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쥬와 르세라핌
‘세카이’(せかい)는 일본어로 ‘세계’라는 뜻이다. 여러 일본 문화 콘텐츠에서 ‘세카이’는 관용처럼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다. 거기서 이 말은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같은 진출과 도전, 포부가 담긴 용례로 쓰이곤 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세카이’로 나아가고 싶어 할까? 세계와 분리된 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반동이자 메이지 유신부터 이어진 ‘탈아입구’를 향한 열망인 걸까? 문화 산업으로 범주를 좁혀 보면, 좀 더 분명한 맥락이 보인다.
일본은 인구가 1억 이상이고 문화 산업 인프라가 잘 닦여 있다. 내수시장이 크기에 해외로 진출할 필요성이 없었고 수십 년 전부터 한국 가수들을 자국으로 불러들여 소비해 왔다. 한국은 내수 시장이 작기에 특히 음악 부문에서 수출 지향적 산업이 발전했고 아시아를 넘어 북미와 유럽에서 히트작을 내고 있다. 한때는 한국 가요계가 일본 팝 음악을 표절하며 히트곡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일본이 외딴섬에 안주하며 갇혀 있는 동안 BTS와 봉준호, 오징어 게임은 ‘세카이’로 나아갔다. 이렇게 맥락을 구성해보면, 한국은 일본이 꾸던 꿈을 대신 이룬 나라다. 일본 사회와 엔터업계 관계자들이 K-컬처의 세계화를 평하는 논조에는 감탄은 물론 선망과 부러움, 뒤쳐졌다는 탄식이 섞여 있다.
재작년 6월, 일본에서 걸그룹 ‘니쥬’가 데뷔했다. 이들은 한국 기획사 JYP와 일본 소니뮤직이 제작해 선풍을을 일으킨 오디션 방송 ‘Nizi Project’로 탄생한 그룹이다. 니쥬는 데뷔 직후 일본 최고 인기 그룹 중 하나로 등극했다. 니지 프로젝트의 성공에는 여러 배경이 있다. 한일합작 <프로듀스 48>이 일본에서 흥행하며 한국 오디션 방송 수요층이 형성된 상태에서 제작된 현지화된 오디션 방송, 일본에서 인기그룹이 된 트와이스를 본떠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현지화된 케이팝 아이돌 등의 요소가 그렇다. 하지만 니쥬가 한국 기획사들이 아시아 각지에서 제작한 현지화된 아이돌과 달랐던 점은 글로벌 그룹이란 깃발,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활약할 수 있는” ‘세카이’를 목표로 제작된 그룹이란 사실이다. 이 점이 방송이 예고된 시점부터 한일 양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니쥬의 소속사는 JYP다. 트레이닝도 한국에서 했고 앨범 제작도 한국에서 한다. 한일 양국에서 같은 날 앨범이 발매되고, 콘텐츠에 한국어 자막이 들어가고, 멤버들이 한국어를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니쥬가 한국에 진출해 ‘글로벌’하게 활동할 거란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2년이 지나도록 니쥬 멤버들은 한국에 체류할 뿐 단 한 번도 한국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 일본에서만 수차례 컴백했고, 글로벌 활동이라곤 올 해 일본 싱글을 영어로 번안한 싱글 하나를 낸 것뿐이다. 니지 프로젝트가 방영되던 당시 한국에서 “제이팝 세계화를 도와주는 케이팝 산업 유출”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논란이 벌어졌던 것이 더욱 우스꽝스워 보이는 결말이다. 니쥬는 처음부터 엔화를 쓸어 담기 위해 구상한 일본 ‘내수용’ 그룹이었고, 목적을 이루기 위한 미사여구로 “글로벌 그룹” “한국 진출” 같은 말들이 나부꼈던 것이다.
니쥬는 여전히 일본에서 인기가 있다. 하지만 고작 데뷔 2년 만에 니지 프로젝트의 열기가 식어 버린 것도 사실이다. 데뷔곡 ‘Make you happy’ 뮤직비디오 유튜브 재생수는 3억에 달하지만, 앨범을 낼수록 미끄러져서 작년 연말에 나온 ‘Need U’ 뮤직비디오 재생수는 천만 밖에 되지 않는다. 그룹 기획의 대전제 ‘세카이’란 모토가 공수표로 돌아 간 걸 모두가 알게 된 상황에서 이 그룹이 반등할 모먼트는 찾기 힘들 것 같다. 이것을 ‘세카이 사기극’이라며 빈정거리는 말들도 나돈다.
최근 한국 걸그룹 앨범에서도 ‘세카이’란 말이 등장했다. 하이브 신인 그룹 르세라핌이다. 르세라핌은 일본 시장에 중점을 두고 제작돼 하이브 일본 시장 경영의 첨병을 맡게 된 그룹이다. 데뷔 앨범 1번 트랙 'The World Is My Oyster‘에서 미야와키 사쿠라는 일본어로 “나는 이 세계에 만족할 수 없다 (…) 세상을 손에 넣고 싶다.”는 내레이션을 읊는다. 미야와키 사쿠라는 독특한 커리어를 갖고 있다. 일본 걸그룹 HKT48 멤버로 데뷔한 후 아이즈원에 이어 르세라핌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이팝 아이돌로 한 번, 케이팝 아이돌로 두 번 데뷔한 아이돌은 사쿠라 말곤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른 일본인 케이팝 아이돌처럼 한국 기획사에 캐스팅돼 데뷔한 것이 아니라 일본 아이돌로 오랜 시간 활동해 온 뿌리가 사쿠라의 고유한 캐릭터다. ‘일본이 낳은 아이돌이 BTS 기획사에 들어 가 세계로 향한다’ ‘세 번째 데뷔하며 끝없이 삶을 개척하고 도전하는 여성 아이돌’ 이 두 계열의 공적·사적 서사가 합쳐져 상승 곡선을 그리는 것이 사쿠라가 품게 된 자신 만의 세계관이다.
하이브는 르세라핌 프로모션 과정에서 사쿠라의 얼굴을 전면에 걸고 저 서사를 동원했었다. 하지만 데뷔 이후에는 일본 현지 활동에 국한해 간판으로 쓰이고 있다. 현재 일본 시장 정세는 복잡하다. 보이그룹들은 BTS와 세븐틴을 위시해 확고한 팬덤을 갖고 있지만, 걸그룹 시장은 니쥬가 주춤하며 신인 그룹들에게 문이 열려 있는 상태다. 르세라핌은 데뷔와 함께 일본에서 큰 반응을 얻었지만, 케플러와 아이브도 인기를 몰아가며 현지 활동에 돌입하는 단계다. 최근에는 일본 기획사 에이벡스가 케이팝 프로듀싱 시스템을 빌려 XG란 그룹을 제작해 한국 음악방송에 출연시켜 화제가 됐다. 제이팝 아이돌이 거꾸로 한국에 진출한 최초의 사례로서 한국을 거점으로 북미에 진출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즉, 니쥬가 채워주지 못한 ‘세카이’의 꿈을 일본 기획사가 직접 이루려는 케이스다.
한국 기획사들이 케이팝의 선진성으로 일본의 국수주의적 욕망을 대신 채워주겠노라 겉치레만 하는 마케팅은 더는 반향을 얻기 힘들어 보인다. XG처럼 일본인 손으로 직접 해내겠노라 나선 케이스가 등장한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시장 진입 경쟁이 본격화된 상황에서 그런 식의 접근은 안이하고 태만할 뿐이다. 현지 언론과 팬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건 현지 활동에서만 역할을 주는 ‘내수용’ 언론 플레이가 아니라 일본인 아이돌이 실제로 그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는 모습이다. 그런 활약상이 일본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어야 내실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트와이스가 롱런하는 이유다. 니쥬가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