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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Dec 16. 2019

장르를 착취하는 변명

블랙넛 모욕죄 유죄 판결

지난 12월 12일 대법원은 래퍼 블랙넛에게 징역 6개월, 집행 유예 2년, 사회봉사 명령 160 시간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노래 ‘Indigo Child’ ‘Too Real’ ‘100’과 한 차례의 인스타 그램 게시물, 네 차례의 공연을 통해 여성 래퍼 키디비를 성적으로 모욕한 혐의에 대한 판결이다. 판결에서 몇 가지 쟁점을 뽑아 검토해 보자.


우선 표현의 자유와 반비례 관계에 있는 모욕죄 판결이라는 점, 음악 창작물과 무대에서의 공연 행위를 대상으로 한 판결이란 점에서 예술과 표현의 자유라는 일반론을 짚어볼 수 있다.


사안은 모욕죄로 다루어졌지만 단순한 모욕이 아니다. 여성 래퍼, 나아가 그의 여성성을 향해 성적 모욕을 가했다고 판시된 사건이다. 키디비의 변호인 역시 처음에는 통신매체 이용 음란죄를 주된 범죄로 고소하려 했다고 한다. 재판부는 “가사 자체가 저속하고 피해자를 성적 욕구 해소의 대상으로 삼아 성적으로 비하하는 표현”을 썼다며 거기 담긴 성적 폭력성을 명확히 지적했다. 이 사안은 단순한 인신공격을 처벌한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게 가한 성적 폭력이라는 더 큰 테마, 일종의 혐오 표현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런 사안은 모욕죄 등이 억압할 수 있는 공적 비판의 자유와 무관하며 개인의 삶에 구체적 피해를 줄 수 있다. 게다가 혐오 표현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입지를 위축시키고 낙인 효과를 가하며 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발언에 참여하는 표현의 자유를 도리어 저해한다.


이것이 예술의 형식, 힙합의 관습으로 뱉어진 것이라 해도 다를 건 없다. 블랙넛 측은 “피해자를 (‘키디비’로) 특정하지 않았고, 성적 매력을 표현한 것일 뿐 성적 욕구 해소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알 수 없는 논리로 상고한 것은 물론, 힙합에는 타인을 공격하는 디스 문화가 있으며 예술적 특성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랙넛은 키디비에게 디스전을 건 것이 아니다. 그를 자신과 경쟁하는 한 명의 음악가가 아니라 장르의 클리셰에 따라 모욕하며 '곤조'를 뽐낼 수 있는 소품으로 취급했을 따름이다. 표현의 자유가 구가되는 대 원칙은, 나쁜 표현이라도 법적으로 처벌하지 말고 대항 표현으로 맞서 도태시키자는 것이다. 디스전 역시 문화적 스포츠로 용인받을 수 있다면, 참전자들이 응전을 주고받을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는 랩 배틀 같은 형식일 것 같다. 하지만 힙합은 지극한 남성 중심적 문화로서 블랙넛이 뱉은 것과 같은 성적 대상화가 만성이 돼 여성 래퍼를 이미 열등한 존재로 주변화하고 있다. 특히 한국 힙합 신은 미국에 비해 여성 래퍼 수도 적고 그들을 플레이어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미약하다. 키디비가 블랙넛에 대항해 디스 랩을 선뜻 감행하거나 그렇게 했을 때 선입관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표현 자원이 분배돼 있지 않다. 힙합의 문화적 논리를 최대한 인정한다고 쳐도 표현의 자유로 존중 받을 만한 디스 랩은 아니다. 


블랙넛 측의 변론은 지난 몇 년 간 래퍼들의 혐오 가사가 비판받을 때마다 힙합 신에서 주장되던 “힙합은 원래 그런 문화다” “장르의 특수성을 존중하라”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반면 키디비의 변호인은 언론 인터뷰에서 “힙합 문화는 저항 정신을 내포하는 좋은 문화다” “이런 범죄 행위를 힙합이라고 주장한다면 힙합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했다. 두 주장은 힙합에 관한 인식, 힙합에 내재한 혐오적 관습에 대한 양 극단의 시각으로 평행하다. 미국에서 태동한 힙합이란 장르 음악은 소수자 혐오가 관습의 일부로 축적돼 있는 음악이다. “힙합은 원래 이렇다”와 “그런 건 힙합이 아니다”는 평행선 사이에서 상기해야 할 건, 힙합이 무엇이건 간에 인권에 기반을 둔 합리적 사회 규범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힙합을 예술이라고 바꿔 말해도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순 없다.


중앙일보에선 ‘"블랙넛 노래는 힙합 아니다" 대법, 키디비 디스에 유죄 확정’이란 기사가 나왔다. 부정확할뿐더러 부적절한 헤드라인이다. 해당 기사는 물론 대법원 측에서 판결을 요약해 배포한 보도 자료를 보면 어디에도 힙합이 맞다 아니다는 식의 문장이 없다. “피해자에 대한 모욕적 표현들이 (...) 힙합의 형식을 빌렸을 뿐 성적 희롱에 불과”하다는 판결 취지를 저런 식으로 해석한 것 같은데, 저 문장을 블랙넛 노래의 장르적 성격에 대한 규정처럼 전달한다면 곡해일 것 같다. 대법원이 어떤 창작물이 예술의 자유라는 가치를 위해 처벌을 면책받을 수 있는지 법리를 판단할 수는 있겠으나,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힙합인지 규정할 자격은 없고 그럴 만한 전문성도 없다. 그런 건 사회문화적 논의를 통해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저 헤드라인은 “힙합은 그런 게 아니다”는 피상적 관념 위에 있고 그런 관념으로 인한 오해를 부추길 수 있다. 같은 기사에는 이번 판결이 “과도한 성적 비하와 조롱이 난무하는 한국 힙합계에 경종을 울”렸다는 논평 역시 인용됐는데, 장르 신 구성원들의 자성이 판결을 통해 담보되는 것도 아니다.


모욕죄는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특정된 사안에 한해 처벌이 내려진다. 하지만 혐오 가사, 혐오 표현은 반드시 실존하는 인물을 특정하지는 않는다. 여성성이라는 추상적 대상, 사회적 소수자의 정체성을 향해 경멸이 가해지고, 그런 발화가 제지받지 않고 누적될 때, 비록 대상은 특정되지 않았더라도 해당 정체성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사회적 편견으로 돌아갈 수 있다. 가령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많은 힙합 가사는 실존 인물이 특정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문제는 장르 신 내부에서 이런 관행들에 자정작용도 문제의식도 없다는 사실이다. 유수의 래퍼들은 혐오 가사를 향한 비판을 ‘예술에 대한 검열’이자 장르 문화에 대한 간섭이라 주장하며 무시해 왔고, 블랙넛이 소속된 레이블 저스트뮤직 래퍼들은 어느 힙합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블랙넛이 쓰는 가사를 두둔한 적도 있다. 이런 분위기가 밑천이 되어 급기야 실존 인물을 성적으로 괴롭히는 가사 조차 힙합의 예술적 특성 운운으로 자기 정당화되기에 이르렀을 것 같다. 잘라 말해서, 자신들의 발화 욕망과 아집, 안위를 위해 예술과 힙합을 착취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쇼미더머니 시대와 함께 한국 힙합은 장르사에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힙합의 음원 파워는 떨어졌고 화제성은 소진되었다. <쇼미더머니> 시즌 7,8 그리고 올해 MBC에서 론칭한 힙합 서바이벌 방송 <킬빌>은 모조리 흥행에 실패했다. 이런 침체의 배경에는 많은 래퍼들이 폭력적 가사와 안하무인의 태도로 끊임없이 소음을 일으켜 사람들의 염증을 유발하고 장르의 사회적 평판을 스스로 떨어트린 점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은 해외에서 건너온 특수한 장르적 관습을 합리적 보편성에 비춰 성찰하지 않았다. 한국 힙합은 그 특수성을 강변하는 이들의 자부심(‘힙부심’)에 갇힌 문화적 게토, '그들 만의 리그'가 된 것이다. 힙합이 잘 되고 있을 때는 치기 어린 말과 행동이 좋든 나쁘든 이슈를 부르고 관심과 주목으로 환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장르의 확장성과 생명력을 좀 먹었다면? “이게 힙합이니까”라는 말은 편리하고 든든했겠지만, 그 힙합이 예전 같지 않다면 이제 어떻게 할 텐가? 블랙넛은 당신들의 천국을 대속하는 순교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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