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산업의 세대론과 저출산 고령화
세대론은 한국 사회 공론장의 오래된 키워드다. 젊은 세대가 겪는 사회경제적 빈곤,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의 계층 관계, 부동산 소유권과 사회적 헤게모니의 세대 간 불평등 등이 이 개념과 함께 말해져 왔다(개중에는 사회과학적 엄밀함이 비판당한 주장 역시 있다). 한국 사회는 저출산 고령화 현상 역시 깊어지고 있어 앞으로도 어떤 의미에서든 세대라는 개념이 공론장을 떠나지는 않을 것 같다. 세대론으로 사회 비평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보다 좀 덜 딱딱한 글을 쓰려는 게 목적이다. 현재 케이팝 산업은 특정한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는데, 세대라는 프레임을 가져와 유비하면 그 방향성이 보인다.
먼저 아이돌 산업엔 고령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두 가지 맥락에서 그런데, 아이돌 그룹의 활동 연령이 상향되고 있는 사실, 아이돌 팬덤의 연령 역시 상향되고 있는 사실이다.
흔히 아이돌 1세대로 분류되는 그룹들, 90년대 후반에 데뷔한 H.O.T와 젝스키스, 핑클과 S.E.S, 베이비복스 등은 수명이 길지 않았다. 00년대 초중반에 활동을 중단했고 멤버들은 개인 활동으로 갈라졌다. 당시에는 그것이 짧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당시 데뷔한 아이돌은 10대들을 위한 또래의 우상으로 기획되었다. 팬이나 아이돌이나 20대 초중반을 넘어서면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아이돌 멤버들은 아이돌의 범주를 벗어나 활동 영역을 마련했다.
00년대 중반은 미디엄 템포 발라드가 가요 시장을 차지하는 등 아이돌 시장이 위축된 시기였다. 00년대 중후반을 거치며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를 필두로 다시금 아이돌의 시대가 왔다. (이후 아이돌 그룹이 쏟아지며 가요계 획일화라는 비판을 불렀지만) 이 시기 아이돌은 특정 세대의 우상을 넘어 어떤 대안적 장르나 문화로서 돌아온 느낌이 있었다. 아이돌 문화를 경험해 본 세대가 축적되었고, 걸그룹의 경우 삼촌팬 같은 용어가 유행할 만큼 청장년 세대를 포섭하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여성 팬의 경우 아이돌에 대한 애착 감정이 남다른 코어 팬덤 속성이 강해, 보이그룹이 활동을 오래 지속하는 경향이 생기며 역시 팬 활동을 지속해 갔다. 가령, 00년대 중반 데뷔한 동방신기와 카시오페아가 그렇다.
동방신기와 빅뱅은 데뷔한 지 15년가량 지났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그룹이다. 2010년대 초반에 데뷔한 엑소와 방탄소년단 역시 데뷔 10년 차를 향해 가면서도 최고의 인기 그룹으로 집권하고 있으며, 방탄 소년단은 월드 와이드 한 활동을 통해 여전히 전성기를 개척하는 중이다. 그 밖의 중견 보이 그룹들 역시 미디어 노출은 활발하지 않더라도 투어 중심의 활동을 이어 가는 케이스가 있다. 여기 더해, 1세대 아이돌이 현역으로 귀환했다. 신화는 꾸준한 앨범 발표와 공연을 통해 활동 중단과 해산 없는 지속적 활동 모델을 선보였고, H.O.T와 젝스키스는 90년대 복고 열풍을 타고 미디어와의 콜라보를 통해 재결합을 완수했다. 이 모두가 아이돌 활동의 초장기화, 활동 정년의 상향으로 통한다.
이 현상의 저변에는 팬덤 시장의 재구성이 있다. 아이돌 문화는 10년대 중반을 거쳐 코어 팬덤 중심성이 더 강화됐고, 팬 활동은 특정 연령대의 유행을 넘어 삶의 일부로 정착했다. 혼인 연령 상승과 비혼 가구 증가의 사회적 경향으로 개개인이 취미 활동에 소득을 투자할 여지가 늘었으며, ‘유사 연애 감정’이 투사된 팬덤 문화에 몰입할 소지가 커졌다. 사회 평균 수명이 늘어나며 중장년 세대가 문화 소비의 젊은 주체, ‘영 포티’로 호명돼 세대 개념이 재 구획된 것 역시 팬덤 연령대 확장과 맞물렸다. 10년대 중후반에 방영된 엠넷 아이돌 오디션 방송 <프로듀스> 시리즈는 방송의 화제성과 경연 과정에 대한 감정 몰입 추동을 통해 이십 대에서 사십 대에 이르는 남녀 시청자를 아이돌 시장에 유입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프로듀스 그룹들의 팬 연령층에 관한 통계를 통해 확인 가능한 부분이다.
이상의 상황은 아이돌 문화에 그어진 분계선으로 표현된다. 아이돌 문화가 코어 팬덤 문화가 되면서 그 밖의 다중에 대해 문화적 분계선이 그어진 상태이며, 중견 그룹과 신인 그룹을 상하로 나누는 천장이 세워져 있다. 시장이 코어 팬덤화 되기 이전에 데뷔해 히트곡을 내고 대중성을 얻은 소수의 그룹이 기득권을 가지고 있고, 이후에 데뷔한 그룹은 확장성을 얻는 데 한계를 겪는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대형 그룹이 탄생하기 힘든 상태인 것이다. 엑소와 방탄 소년단이 압도적인 팬덤과 인지도를 가진 채 장기 집권하고 있고 그 밖의 보이 그룹과 격차가 크다(그들의 인기가 단지 먼저 데뷔한 기득권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며 그룹 자체의 경쟁력이 크기도 할 것이다). 걸그룹 역시 레드 벨벳과 트와이스, 블랙핑크 이후에는 대중성을 갖춘 그룹을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꾸준히 대형 보이 그룹을 히트시켜 온 ‘3대 기획사’ 조차, 10년대 중반 이후엔 새로운 보이 그룹을 성공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데뷔한 보이 그룹 중엔 세븐틴이 큰 팬덤을 모으며 높은 앨범 판매를 기록하고 있지만, 대중적 인지도와 음원 성적은 상대적 약세다. 이런 판도에 균열을 낸 것이 중장년 세대로 파이를 확장한 <프로듀스> 그룹이었지만 시즌을 거듭할수록 팬덤 대비 대중성은 약화되는 추세였다.
이를테면 특정 시기에 앞서 데뷔한 대형 그룹들이 팬덤과 상징 자본 같은 아이돌 시장의 한정된 '부동산'을 확보한 상태고, 팬덤과 함께 나이를 먹으며 은퇴 없는 현역 생활로 가는 중이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와 세대적 계층 구조가 아이돌 신 내부에서 재현되고 있다고 할까? 엑소와 방탄소년단이 군 입대라는 미션을 돌파한 후에는, 이미 롤 모델을 선보인 H.O.T와 젝스키스, 신화처럼 멤버들 나이가 마흔이 될 때까지 활동하는 시나리오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은 이미 아이돌 시장이 저렇게 흘러간 상태다. 올해 활동을 휴지 할 것을 선언한 보이 그룹 아라시는 데뷔 20주년을 채운 인기 그룹이며, 걸그룹 AKB48은 팬 연령층이 60대에 이를 만큼 팬덤이 고령화됐다. 일본의 최고의 걸그룹으로 통하는 노기자카 46 역시 중장년에 걸친 폭넓은 세대의 남성 팬덤을 확보하고 있다.
다만, 케이팝의 고령화 현상이 모두에게 균등하게 이행되고 있진 않다. 보이 그룹의 정년은 계속해서 상향되는 추세고 걸그룹 역시 그런 경향을 함께하고 있지만 보이그룹에 미치지는 못한다. 동방신기와 빅뱅이 활동을 이어가는 동안, 그보다 늦게 데뷔한 원더걸스는 해체했고 소녀시대는 뜸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 사이 인기를 얻은 많은 걸그룹이 해산하거나 활동을 중단한 것도 물론이다. 또한 ‘왕년의 보이그룹’들이 재결성을 통해 장생하는 동안, S.E.S와 핑클의 활동 재개는 일회성 프로젝트에 머물렀다. 한 가지 개념 틀로 사회를 설명할 수 없듯이, 케이팝 산업 역시 세대와 젠더라는 개념을 교차시켜 관찰할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