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 리사
몇 가지 퀴즈로 글을 시작해 보자. 전 세계 솔로 가수 중 유튜브 영상이 24시간 동안 가장 많이 재생된 인물은 누구일까?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에서 가장 많이 솔로 음원이 재생된 케이팝 가수는 누구일까? 미국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와 MTV 유럽 뮤직 어워즈에서 최초로 수상한 케이팝 솔로 뮤지션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인물 중, 그리고 케이팝 가수 중 가장 많은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한 사람은? 이 모든 스펙터클한 질문의 답은 단 한 사람이다. 바로 라리사 마노반,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이자 태국인 케이팝 아이돌 리사다.
리사는 케이팝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외국인 아이돌이다. 또한 블랙핑크는 외국인 아이돌을 통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한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다. 태국은 물론 영어 구사자가 많은 동남아 지역 전체의 서포트가 큰 힘을 발휘했다. 그동안 리사는 종종 케이팝 담론의 한 주제로 다루어졌지만,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의 출신지와 연관된 촌평에 치우쳐 있었다. 그가 태국의 국가적 영웅이며 현지 하이쏘(상류층)에 대비되는 로쏘(서민층) 계층인 것이 배경이라는 이야기들이다.
리사를 제대로 말하기 위해 젖혀둬야 하는 게 저런 시각들이다. 리사는 단순히 동남아 지역의 셀럽이 아니며 그의 인기는 외국인 아이돌이란 그릇에 다 담기지 않는다. 케이팝 역사와 남녀 아이돌을 아울러 가장 월드와이드한 셀럽이고 가장 큰 개인 파워를 지닌 아이돌 중 하나다. 리사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9000만 명이 넘는다. 이게 어느 정도 수치냐면 전 세계 모든 인스타그램 계정 중 40위 안에 든다. 영국의 유명 팝가수 두아 리파, 라틴팝의 여왕 샤키라 보다 팔로워가 많다. 아시아에선 나라마다 이런저런 아이돌들이 인기가 있다. 하지만, 서구에서 인기 있는 여자 아이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블랙핑크와 나머지라고 단언할 수 있고 리사는 블랙핑크에서 가장 글로벌 팬이 많다.
블랙핑크 멤버 제니는 다큐 ‘블랙핑크: 세상을 밝혀라’에서 리사를 만난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태생적으로 이렇게 잘하는 친구가 있구나” 이 태생적이라는 말은 리사를 표현하는 데 가장 알맞은 단어다. 리사는 무대 퍼포먼스를 위한 모든 재능을 갖췄다. 언젠가 아이돌의 실력을 논한 글에서, 아이돌은 퍼포먼스를 이루는 각 요소의 전문가들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한 적 있지만 리사는 예외다. 래퍼들에 견줘 부족하지 않을 만큼 랩을 능숙하게 뱉고, 댄서들이 격찬할 만큼 춤을 잘 춘다. 늘씬한 체형과 작은 얼굴, 서구적 인상과 스웨거한 스타일은 특유의 퍼포먼스 퀄리티에 압도적 카리스마를 더한다. 말 그대로 무대에서 그림이 되는 존재, 무대에 서기 위해 태어난 아이돌, 그것이 리사다.
아이돌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되지만, 케이팝이 그 자신의 역사를 통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육성하고 해외 진출의 첨병으로 내세운 건 무대 위의 아이돌, 퍼포머로서의 아이돌이다. 걸그룹의 경우 그것이 콘셉트로 구체화된 버전이 ‘걸 크러시’다. 리사는 산업의 오랜 꿈과 열망이 만들어 낸 케이팝의 걸작이다. 퍼포먼스 아이돌의 완성형이자 걸 크러시를 형상화한 조각상 같은 스타일에 전 세계에서 가장 글로벌한 여자 아이돌. 리사는 ‘보는 음악’, 오디오비주얼한 매력으로 글로벌 장르가 된 케이팝의 경쟁력을 상징하는 존재다. 타고 난 팝스타적 재능에 더해 능숙한 영어 구사와 이국적 외모, 비한국인 아이돌의 정체성으로 전 세계 여성들이 자신을 투영하며 동경할 수 있는 아이콘이 됐다.
리사의 위상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한국 케이팝 신 내부에 있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리사가 SNS와 유튜브에서 손쉽게 빚어내는 초월적 수치들이 동남아 지역 인구에서 비롯한 것이라 말한다. 이건 징후적인 말버릇이다. 샤키라가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슈퍼스타라고 해서 그 사실로 폄하되진 않는다. 그런데 왜 동남아 출신 아이돌이란 정체성은 세계적 위상을 축소하는 근거처럼 거론되는 걸까. 그건 이 나라 안에 동남아를 진출할 가치가 있는 해외 시장에서 제외된 ‘비세계’로 인식하는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 문화의 주변부, 비서구 지역에서 시작된 이 문화 안에도 또다시 중심과 변방을 구분 짓는 차별의식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케이팝은 단순히 한국의 음악이란 정체성으로 세계화된 산업이 아니다. 오히려 타국의 음악 장르와 산업 시스템, 문화적 도상을 받아들여 융합한 산업이다. 아시아 지역 음악 산업을 대표하며,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의 자원들을 선발하고 각국 팬덤의 열정을 등에 업어 왔다. 그들의 민족주의까지 데리고 세계로 나아가는 한편 그들에 의해 세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국적의 혼종성이 케이팝의 정체성이다. 리사의 태국 팬들은 소속사 YG와 케이팝 신 내부에서 리사가 받는 처우에 지극히 민감하여 강력한 인터넷 화력으로 항의하곤 한다. 한국에서는 이 상황이 밈처럼 묘사되며 그들의 극성이 조롱거리로 통한다.
하지만 이건 민족주의의 보편적 근성이다. 한국인들이 손흥민이 EPL에서 겪는 문제들을 곧장 인종차별이라 규탄하고 BTS가 서구 언론과 빌보드에 견제당한다고 믿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리사를 둘러싼 동남아 팬덤의 열광과 분노, 한국 팬덤과의 마찰은 오늘날 지구촌의 초국적화 현상이 케이팝 신 내부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 산업을 이루는 복수의 민족주의가 결합하고 경합하는 양상을 그려낸다. 케이팝은 아시아 지역 국민들이 자국의 대표 선수를 응원하며 열기를 불태우는 아시아 음악계의 EPL이 되었다. 라리사 마노반은 그러한 세계적 경쟁력이 도래하는 데 특별한 역할을 한 인물, 케이팝의 ‘one of a kind’다. 한국 팬덤과 산업 관계자들은 케이팝이 배출한 이 걸출한 스타에게 더 많은 존중을 바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