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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Apr 20. 2020

거리두기와 민주주의

한국에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잘 이뤄지는 까닭?


BBC 한국 특파원이 한국에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준수되는 이유에 관해 말했었다. 유교의 유산이라는 건 오해이며 대통령을 끌어내릴 정도로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라는 말이다. 이건 현지의 사회문화적 실정을 읽지 못하는 외부인의 피상적 단순화다.


한국의 민주화는 운동을 통한 민주화였다. 서구처럼 기층에서부터 계층 별로 투쟁을 하거나 정치적 협상을 통해 참정권이 확대된 것이 아니라, 이미 보편적 투표권이 주어진 상태에서 독재 정부를 몰아내기 위해 벌인 국민적 항쟁이다. 서구의 민주화가 각 계층의 참정권 확보를 통해 사적 이해관계를 확장하는 과정과 연동돼 있었다면, 한국의 민주화는 삶의 이해관계와 분리된 공적 대의를 위한 투쟁이었다. 그것은 곧 국가를 정상화하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개인이 공적 대의에 종속되는 과정이었다.


국민의 삶이 물질적으로 향상된 경험은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 권위주의 체제가 가져다주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가 존재한 이유다. 민주화 항쟁은 독재 정권과의 ‘큰 싸움’을 위해 대열을 깃발 아래 집결시키며, 민주화 진영 내부에 또 다른 권위주의, 집단주의의 습속을 남겼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밟았지만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했고, 민주주의가 일상적 생활 문화에 정착하지 않았으며, 국가의 존재가 개인을 압도하는 것, 민주주의 제도와 권위주의/집단주의/강한 국가주의의 요소가 공존하는 것이 한국적 민주주의의 특수성이다. 그렇기에 민주화 이후 몇 차례 대규모 촛불 시위가 일어났지만, 체제 내부를 흔드는 역동성이 체제를 정상화하는 보수성으로 귀결되어 왔다. 


코로나 방역에도 이상의 특수성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비교적 잘 이뤄지는 건 집단주의와 권위주의의 습속 때문이다. 국민들은 산업화 시대에 국익을 위해 국가의 명령에 순응하며 하나로 결집한 경험이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당위를 지금도 공유한다. 집단의 존재가 개인의 존재에 우선하므로, 개인이 어떤 준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다른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집단이 흔들릴 수 있는 문제에 민감도가 높다. 자가 격리를 위반한 사람들을 가열하게 비난하고 공공 장소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종류의 사회적 압력이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건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에 종속되고, 서로의 삶에 참견하는 정도가 강하며, 획일적 잣대로 구성원을 규율하는 한국의 문화적 특성과 통하는 현상이다.


민주화 항쟁의 의의는 인민이 정부에 대항해 저항권을 발동하는 주권 행사의 주체란 점에 있다. 이 전통은 오히려 서구에서 훨씬 강하고 내면화, 일상화돼 있다. 서구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이동 제한 등의 통제가 잘 이뤄지지 않는 건 국가에 대한 개인의 자유 의지가 너무 강하단 점에 있을 것 같다. 정부가 격리 조치를 내려도 "우리가 죄인이냐? 왜 갇혀 있어야 하느냐?" 뛰쳐나와서 '시위'를 하고, “내 몸은 나의 것이다” 웅변하며 ‘공익’을 위해 마스크 착용을 강요 받는 걸 거부한다. 


나는 이상과 같은 차이가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에서 서구에 비해 방역이 잘 되고 있는 이유로 통한다고 생각한다. 동아시아는 상명하복(충효)의 전통과 대의명분의 관념이 강한 유교문화권에 정치문화적으로 권위주의 속성이 강하다. 까놓고 말하면, 팬데믹 같은 사태에 효율적인 건 민주주의보다 권위주의다. 어떤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공론을 하나로 모으고 국민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 헌법에 내장된, 민주주의를 잠정 중단하는 단서 조항들도 유사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냥 민주주의가 만능이 아닌 거고, 어떤 중대한 예외적 국면에선 무력한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관철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뭐겠나. 중국처럼 지역 봉쇄해 버리고 태국처럼 곤봉으로 때려잡는 거다. 지금 서구에선 이 수준에 근접하는 대규모 이동 제한 조치가 내려진 상태다. 아마 많은 서구 구성원들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삶에 대한 정부의 규제일 것이다.


그래서 '팬데믹'이 '뉴 노멀' 사회를 부르며 사회의 관습을 바꿔 버리면 권위주의, 전체주의적 반동이 오지 않을까 비관이 나올 수 있다. 지금 서구에선 코로나 자체를 넘어 이 점을 직감하는 두려움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변호사가 한국은 감시사회라서 방역에 성공했다고 비난하는 거나, BBC 특파원이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라 방역에 성공했다고 포장하는 거나 그 밑에 깔린 논리와 태도는 유사하다고 본다. 코로나 방역이 개인의 자유에 대한 역행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저마다 다른 방향에서 한국을 지목하며 의미 부여를 한다. 이 점이 서구에서 코로나 피해가 훨씬 적은 대만보다 한국을 주목하며 찬사를 쥐어주는 이유 중 하나일 것 같다. 대대적으로 국경을 잠그고 사회 이동을 통제하는 극약 처방을 단행하며 자유주의적 가치를 포기했지만, 한국은 국경 폐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방역을 잡았다고, 두 가지 미션을 동시에 수행하는 게 가능하다고 조명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포기한 가치를 관철해 달라고 독려하며, 주변부 국가에 가치 수행을 외주해 팬데믹이 끝날 때까지 가치를 보전하고 싶은 것일지 모른다.


한국의 방역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면 한국이 민주화 항쟁의 역사가 있을 만큼 민주화 수준이 높다는 사실이 아니다.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습속이 일정 비율로 공존하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국가 및 집단의 권위의 내면화와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 심리가 공존하고 있어 사회적 통제가 적정한 균형점을 찾은 것이 아닐까. 어떤 한국인들 스스로가 평소 사회 진보를 지체시키는 ‘적폐’로 지목하던 ‘한국적 특수성’, 개인주의의 과소 및 집단주의의 과잉 등 서구화되지 않은 ‘미개함’이 특수한 재난 사태를 막아내는 역량으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 좋은 덕목이 늘 좋은 결과를 부르는 것은 아니며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새옹지마의 아이러니? 미세먼지에 시달리다 보니 마스크 생산 인프라가 갖춰져 있어 수급이 원활했던 사실을 포함해 코로나 방역에 이런 아이러니가 꽤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방역 선진국이란 자의식에 취하는 건 이래서 해롭기도 하다. 방역에 대한 자화자찬, 한국이 방역 일등국이란 자부심은 그 위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욕심과 부담감을 낳고, 방역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생겨도 외면하고 덮어버릴 수 있다. 그걸 떠나서, 팬데믹은 예외적 상황이다. 백신이 개발되면 결국 팬데믹은 종식될 것이다. 유사시에 호재가 된 사회 인습이 평상시에도 사회에 보탬이 된다는 법은 없다. 필요한 건 자화자찬이 아니라 자기 객관화다. 바이러스 전문가들은 코로나 19 이후에도 또 다른 신종 코로나가 주기적으로 찾아올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한국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상대적으로 잘 수행할 수 있었던 요인을 파악해 기능적 장점은 남기더라도 그에 대한 성찰 역시 진행해 독소는 덜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소 한국인의 삶을 옭아매던 요소들이 ‘글로벌 경쟁력’의 위상을 얻어 정상적인 가치로 고착될 수도 있다.


심지어 여론은 전염병 덕분에 ‘세계 일등국가’로 발돋움한 조국의 광휘에 취해 서구에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뤄지지 못하게 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비웃는다. 후진국은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었다고 규정하는 가치 전도까지 일어난다. 이런 걸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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