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남성들
탈진실로 무장한 안티 페미니즘
한국 남성들의 세계관은 이상하다. 어떤 한국 남성들이 자신을 둘러싼 권력관계를 규정하는 모습을 보자. 한국에 사는 남성들은 한국에 사는 여성들보다 약자다. 이들의 믿음이 이렇다는 걸 더 설명할 필요는 없다. 기성세대 남성은 과거 호황의 기득권을 독점한 채 자기 세대가 저지른 성차별 업보를 ‘이대남’에게 전가하는 위선자다. 성소수자들은 서울 시가지를 행진하며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PC주의 점령군이다. 장애인들은 법을 농단하는 ‘기습 시위’로 출근길 지하철을 점거하는 테러범이다.
아시아로 나아가면 한국만큼 페미니즘이 기승을 부리는 나라는 없다. 고로, 아시아 남자 중 한국 남자가 가장 약자다. 남성들의 욕망이 여성들을 무람없이 대상화하는 일본은 한국보다 앞서 있는 ‘성진국’이다. 아시아 밖에서 흘러 온 난민들은 세금을 상납받으며 한반도에 말뚝을 박고, 미국과 유럽의 흑인들은 아시안을 차별하고 깔보는 ‘가짜 소수자’다. 그러니까, 모든 성별과 세대와 장애와 성적 지향과 국경과 피부색을 아우르는 지구상 최악의 약자는 ‘한국 남자’다. 이것이 ‘남초 커뮤니티’에서 일상적으로 오가는 담화를 정리한 인식 내용이다.
이것이 망상이란 건 설명할 가치가 없다. 물을 의미가 있는 질문이 있다면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왜곡된 시야로 세상을 보고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재생산되고 있느냐다. 약자의 현실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약자라는 지위와 명분은 이점을 준다. 내가 실은 강자인 데도 약자라고 주장한다면, 내가 지닌 기득권을 은닉할 수 있다. 기득권을 양보하거나 남들과 나누지 않아도 된다. 강자이기에 따라붙는 사회적·도덕적 비난과 책임감도 떠안지 않는다. 반대로 끝없이 타인을 강자라고 비난하고 책임을 요구할 명분을 취할 수 있다. 약자의 권리신장 요구 또한 틀어막을 수 있다. 약자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며 강자인 그들은 권리를 더 요구할 명분이 없으므로. 저 어떤 한국 남성들은 세상을 상대로 약자 되기의 경쟁과 인정 투쟁을 벌이며 약자의 지위를 오로지하고 도구화한다.
이 모든 약자의 자의식은 사실에 맞지 않으므로 사실을 비틀고 주무르고 회피하는 작업을 경유해야만 한다. 사실 왜곡과 취사선택, 나아가 사실의 상대화다. 내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통계는 거론하지 않거나 신뢰성을 부정하고, 당파적 이해관계로 얼룩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의 저조한 성 평등 지수와 낮은 여성 임금은 ‘페미’ 언론의 일방적 주장이며 구미에 맞는 통계만 가져 온 일반화다. 여성이 성범죄 피해자란 주장은 남성 역시 성범죄를 당한 사례 몇 가지를 가져와 ‘일반화’ 해 버린 후 기각한다.
주목할 것은 사실 자체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서, 사실의 형식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다. 내가 살면서 느끼는 주관적 현실이 통계 보다 진실에 가까우며 통계는 현실을 담지 못하는 먹물들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 ‘대중’의 주장을 딱딱한 사실과 논리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기저에 깔린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탈진실’이라고 불리는 시대적 동향에 정확히 부합하는 태도다.
탈진실은 2016년 경 부상한 단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2016년 올 해의 단어가 post-truth, 탈진실로 선정됐다. 그 해엔 유럽에선 브렉시트가 가결됐고, 미국에선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치적 반동의 조류 속에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으며, 사실 혹은 진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인식이 팽창했다. 지금은 익숙한 용어가 된 ‘가짜 뉴스’(fake news) 역시 이때부터 공론장에 정착했다. '포스트 트루스'의 저자 리 매킨타이어는 탈진실의 핵심이 단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사실만 선별해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말한다.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아니라 ‘진실이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 종속된다’는 입장, 진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확고히 하는 태도가 탈진실 현상의 요람이다. 리 매킨타이어는 탈진실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우월주의라고 지적한다. 다른 말로 풀면 ‘진영논리’라는 익숙한 이름이다.
한국에서도 탈진실은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정말로 흥미로운 건 탈진실과 반대되는 경향, ‘사실 물신주의’라고 할 만한 현상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팩트’란 단어는 탈진실, 가짜뉴스가 오기도 전부터 인터넷에서 입버릇처럼 쓰이다가 일상어로 뿌리내렸다. ‘팩트’는 ‘주작’과 짝패로 쓰인다. 사실에 해당하는 것과 날조된 것을 가려내는 사실판단의 이분법이 맹목적으로 추구된다. 언뜻 탈진실과 배치돼 보이는 이 경향은 실은 탈진실의 다른 얼굴이며 탈진실과 함께 진영 논리를 이루는 인지편향이다. 사실물신에 깔려 있는 태도와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는 사실판단에의 고착과 가치판단의 주변화다. 논쟁은 무엇이 ‘팩트’인지 ‘주작’인지 가리는 단순한 토론으로 종결돼 버리고 그 이상의 가치판단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저마다의 입장에 따라 옳고 그름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확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정해진 결론과 주어진 사실 관계, 이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탈진실과 사실 물신주의가 편의적으로 발휘된다. 우리 편 입장에 부합하는 ‘팩트’만 수집되고 그저 사실이라고 들먹이는 것으로 반박의 여지가 삭제되는 주장으로 절대화된다(사실 물신). 부합하지 않는 사실은 ‘주작’이거나 ‘가짜뉴스’이며 가치를 둘 의미가 없는 사실로서 상대화된다(탈진실). 반대로 적대 진영의 입장과 사실 사이의 거리는 최대한 벌리고 강조한다. 그 간극을 ‘불편함’과 ‘예민함’, ‘정신병’이라 규정하며 비정상 집단으로 몰고 가 공론장에서 발언할 자격을 박탈하려 한다. 이렇듯 사실 위에 군림하며 사실과 거짓을 내키는 대로 가르는 대상은 바로 진영논리다. 탈진실과 사실 물신주의가 복무하는 진정한 물신의 대상이다.
문제는 거짓 자체가 아니다. 가짜 뉴스가 사회의 암세포처럼 규탄당하지만, 소문의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작업은 어렵지 않다. 탈진실에 대한 방어기제이자 사실 물신주의의 단편적 작용으로써 ‘팩트 체크’를 하는 시스템은 공론장 여러 층위에 형성돼 있다. 대표적인 한국 남성 커뮤니티 ‘에펨 코리아’에서조차 가짜 뉴스를 ‘포도’라고 부르고 저격하며 커뮤니티 안에서 유통되는 소식의 진위를 검증하는 자정 작용이 이뤄진다. 진짜 문제는 개별 소식을 바로 잡아도 커뮤니티 내부에 공고히 형성된 세계관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관의 본질에 흠집을 내지 않는 정도의 팩트만 확인될 따름이고, 자정 작용의 존재는 '우리는 사실에만 입각해 주장한다'라고 탈진실적 태도를 숨기고 합리화하는 알리바이로 쓰인다. 대한민국을 소통할 수 없는 내전의 사회로 만드는 건 사회적으로 게토화된 채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극우 유튜버가 아니다. 자신의 권위와 영향력을 통해 특정 집단이 품은 입장과 사실의 간극을 메워 주고 심지어 공론장의 보편적 입장으로 승격시켜 주는 기업과 언론, 정치인이다.
“남성 소비자가 많은 서비스에 남성을 조롱하는 의미를 담은 그런 표현을 하면 당연히 문제가 생기는 것” (류호정 정의당 의원)
“게임에 일베나 메갈의 손동작 밈을 굳이 콘텐트에 몰래 집어넣겠다는 ‘음습함’에 대한 대중의 정서적 반감이 이번 논란의 기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중앙일보, [박가분이 소리내다]
“일부 애니메이션 리소스에 부적절한 표현이 확인돼 전반적인 원인 파악을 진행하고 있다. 모험가님(유저)께 불쾌한 감정을 드리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안” (넥슨)
이른바 메이플 ‘집게손’ 그림은 여성이 아닌 남성 원화가가 그렸다고 확인됐다. 사실 확인은 겉치레만 하며 어찌됐건 ‘사실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어조로 저러한 공언을 하는 자들이야 말로 진영논리에 올라 타 거짓과 진실의 경계에 구멍을 내는 탈진실 시대의 사악한 구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