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뉴진스·아이브·에스파·르세라핌·하이키
주체적 여성과 (여자)아이들
요즘 여성 아이돌 노래 가사의 공통점은 화자의 주체성이다. 현재 존재감을 치켜들고 있는 주요 신인 그룹 가사를 둘러보면, 각각의 정체성에 따라 세부 주제 의식은 차이가 있지만, 큰 틀에서 세상에 대한 능동적 태도가 움틀 거린다. 자의식적이고, 자기 과시적이며, 상승 지향적이고 투쟁적인 태도다. 그들은 메타버스 세계의 여전사(에스파)이며, 정상으로 향하는 불굴의 도전자(르세라핌)이고, 자기애에 도취한 하이틴 셀럽(아이브)이다. 이것은 주체적 여성상이라 부를 수 있지만, 화자가 여성이란 배경 사실을 통해 구성되는 주체성에 가깝다. 예컨대 비욘세의 ‘Run the World (Girls)’처럼 ‘남성에 대한’ 여성의 힘과 해방과 연대를 웅변하는 성정치적 주체성이 발표되진 않는다.
특수한 성별로서의 주체라기보다 보편적인 주체성을 재현하는 것, 이것이 여자 아이돌 노래 가사의 경향인 것인데, 그렇다고 성정치적 효과가 없지는 않다. 주체란 스스로에 대한 주인 됨을 품는 개념일 텐데, 이건 사회 구성원 모두의 것으로 존중되어야 할 보편적 존재 방식이다. 따라서 주체로서의 보편성을 남성뿐 아니라 여성의 것으로 재현한다면 분명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 다만, 그룹 ‘(여자)아이들’처럼 고정된 성별 경계를 횡단하고(‘TOMBOY’) 메릴린 먼로를 인용해 여성의 몸에 대한 성적 대상화에 대항하는(‘Nxde’) 실천적 양식의 여성주의 가사를 쓰는 케이스도 있다.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경우에도 특수한 의제·계층과 분리된 보편적 가치를 ‘안전하게’ 말하는 케이팝 신에서 이런 케이스는 극히 소수일 것이다. (여자)아이들의 가사는 좁은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을 의의가 있다.
사랑노래와 아이브·뉴진스
아이브와 뉴진스는 서로 닮은 가사를 뱉는다. 이들의 대표 곡들은 사랑 노래이며, 내용상으로는 10대 여성들의 사랑 노래, 형식적으로는 팬 송으로 구성된 사랑 노래다. 이 ‘팬 송의 형식을 취한 사랑 노래’는 역시 현재 아이돌 가사의 공통 경향 중 하나다. 둘의 차이점은 앞서 말한 화자의 능동성이다. 뉴진스는 주요 신인 걸그룹 중 저 주체적 여성상이란 화두와 동떨어져 있는 유일한 그룹일 것 같다. 아이브의 화자는 애정 표현과 관계 성립을 주도하는 인물이다. 화자가 느끼는 사랑은 눈앞의 연애 상대(팬덤)를 거쳐 “그 눈에 비친 나”에 대한 사랑, 자기애로 귀결된다. 뉴진스의 화자는 사랑하는 이를 갈구하고, 언제 어디서든 달려오는 그에게 놀라며, “널 알기 전까지는 나 의미 없었”다고 고백하는 기다림과 수동성의 화자다. 관계를 이끄는 주체가 아닌 관계를 통해서 성립하는 존재다. 이런 차이는 같은 하이틴 콘셉트를 다루지만 그를 재료로 구축되는 정체성이 다른 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 아이브가 10대 여성들이 동경할만한 어리고 도도한(young and rich) 셀럽의 맵시를 진열한다면, 뉴진스는 중장년층의 향수(레트로 콘셉트)를 쓰다듬으며 걸그룹의 전통적 이미지, 앳되고 순결한 정서를 전시한다.
세계관과 에스파·르세라핌
마지막으로 지목할 경향은 세계관의 구성 요소로서의 노래 가사다. 이걸 대표하는 그룹은 당연히 에스파다. 가사가 선율과 리듬에 얹혀 노래를 이루는 구성요소일 뿐 아니라, 그보다 큰 테마인 세계관을 표현하는 종합적 콘텐츠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세계관의 개념과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내용이 파악된다. 에스파의 가사는 “나비스” “블랙맘바” “ae” 등 생경한 단어가 빼곡해서 그 개념을 모르는 채로 접하면 지극히 난해한 인상이 든다. 이는 IP 사업과 팬덤 콘텐츠에 가사를 종속시킨 케이스다. 비팬덤 청취자에게 줄 수 있는 음악적 효과가 있다면 ‘일반인’의 시선으로 헤비한 오타쿠 물을 접하는 듯한 컬트적 감각일 것 같다. 물론 정도의 차이다. 이제 아이돌 가사는 세계관은 물론 그룹의 정체성을 이루는 여타 콘텐츠와 연계된 채 쓰이고 그것들과 함께 감상할 때 온전한 의미가 드러난다. 뉴진스의 수동적 구애의 가사는 MV와 결합될 때 아이돌과 팬덤의 관계성과 각자의 존재론에 대한 고찰로 승화된다. 르세라핌의 가사는 자체 제작된 다큐·예능 영상과 묶일 때 ‘독기’ ‘근세라핌’(근육 르세라핌이란 뜻의 별명) 같은 야망과 신체 단련에 몰두하는 강인한 자기 계발 주체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아이돌 가사의 현주소
이상의 경향들로 확인되는 건 메시지의 양식화와 가사의 비자립성이다. 주체적 여성성이란 테마가 걸 크러시 콘셉트로 획일화되면서 가사는 메시지라기보다 스타일이 되었다. 말했듯이, 주체적 여성 화자가 주류가 된 건 분명 사회적 의의가 있지만, 표현 방식의 차별화와 주제의 구체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개별 가사는 의미나 호소력을 낳기 힘들고 스타일리시한 콘셉트에 머물고 만다. 가사가 노래 외부의 콘텐츠에 부속되면서 그 자체로 의미 전달과 생명력을 얻기도 힘들어졌다. 이는 글로벌 시장을 노린 듯한 한영 혼용 가사의 보편화와 맞물려 가사의 전달력을 떨어트리는 원인이 됐다. 팬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가사에 형식적 공백이나 해석의 교란 장치를 집어넣는 경우도 흔한데, 추상적 표현과 의미 간격이 넓은 문장이 쓰이고 갑작스러운 인칭 전환(“나”를 주어로 흘러가던 내용이 갑자기 “너”로 바뀌며 이어진다든가)이 일어나곤 한다. 팬덤의 입장에선 이런 공백과 어긋남을 자기 손으로 수습하며 해석하는 것이 ‘떡밥’을 가지고 노는 즐거움이겠으나, 달리 보면 팬덤조차 해석을 해야 알아먹을 수 있는 가사를 팬덤이 아닌 이들이 이해하기란 때때로 난제에 가깝다.
하이키와 ‘메시지의 힘’
사실 이 글은 하이키의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를 말하려고 썼다. 하이키는 이른바 중소 기획사인 그랜드라인그룹 소속으로서 ‘건사피장’은 차트 순위권에도 없다가 역주행을 이뤄냈다. 사람들의 호평은 압도적으로 가사가 주는 공감과 위안에 쏠려 있다. 이 노래의 줄거리는 건물 사이에서 핀 장미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화자가 그 심상을 자신에게 대입하며 콘크리트 바닥 같은 삶을 “고개 들고” “끝까지” 버티자고 다짐하는 것이다.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제발 살아남아 줬으면 꺾이지 마 잘 자라줘 / 온몸을 덮고 있는 가시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견뎌 내줘서 고마워 / 예쁘지 않은 꽃은 다들 골라내고 잘라내 예쁘면 또 예쁜 대로 꺾어 언젠가는 시들고 / 왜 내버려 두지를 못해 그냥 가던 길 좀 가 어렵게 나왔잖아 악착같이 살잖아 / 나는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삭막한 이 도시가 아름답게 물들 때까지 / 고갤 들고 버틸게 끝까지 모두가 내 향길 맡고 취해 웃을 때까지
여기엔 영어로 맞춘 각운도, 시적 허용을 자처하는 모호한 표현도, 거창한 세계관도 없다. 요즘 케이팝에서 이렇게 일기를 쓰듯 하나하나 설명조로 말하는 가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확실히 직설적인 만큼 투박하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다. 온기 어린 씩씩한 메시지가 뚜렷이 전달되고, 노래 속 화자와 노래 부르는 화자의 현실이 일치하기 때문에 울림을 키운다. 길바닥에서 핀 장미와 ‘중소 걸그룹’의 처지다. 구닥다리처럼 말하면 ‘진정성’이 있는 것이다. "어렵게 나왔잖아 악착 같이 살잖아"는 굉장히 직설적인 표현이지만, 이런 표현이 감정 선이 고조되는 편곡에 실릴 때 절절한 문맥 위에서 뭉클한 서정성으로 피어난다.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제발 살아남아 줬으면”으로 시작하는 첫 소절은 역시 콘크리트에 돋아난 삶을 사는 많은 이에게 건네는 인사이자 격려가 되어 청자들을 단번에 가사의 정서에 빠트린다. 공감이란 정서는 이렇듯 화자의 개별성이 청자들의 개별성과 접속하여 보편성의 파동을 일으킬 때 그 힘이 넉넉히 발휘된다.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하는 반응이 많은 건 결코 꾸며낸 과장이 아닐 것 같다.
노래 가사는 문학이면서 그림이고 리듬이기도 하다. 꼭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알아먹을 수 있는 방식으로만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케이팝 가사의 현주소는 문화 산업의 발전과 함께 가사의 기능이 세분화하고 진화한 예시일지 모른다. 하지만 오래 남는 가사, 스스로 존재하는 가사는 결국 메시지나 서정성이 있는 가사다. 존 레넌의 ‘Imagine’이 다른 세상을 상상해 보라는 전언과 함께 세기의 명곡으로 남았고, 김민기의 ‘아침 이슬’이 50년이 넘도록 광장에서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는 가사의 오래된 권능이지만, 언제부턴가 가요계에서 경험하기 힘들었던 것, 진실한 메시지의 힘을 오랜만에 되새기게 해 주었다. 이 일을 다른 장르도 아닌 케이팝 노래가 해냈다는 점이 특별하다. 이 소박한 몇 줄짜리 가사는 근래 접한 그 어떤 값 비싼 MV와 트레일러 영상보다 마음자리 깊은 곳에 머무는 만남을 선사했다. 요란하게 기획된 서사와 세계관도 화자가 처한 콘텍스트와 맞물리지 않는다면 진정한 ‘메시지의 힘’은 누릴 수 없다. 단순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