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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Dec 24. 2015

표현의 자유, 예술의 자유, 혐오 표현

Mnet <쇼미더머니4> 여성혐오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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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는 내심의 자유가 아니라 내심을 말과 행동으로 꺼내 세상에 소리치는 자유를 말한다. 어떤 사람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생각을 알아내기 위해 심문을 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사상검증, 십자가 밟기다. 같은 이유로 세상에 발표하지 않은 습작, 개인적 창작이라면 윤리와 사상을 문제 삼을 수 없다.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는 개인과 세상과의 관계, 개인과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세상의 비윤리에 편승하고 그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상황은 개인의 양심과 성찰에 맡길 일이다. 오늘날 예술의 혐오 표현을 금지하자고 할 때 ‘창작’이 아니라 ‘발표’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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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현의 자유를 주창하고 정당화하는 이론을 세운 선구자는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이다. 밀은 저 유명한 『자유론』에서 표현의 자유가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행복한 삶의 토대이기에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웅변하지만, 한편으론 세상 사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필요하며 아무리 소수의견이라도 침묵을 강요해선 안 된다고 논변한다. 첫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설령 그 의견이 틀렸다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다수 통설이 전적으로 옳다 해도 반대의견으로 검증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편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다수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과 경험에 의한 진심 어린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밀은 표현의 자유가 공공복리에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윤리성에 관계없이 접근 가능한 예술 범위를 활짝 열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직접 타당함을 판단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밀의 주장에는 두 가지 큰 전제가 있다. 하나, 밀이 말한 표현의 자유는 ‘개인에 대한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표현의 자유’다. 다시 말해, 밀은 국가 권력이 검열할 대상을 가려내고 목소리를 틀어막는 걸 반대한 것이지, 여론을 통해 비판할 자유까지 막자고 한 것이 아니다. 밀은 더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했으니, 오히려 그런 상호 비판에는 적극 찬성할 것이다. 밀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옹호에는 조건이 앞서는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자유는 무조건 옹호해야 한다”이다. 혐오 표현은,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소수자에게 정신적, 사회적 폭력으로 행사되고, 그들에 대한 편견을 부추겨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혐오 표현은 ‘표현의 자유’란 가치와 관계없이 얼마든지 가혹한 비판을 받을 수 있고, ‘표현의 자유의 예외’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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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혐오 표현을 규제할 것이냐다. 예술을 넘어 일반론에 입각해 말하자면, 제시된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럽식 노선이고, 하나는 미국식 노선이다.


 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혐오 표현을 ‘혐오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한다. 트위터에서 인종차별 험담을 한 영국 대학생이 체포당했다는 일화는 이런 맥락이다. 이렇듯 엄격하게 대응하는 것은 유럽 전역에는 수많은 이민자가 유입해있고 그들에 대한 적대 정서가 팽팽하기 때문이다. 아차, 하는 순간 언어적 폭력이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더불어 불과 백 년 전 벌어진 ‘유대인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사상 유례없는 비극 때문이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많은 나라에서 공개적으로 나치를 긍정하거나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면 법의 철퇴를 피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에 관한 미국의 모토는 올리버 웬들 홈스 대법관이 주창한 ‘사상의 자유시장’이다. 자유 시장경쟁을 거쳐 생산성 낮은 기업이 퇴출당하듯, 사상과 표현의 자유로운 경쟁으로 나쁘고 거짓된 사상과 표현을 도태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혐오 표현 및 차별행위를 처벌하지 않고 국가 기구가 차별 시정을 요구하거나 민사소송으로 돌린다. 다른 인종과 동성애자를 겨눈 혐오 표현을 회사와 학교 등 사적 기구가 스스로 제정한 표현 강령Speech Code으로 다스리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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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의 권능 중 하나가 비윤리적인 것과 대면하는 경험이라 여긴다. 법과 도덕의 억압을 피해 비윤리를 간접 체험하는 공식적 해방구가 예술이고 문화고 오락이다. 선한 것만큼 악한 것도 인간의 본성이다. 비윤리를 재현한 예술과 조우하며 우리는 해방감을 느낀다. 분명 예술이 현실 자체는 아니니까. 에미넴의 ‘The Marshall Mathers LP’를 듣고 살인을 결심할 사람은 지극히 드물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힙합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 게다. 예술을 통한 비윤리의 체험엔 또 다른 장점이 있는 데, 과연 비윤리적인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인식하고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인간의 복잡한 실존을 풍부하고 냉정하게 직시하여 영감과 통찰을 얻거나 비윤리를 더 잘 제어할 수 있다. 윤리의식은 예술을 통해 확립된다기보다,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형성된다. 윤리의식이 충분히 고취된 사람이라면 비윤리적 예술작품을 보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윤리가 무너지는 책임을 예술의 탓으로 떠넘기는 것도 부당하다.


 그런데 예술의 윤리적 일탈에 무제한의 자유를 허락한다면 정당할까? 누구라도 대뜸 그렇다고 답하기 석연찮을 것이다. 예술은 상상력이기에 폭넓은 자유를 주어야 하지만, 때론 상상력의 힘은 무엇보다 강하다. 예술은 딱딱한 지식과 뉴스가 아니기에 전파력과 정서적 파급력도 막강하다. 만약 예술의 상상력을 현실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소함’으로 치부한다면, 음악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믿음도 철회해야 일관성이 있다.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문화의 이데올로기성에 관해선 단적으로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아프리카 식민지 원주민들에게 서구 상업영화를 틀어줬더니, 바다를 항해하다 흑인 노예를 배 밖으로 집어 던지며 좌초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에서 일제히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했다고 한다. 아슬아슬한 영화의 문법에 빠져 자신들의 처지를 몰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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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미더머니>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시청자에게 열린 대중적 음악 예능이다. 송민호의 “산부인과” 드립이 그때 그 시간에 튀어나올 걸 알고 방송을 본 사람은 없다. 방송을 보지 않았더라도, 논란이 된 이상 뉴스와 인터넷을 통해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여성이라면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사회 구성원의 문화윤리 의식을 높이려 노력하는 한편 예술에도 윤리적 기준이 필요하다. 윤리적 기준을 설정하고 합의를 모색하는 과정 자체가 의식 수준을 높이는 과정의 일환이다. 무엇보다, 예술의 혐오 표현을 규제할 이유는 소수자들을 때리는 폭력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비소수자들 의식 수준과 무관하다.


 예술을 예술로만 볼 만큼 예술관과 윤리의식이 성숙하지 않은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가령, 충분히 사회화되지 않은 10대들이라면 어떨까. 여성 혐오 사상에 찌들어 있거나 여성 혐오가 왜 나쁜지, 저 가사가 왜 여성 혐오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들의 나쁜 확신을 강화하고 혐오에 대한 감수성을 마취할 수 있다. 세계 인구는 수십억이다. 그 모든 사람의 의식 수준이 모범적으로 고취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보다 훨씬 적은 숫자로 발표되는 예술 콘텐츠를 윤리적 기준으로 가늠하는 게 현실적이다. 우리보다 문화인식 수준이 높을 법한 유럽, 힙합 문화가 훨씬 광범위한 미국에서도 예술의 혐오 표현이 논란이 된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윤리 의식 높고 예술을 예술로만 보는 마니아들이 소비하는 언더 예술이란 이상적 상황을 가정할 수도 있겠다만, 이런 경우가 현실에 존재할지 의문이다. 이번 송민호 사태에 대해 소위 ‘힙합 마니아’의 성지라는 힙합 커뮤니티에서도 “여성 혐오라고 한들 뭐가 문제냐”, “송민호 가사가 왜 여성 혐오냐”라는 여론이 대세였던 걸 환기하면 그렇다. 힙합 커뮤니티에서 <쇼미더머니> 같은 힙합 대중화에 찬성하는 여론이 다수였던 걸 생각하면 더욱 아이러니하다. 힙합이 메인스트림으로 진출한 이상, 사회의 보편 양식에 걸맞도록 자신을 성찰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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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성과 동성애자, 다른 인종, 전라도 사람 등 사회적 소수자를 노리는 혐오 표현만큼은 영역을 막론하고 퇴출해야 한다는 강력한 확신을 품고 있다. 다만 국가의 가위질이 아닌 여론의 견제와 플레이어들의 성찰에 의한 해결을 지지한다. 그 또한 예술의 자율성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에 비해 한국은 혐오 표현에 대한 고민의 역사가 짧다. 최근 몇 년간 넷우익 일베가 대두하고 여성 혐오, 호남 혐오가 인터넷에서 들끓으면서 논의의 물살이 급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힙합의 여성 혐오’가 질타를 당하는 것도 그런 흐름이 일으킨 파장일 것이다. 혐오 표현이 나쁘다는 대원칙에 합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왜 나쁜지 가슴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술은, 예술이라서 용서받을 때도 있지만, 예술이라서 용서하기 힘들 때도 있다. 힙합 커뮤니티 안에서부터 이런 논의가 더 늘어야 한다. (201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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