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피프티 'CUPID' 빌보드 핫 100 진입
피프티피프티(이하 피프티)의 노래 ‘CUPID’가 어떻게 케이팝 역사상 데뷔 후 최단기간에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올랐는지는 많이 이야기되었다. 소식이 들린 지 2주가 넘었고, 한국에서도 완전히 무명이었던 이 중소 기획사 걸그룹이 기적을 일군 원인과 비밀을 캐묻는 글은 넘치도록 나왔다. 대부분 타당하게 들린다. 듣기 편한 노래와 감미로운 음색, 잘 만든 노래의 힘, 틱톡 BGM으로 유행하며 얻은 홍보 효과 등이 거론됐다. 피프티가 현재 진행형으로 쓰고 있는 각종 기록들도 이런저런 기사에 정리돼 있어 말을 보탤 필요를 못 느낀다. 다만, 그중 나름의 주장을 피력하는 글 두 편을 골라 따져보며 이 기적에 관해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빌보드 핫 100에 오른 노래가 왜 '멜론 차트'에선 안 보이냐 되묻는 건 좀 이상한 반응 같다. 멜론은 그냥 로컬 차트다. 멜론뿐 아니라 한국 음악 감상 시장이 그렇다. 케이팝을 빚는 나라의 음원 차트지만, 국내 히트곡만 반영될 뿐 원래 빌보드 차트랑 겹치는 노래는 거의 없다. 나라마다 노래 취향과 유행, 언어와 문화, 미디어가 다르니 당연한 일이다. 아마도 저 글의 필자는 빌보드 순위에 오를 만큼 ‘좋은 노래’가 원산지에선 소비자들 귀에 가닿지 못했다면 차트 구조가 어딘가 왜곡된 것이 아닐까 가정하는 듯하다. 하지만, 프로모션 효과를 누리지 못하는 무명 가수가 주목받지 못하거나 콘텐츠 퀄리티가 상업적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히려 피프티의 기적에서 가장 중요한 시사점이야말로 국내 음원 차트를 완전히 건너뛰고 빌보드에 진입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건 케이팝이 외국에서 글로벌 장르로 곧장 소비되고 있다는 극적인 증거다.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지만, 케이팝을 듣는 사람은 국내 보다 해외에 훨씬 많다. 수많은 해외 로컬 시장이 SNS로 연결돼 케이팝에 관한 동향이 즉각 공유되며 하나의 글로벌 시장으로 합집합을 이룬다. 해외 팬들은 개별 그룹을 넘어 케이팝이란 문화의 팬인 성향이 있기에, 국내 팬덤보다 새로운 그룹과 노래를 훑는 레이더망이 폭넓을 거라 추론할 수 있다.
한국에선 새로운 주기를 맞아 기획사를 가리지 않고 신인 걸그룹이 쏟아지며 바이럴과 프로모션 경쟁이 어느 때보다 혼탁하다. 해외 팬덤은 한국 바깥에 거주한다는 사실이 그 과열 상태에서 떨어진 채 케이팝 신을 조망하는 시야를 주는 면이 있다. 한국에서 외면되었다 해도 ‘좋은 노래’라면 국내와 별개로, 국내에서 보다 큰 반향이 일어날 수 있다. 이건 케이팝의 글로벌화가, 케이팝 그룹이 주둔하는 한국과 분리된 채 해외에서 케이팝에 관한 독자적 사건이 일어나는 수준까지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도 규모가 작은 기획사 걸그룹이 시선을 얻는 일은 간간이 일어난다. 최근엔 하이키가 국내 차트에서 역주행해 20위권까지 등반했었고, 빌리의 멤버 츠키는 작년 초 무대 직캠이 1000만 뷰를 넘으며 이름을 알렸다. 신인 그룹 포화상태에다 케이팝이 팬덤 산업으로 전환돼 갖가지 콘텐츠로 시스템이 세분화된 지금은 ‘역주행’이나 직캠 히트라는 산타클로스가 EXID, 브레이브걸스 같은 전례만큼 일발역전을 선물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케이팝 신이란 카테고리 안팎에 걸쳐 작은 이변들이 이어지는 건 한국 케이팝 신에서도 해외처럼 케이팝 계 문화 자체가 향유 대상이 되어 간다는 힌트일지 모른다. 얼마 전 내가 표현한 바에 따르면 ‘케이팝적 오타쿠’라 할 만한 주체로 팬덤이 진화하는 것이다.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면 국내에서도 이름이 생소한 피프티의 노래가 해외에서 과연 케이팝이란 라벨 아래에서만 감상되고 있는지 반문할 수도 있다. 빌보드 순위에 오른 건 앨범에 함께 수록된 영어 가사 버전이다. 해외 케이팝 팬들이 노래의 확산과 피드백을 주도했고, 그 바깥의 해외 리스너들은 빌보드에 흔히 오르는 영어권 ‘팝송’에 준하는 감각으로 노래를 들으며 청취자 수를 채워준다는 가설을 세울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케이팝의 세계적 보편성을 확인해 주는 현상이니 케이팝을 응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아쉬워할 게 아니라 기뻐해야 할 일이다.
한편, 피프티가 중소 기획사 아이돌이란 건 현상의 정황일 뿐 원인이 아니다. 이문원 평론가는 피프티의 마케팅 전략이 해외 음악계 장르 공간 파고들기, 3~5명의 소규모 그룹 구성, 영어 가사 버전 수록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중소 기획사 방법론 정석”이며 대규모 마케팅으로 코어 팬덤을 넓혀야 하는 대형 기획사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소규모 그룹 구성은 중소 회사의 방법론이 아니라 대형 기획사가 주도한 현세대의 보편적 추세다. 빌보드 역시 거대한 흐름을 반영하는 지극히 문턱이 높은 차트다. 중소 기획사 입장에서 빌보드에 이름을 올리는 게 소수 나마 해외 코어 팬덤을 두드리는 것보다 틈새가 넓다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빌보드 같은 해외 주류 음악 취향에 맞춰 노래를 만드는 것과 대규모 팬덤 마케팅을 하는 것이 전혀 상충되는 노선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치만으로 그의 주장은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이문원 평론가는 노래의 유행으로 표상되는 대중성과 자체 콘텐츠 등을 통해 모을 수 있는 코어 팬덤을 자의적으로 대립시키며, 케이팝은 노래 이외의 콘텐츠도 중요한 ‘보는 음악’이기에 전자의 노선은 영향력이 제한적이란 결론으로 착륙한 것 같다. 이런 관점은 이 주제에서 파생될 수 있는 논제의 싹을 미리 정해둔 결론으로 잘라 버리는 것이다.
피프티는 대규모 프로모션이나 팬덤의 음원 구매 없이 영어 가사 버전을 내는 등 최소한의 맞춤형 마케팅으로 빌보드 핫 100에 들어갔다(빌보드에 입성하기 전 이미 글로벌 팬덤을 보유했던 BTS와의 차이점이다). 구독자가 많은 기획사 SNS 계정, 팬 커뮤니티 같은 유무형의 인프라, 블록버스터한 MV와 자체 콘텐츠 등 여타 콘텐츠의 힘에 기대지 못했다. 회사의 규모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대형 기획사만큼의 지원은 받지 못할 것이다. 이 점을 들어서 팬덤 산업이 본질인 케이팝에서 피프티의 기적은 한계가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에 결론을 공란으로 비워두는 편이 흥미로운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저 노래만 인기를 끄는 것으로 그칠지, 노래의 힘을 거름 삼아 더 큰 유명세나 팬덤을 모을 수 있을 지다.
음악이 영상 및 미디어 플랫폼과 융합된 채 소비되는 시대이며, 케이팝은 '보는 음악'을 지향하며 글로벌 장르가 됐다. ‘CUPID’ 역시 틱톡 BMG으로 유행하며 물살을 탔기에 온전히 노래 만으로 성공한 건 아니다. 하지만 국내와 해외라는 상이한 환경, 팬덤 마케팅의 부재와 노래의 기록적 흥행이란 현상과 배경의 차이를 통해 다시없을 만큼 희소한 관찰 사례가 됐다. 지금 시대에 노래라는 전통적 포맷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혹은 케이팝이란 오디오비주얼 매체와 팬덤이 복합된 산업 안에서 노래가 품은 잠재력은 어느 정도인지 그 스펙트럼 안에서 정밀하게 가늠해 볼 수 있는 표본이 된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 시장은 "한국에서 흥해야 해외에서도 통한다"는 속설을 통해 케이팝의 '본진'이라고 색연필이 둘러쳐졌다. 하지만 유튜브 시대가 온 후 국내와 분리돼 글로벌 흥행을 한 사례, 그 인기가 국내에 거꾸로 수입된 사례들은 몇 초 안에 곧장 떠올릴 수 있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그랬고, 래퍼 키스에이프는 ‘잊지마’ MV가 화제가 된 후 미국 힙합 신에 진출했다. BTS 역시 그래미 스타가 된 후 한국에서의 위상이 ‘보이 그룹’을 넘어 ‘사회 명사’로 승천한 이들이다. 이들 중 국내에서의 인지도와 해외에서 이룬 실적의 간극이 피프티만큼 아득한 케이스는 없다.
‘강남 스타일’에서 ‘CUPID’에 이르는 시간 동안, 그 간극이 깊어진 만큼 케이팝은 더욱더 글로벌 산업이 되었고, 그럴수록 한국은 일개 로컬 시장으로 격하되어 가는지 모른다. 이런 탈중심적 세계화가 접두사 K가 세계의 중심에서 떠오른 신화의 결말이란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한국처럼 내수 시장이 작아서 다른 문화를 자국으로 흡수할 수 없는 나라의 세계화는 이런 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스로 세계의 중심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부를 향해 끝없이 제 존재를 퍼트리고 현지에서 거둔 지표를 통해 그것을 인증받는 것으로 이어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글로벌 경쟁력을 가장 큰 정체성으로 홍보하는 케이팝 ‘4세대 걸그룹’들은 매스미디어와 함께 분해돼 버린 국내 시장의 ‘대중성’을 쫓으며 갈수록 시장 점유율이 줄어드는 ‘멜론 차트’ 순위 경쟁을 보도 자료로 돌리기에 여념 없다. 그들이 국내 차트에서 얻은 기득권은 국내에서 아무런 기득권이 없던 그룹보다 낮은 해외 차트 순위로 환전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피프티의 빌보드 핫 100 입성이 가리키는 진정으로 아이러니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