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복고 열풍
어쩌면, 과거는 이데올로기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는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라는 같은 시간 속에 살듯 과거 또한 같은 시공 속에 존재했지만, 그 시간은 서로에게 다르게 기억된다. 누군가에겐 기억의 서랍을 더듬는 것조차 버거운 시간이 누군가에겐 종종 들춰보는 사진첩처럼 가까운 책장 한구석 비치돼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기억들이 나의 과거, 혹은 너의 과거가 아닌, ‘우리’의 과거로 소환되어야 할 때 선택과 회피가 일어난다. 과거는 너와 내가 공공연히 안줏거리 삼을 수 있는 좋은 시절, 그 편린들의 교집합, ‘추억’으로 각색된다.
올 한해 회자된 너와 나의 ‘좋은 시절’, 그 추억의 과거는 90년대였다. 3월에는 영화 <건축학 개론>이, 8월에는 드라마 <신사의 품격>이, 7월부터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 바통을 이어받아 앞다투어 90년대로 돌아갔다. 왜 하필 90년대일까. 바로 90년대가 미점유 지대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아직은 우리에게 가까운 기억이지만, 한편으론 유년기의 앨범처럼 멀어진 시간이란 것. 70․80년대에 이어 소비되지 않은 새로운 복고로 소환될 의미를 부여받았단 말이다. 더 중요한 건 아직 가능성이 남아있는 문화소비의 수요란 측면이다.
대중문화의 주요 고객은 10대부터 30대다. 최신 대중문화가 젊은 감성과 조응하며 구성되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거기서 낙오해 복고적 기획을 소비하거나 문화적 여가와 멀어진다. 40대를 기점으로 문화소비 수요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리고 20대의 시작과 끝을 90년대와 함께한 70년대생들은 30대의 반환점을 지나 40대의 문고리를 파지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 40대들과 차별화되는 40대다. 90년대와 2010년대의 문화적 근친성 때문이다. 90년대는 대중문화가 만개한 시절이다. 트로트와 포크, 올드한 록의 시대를 마감하고 015B, 토이, 전람회, 이승환의 모던한 발라드가 등장했다. 그리고 듀스, 서태지와 아이들로 대표되는 댄스와 힙합이 유입되고 보급됐다. 90년대 중후반엔 아이돌 그룹 계보의 조상 H.O.T, 핑클 같은 보이그룹, 걸그룹이 데뷔했다. 한편으론 문민정부 집권에 따라 문화 개방과 자율화가 물살을 타고 터졌다. 여기에 발맞춰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장르와 소재, 표현의 다양성이 급격히 확충됐다.
이것은 바꿔 말해 문화적 리터러시literacy의 문제다. 90년대에 10대와 20대를 보낸 70·80년대생들은 현행 대중문화 감수성을 공유하는 마지막 세대다. 예전의 40대들과 달리 최신 대중문화에 높은 적응력을 갖췄다. 90년대에 이뤄진 폭발적 IT기술 발전과 보급은 이들을 문화 콘텐츠 소비를 위한 테크놀로지 사용 능력의 세대적 보루로 만들었다. 현재 10대와 40대 사이엔 디지털/문화적 디바이드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즉, 90년대를 재생하는 일련의 흐름은 내가 한 차례 언급 했듯(「<신사의 품격> 40대라는 호명」, 『오마이뉴스』, 2012. 07. 13) 대중문화 향유의 변곡점을 통과하는 과거의 주인공들을 소비시장에 묶어두려는 시도다. 대중문화의 만개를 각인한 최초의 세대, 충분한 구매력과 접근능력을 소지하고 있지만 문화소비와 멀어지는 구간에 들어선 세대를 붙잡고 공략하는 것이다. 90년대의 콘텐츠는 무궁무진하다. 하나씩 소환해서 전시하며 향수를 자극하면 된다. 현행 대중문화에 대한 이들의 높은 적응력은 곧 대중문화 소비 수요로서의 높은 잠재력이다. 여기엔 또 다른 내막이 있다. 이제 대중문화 산업은 90년대와 2000년대에 그런 것처럼 10·20대하고만 동행할 수 없다. 70·80년대생 인구수가 이후에 출생한 인구수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따돌리고는 산업 파이를 유지할 수 없다.
다른 의미에서 90년대는 정육면체의 모서리가 만나는 꼭짓점, 공통분모다. 70년대생들은 90년대를 열며 20대를 개척했고 90년대를 닫으며 젊은 시절을 떠나보냈다. 80년대 초·중반생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룰라, H.O.T, 젝스키스의 데뷔를 지켜보며 사춘기를 가로질렀다. 20대의 정수리에 올라탄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생들에게도 90년대는 낯설지 않은 복고다. 90년대 스타들이 매스미디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90년대와 2010년대의 문화적 근친성이 기시감을 선사한다.
호황의 마지막, 불황의 전사前事. 대중문화가 울창하게 잉태된 90년대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좋은 시절’이다. <건축학 개론>과 <신사의 품격>이 90년대 대중문화 소비주체의 현재적 재구성을 도모했다면, <응답하라 1997>은 세대적 공통분모로서 90년대 후반의 시대성, 현재까지 전승되는 아이돌 문화의 태동을 가리킨 케이스다.
90년대를 재생한 세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기억의 선택과 회피다. 이 작품들은 공모라도 한 듯 90년대를 말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IMF란 거대한 사건에 관해 침묵한다. <건축학 개론>은 015B ‘신인류의 사랑’이 유행하던 90년대 초반 대학가를 축으로 현재와 과거를 왕복했다. <신사의 품격> 또한 IMF를 삭제한 90년대의 단편들을 지하철 노점상처럼 추억 팔이했다. <응답하라 1997>은 시기적으로 IMF를 경유했지만, 아늑한 추억만을 취사선택한 채 그 시절 황폐함에는 관심이 없었다. 특히 <신사의 품격>은 황진미 평론가의 지적처럼, 90년대란 과거를 빌미로 사회경제적으로 불균질하고 양극화된 집단 40대를 동일한 라이프스타일의 세대로 치환하는 판타지를 선보였다. 이 작품이 호명하는 40대 혹은 불혹이란, 현재를 사는 세대가 아닌 ‘문화소비 주체’로서의 허구적 호명인 셈이다.
과거는 그렇게 필요에 의해 요청되고 소환된다. <건축학 개론>에서 서연은 결혼을 앞둔 승민을 그야말로 느닷없이 찾아간다. 서사의 끝에서 두 사람은 다르게 기억되던 과거의 상동성을, 서로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음을 끌어안듯 확인한다. 자신의 과거로 타인의 현재를 침범하면서 당당한 이유는 그것이 ‘나의’ 과거도 ‘너의’ 과거도 아닌 ‘우리’의 과거란 것이다. 그런데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아닌 무엇을 과연 우리의 것이라 부를 수 있을까. 과거는 항상 아련한 모습으로 회고되고 귀환한다. 나눌 수 없는 상처는 소거되고, 나눌 수 있는 노스텔지어가 선별된다. 모두가 엄연히 아는 사실이 있다. 우리 아버지의 IMF와 이건희의 IMF는 동일한 삶의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 문화산업은 내밀한 상처는 회피한 채 같은 기억의 단편들로 ‘응답’을 요구하지만, 당신의 90년대와 나의 90년대는 마주 보지 않는다. 과거는, 혹은 지나간 추억은 이데올로기다. (2012/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