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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Apr 05. 2024

인간중심주의의 두 얼굴

푸바오 송환

푸바오의 '송환'을 배웅하러 에버랜드에 간 푸바오 팬들이 울음을 쏟는 영상이 퍼졌다. 사람도 아니고 동물 때문에 단체로 통곡하는 건 과잉 반응이며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편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행동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건 옳지 않다는 반론도 나왔다. 푸바오 팬덤은 주로 여초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걸로 보인다. 해당 논란은 푸바오 관련 게시물이 적은 남초 커뮤니티와 SNS에서 푸바오 팬덤이 아닌 사람들이 일으켰다. 여초 커뮤니티에선 중국이 푸바오를 맞는 과정 상의 문제도 지적 했는데 이 일도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푸바오 맘’들이 ‘극성맞다’며 조롱당했다.


푸바오 팬들을 옹호하는 입장에 관해선 특별히 할 말이 없다. 너무나 당연한 정론을 말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자유에 간섭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느냐 여부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는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세상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많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건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다. 어떤 이들은 그 슬픔을 남보다 요란하게 표현한다. 이건 잘못된 일도 아니고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다. 그런 애착 감정의 대상이 동물일 수도 있다고 인정하면 된다.


반면 푸바오 팬들을 유난 떨지 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얘기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그들에게선 일관된 발화 패턴이 확인된다. 오열 영상을 보고선 “다들 부모님한테 전화 한 통 씩 드리자” “너희 가족한테나 그렇게 해 봐라”라고 하거나 심지어 ‘군인’과 ‘경찰’을 들먹이며 너희를 지켜 주는 사람들을 위해 울어라!라고 일갈한다. 이들이 말하는 바는 사랑과 슬픔을 보내는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판다 같은 동물에게 사람의 감정을 바치는 건 쓸모없거나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부모형제가 들먹여진다. 이런 종류의 반응은 낯익다. 동물권 개념에 적개심을 표하거나, 반려견이란 단어를 못마땅해하고, 인간에 대한 동물의 지위를 절대적으로 격하하는 주장은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의 태도는 인간중심주의다. 타인에게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행동만 하라고 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가 극도의 자기 중심주의로 표현되고 있고, 사실상 그 두 가지 태도가 상통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러한 태도의 문제점은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동물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 대상이 곁에 두고 키우는 동물이 아니라 영상과 현장 관람을 통해 친밀감을 쌓은 유명한 판다일 수도 있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만 인간다운 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사실 명제가 아닌 당위 명제다. 그런 경직된 잣대는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관계 양상과 감정 교류의 폭을 제한하며 오히려 인간적인 것이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축소한다. 특정한 성향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로만 채워진 세상은 관용과 다양성이 도살 당한 전체주의의 유토피아다.


하지만 아이러니는 이런 태도가 푸바오 열풍을 낳은 맥락과 결코 배리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푸바오 현상의 원인에 관해선 많은 진단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이 사육사들이 보살 피는 푸바오를 보며 대리 육아 체험을 한다거나 푸바오와 엄마 아이바오의 관계성을 보며 가족 서사에 빠져든다는 얘기다. 이 진단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점은 사람들이 푸바오에게 자아를 투영해 만족감을 얻거나 사람들 사이 고유한 관계 양상에 푸바오를 대입한다는 것이다. 삼성물산 리조트 부문 매출이 두 배 이상 올랐다는 에버랜드 판다 비즈니스 왕국은 지구상에서 사람들의 자아 투사와 정서적 과몰입에 가장 특화된 산업인 팬덤 비즈니스 시스템으로 건설돼 있다.


사람들이 푸바오를 접하는 주된 통로인 유튜브 영상에선 관습적인 휴먼 스토리의 내러티브로 푸바오 패밀리가 연출돼 있다. 유튜브 영상과 SNS, 판다 굿즈 팝업 스토어, 관람 현장이 연결되면서 지금과 같은 열풍이 체계화되고 매출로 환전된 것이다. 푸바오 팬덤이 푸바오를 애호하는 모습을 보면 흡사 케이팝 아이돌을 대하듯 글을 쓰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기존 팬덤 문화의 연장선에서 커뮤니티가 굴러간다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푸바오 열풍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푸바오에 열광하는 사람들 역시 동물을 인간의 인식 체계 속에 옮겨다 놓고 의인화하는 인간중심주의의 닫힌 세계관 안에 있다. 푸바오가 나고 자라 에버랜드의 상징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인간중심주의의 구조화라면, 그것을 비웃는 사람들은 인간중심주의가 노골화한 말들을 뱉는다.


양쪽 다 마찬가지란 양비론 따위를 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저에 깔린 태도가 유사하다고 해서 상반되는 입장과 행동이 동일해지는 건 아니다. 푸바오를 통해 얻는 감정에 자족적으로 빠져 있는 사람들과 남의 감정에 간섭하며 규제하려는 사람들을 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논란들은 대립하는 양측의 차이만 주목되고 증폭될 뿐 그것들이 딛고 있는 구조적 전제는 사유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푸바오 논란 역시 기존의 도식화된 대립 구도가 소재를 바꿔서 또 한 번 반복된 것에 불과하다. 남초와 여초로 구분되는 진영논리, 그것들이 각각 상징하는 보수적 태도와 정치적 올바름이 투영된 논란이다. 여성적 습속으로 치부되는 ‘예민함’ ‘극성스러움’에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이 공론장의 심판자처럼 호통을 치는 모양새는 언제부턴가 인터넷에서 방영되는 일일 드라마의 클리셰가 된 것 같다.


이런 갈등 양상은 너무나 기계적으로 반복되어서 세상에 만연한 것처럼 느껴지고 “대혐오의 시대” 같은 피상적이고 체념적인 어조로 토로되곤 한다. 하지만, 화해할 수 없는 전쟁을 벌이는 듯한 양 주체의 위치나 세상을 보는 인식 구조가 실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사실에 비춰 어떻게 갈등을 해소할 것이냐는 훨씬 복잡한 얘기가 되겠지만, 우선은 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동질성과 사회적 토대를 상기하고 곱씹어 보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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