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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Nov 12. 2018

폭력에 대한 평정심

피시방 살인 사건에 관한 모 의사의 글.

지난달 한 응급실 의사가 속칭 ‘피시방 살인 사건’ 피해자가 입은 상해 상태를 낱낱이 묘사하는 글을 올려 파장이 일었다. 의료인의 직업윤리를 위반했다는 비판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 영웅 심리와 자의식 과잉을 꼬집는 비판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렇게만 정리된다면 한바탕 야유에 그치고 말 것 같다.


저널리즘적 명분을 내걸며 폭력 이미지를 전시하는 행태는 지난 몇 년 사이 관행이 되었다. 저 사건에 특이점이 있다면 전례와 달리, 사진도 영상도 아닌 글을 통해 재현된 이미지였다는 점이다.


언어는 묘사를 수행하는 데 열등한 매체다. 어떤 대상의 모습을 소개하는 데 사진은 한 장이면 족하다. 육안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방식과 동일한 시각적 포맷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사물과 풍경을 어느 한순간에 정지시켜 놓는다. 하지만 언어로 사진에 버금가는 정보 값을 전달하려면 대상의 윤곽은 물론 세부를 아울러 묘사하는 수백 자의 글자로도 부족하다. 그렇게 무수한 언어를 탕진한다 해도, 눈에 보이는 대로의 형상을 복사하기는 불가능하다. 언어가 재현하는 이미지는 시각 이미지가 아니라 독자가 언어를 매개로 형상을 연상하는 심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글 쓰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 실체를 전하겠다는 마음을 먹을수록 세부의 치밀한 묘사를 경유하는 수사법에 이끌리기 마련이고 그때마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때 정보 값의 증진과 함께 일어나는 건 묘사를 위해 세팅된 언어의 품사와 어감이 낳는 주관성, 심상 작용이 일으키는 감상적 호소력의 증폭이다. 또한 독자가 보지 못한 것을 글 솜씨로 법석을 떨며 보여주는 필자의 존재감이다.


더 비극적인 진실을 알려주자면, 아무리 참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해도 독자의 정신을 때려서 깨우는 충격파로 부족할 수도 있다. 만약 피해자의 환부가 글이 아니라 사진, 영상을 통해 공개되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큰 찬반양론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사실’로서 의료기록 자체로 여겨졌을 것이고, 자상을 입은 시신의 끔찍함에 직관적으로 언짢음을 느낀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끔찍함이 진귀한 볼거리로 소비될 위험성도 있다). 글은 시각을 심상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실재의 육중함을 음소거한다. 뜬 눈으론 견디기 힘든 것을 그 줄거리를 남긴 채 견딜 수 있는 것, 심지어 ‘즐길 수 있는 것’으로 가공해준다. 외설적 시각 이미지가 난무하는 시대에도, 소위 패드립과 고인 드립 같은 언어적 고어물들이 인터넷 하위문화에서 대중화되며 경쟁력을 갖춘 몇 안 되는 언어적 콘텐츠로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하다. 저 의사 선생의 공들인 묘사 또한 타인에게 닥친 비극을 목도하는 감각적 충격을 건너 뛴 채 사람들 자신의 분노를 불 지르는 땔감으로 쓰였을 수 있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보이지 않는 영화’에서 “폭력의 포르노그래피가 위험한 게 아니라 정상화된 폭력 이미지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전자는 소수 취향 공동체에서 게토화 될 뿐이지만, 후자는 분노에 인과관계를 부여해 극단적 해결책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폭력을 정상화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폭력을 유희와 취향으로 정당화하는 오늘날 시대정신에 비추면 양자의 경계는 불투명하다. 반대로, 정의로운 행동을 촉구하는 명분으로 폭력 이미지가 전시될 때도, 폭력의 현존을 직접 구경하며 분노를 절정에 이르게 해 배설하는 포르노그래피의 효과가 동반된다. 이 논리를 시인한다면 더 솔직하게 상황을 직시할 수 있다. 분노를 분출하기 위해 폭력 이미지가 필요하다면, 사람들은 폭력을 막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기 위해 폭력 이미지를 낳는 폭력 자체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이건 논리적 결론일 뿐이다. 이 현상을 추동하는 분노라는 상태의 뿌리가 반복해서 부조리가 덮쳐오는 현실이란 점은 헤아려야 한다. 그렇기에 폭력 이미지를 소비하는 행위를 향한 도덕적 비난보다 악순환을 끊어내는 해법이 필요하다. 폭력을 날 것으로 재현한 이미지가 소비되어 폭력 자체를 소비하는 행위와 구분되지 않고, 최대 출력으로 조장된 분노가 즉각적이고 극단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게 하며, 폭력의 연쇄를 멈추는 방안에 대한 사유는 뒷전이 되는 악순환이다.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악행이 들끓는 사회에 필요한 건 분노의 격류가 아니다.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만연한지 인정하고 그것에 대처할 방안에 주의를 몰두하는 평정심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짓을 진짜 범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경악을 토하는 글이 문제를 근치 하는 "불씨 선"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순진한 정의감이다.  이런 방식의 분노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조건반사적으로 규탄하며 현실을 향한 능동적 사유를 포기하는 방관자의 분노일 뿐이다


한 개인을 넘어 한 사회가 타인의 고통 앞에 평정심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그것은 타자와 폭력의 세부에 밀착하는 클로즈업의 욕망이 아니라 현실을 침착하게 관조는 거리감을 넓혀주는 시스템이다. 이를 만드는 것이 세상의 폭력을 보도하고 재현하는 깜냥과 지위를 지닌 사람들이 걸머져야 하는 소명이다. 사진은 사진의 방식으로, 영화는 영화의 방식으로, 글쓰기는 글쓰기의 방식으로, 저마다 재현의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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