할 텐가? 아무리 울면서 신문고를 두들겨도 구원이 없는 세상을 ‘백성’들은 버텨낼 수 있을까. (2018/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