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대화

글쓰기에 관한 수기

by MC 워너비

내게 문재가 있다는 건 어려서부터 알았다. 부모님은 맞벌이 교사였다. 자식 교육에 거는 기대가 컸고 별이 뜨기도 전에 하늘을 보듯 일찌감치 어린이 도서를 장만했다. 내 어린 날의 가장 이른 기억 속에서 나는 책을 읽고 있다. 그것이 길게 가는 자산이 됐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나는 글을 읽고 쓰는 학업을 수월히 했다. 글솜씨가 좋다는 칭찬도 종종 들었고, 같은 분량의 활자를 남보다 빨리 훑어냈다. 천성이 게을러서 공부에 열중하지 않은 내게 글 재주는 보험 같은 것이었다.


수능 시험도 그랬다. 나는 수학은 해도 안 되고 국어는 안 해도 되는 학생이었다. 덕분에 선택과 포기를 과감하게 단행했다. 시험 백일을 남기고 수리영역과 언어영역을 뺀 나머지 과목만 팠다. 약간의 행운이 더해져 실력보다 좋은 점수를 받았다. 대학에 간 후에도 그 덕을 조금은 본 것 같다. 여러 온라인 게시판에도 즐겨 글을 썼고, '필력이 좋다'는 피드백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언어를 다루는 데 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언어의 재주는 한 가지가 아니다. 내 생각에, 말과 글의 자질은 전혀 다른 것이다. 생각이 발동하는 간격이 다르고 요구되는 사고능력이 다르다. 글 재주의 요지가 정확함이라면 말 재주의 요지는 유창함이다.


생각하면, 내가 끼적인 단상들과 잡문들은 말의 결여감을 위무하고 보상받기 위한 것이었다. 말은 해야할 때를 놓치면 덧붙일 수 없고 하고 나면 줏어담을 수 없다. 나와 너의 커뮤니케이션은 그렇게 냉정하다. 하지만 글의 본령은 생각의 결을 끈기있게 깎고 붙이는 조탁이다. 할 기회를 놓치는 말은 있어도 쓸 기회를 놓치는 글은 적다. 거기엔 내 말을 끊거나 내 말에 귀를 닫는 '너'의 존재가 없다.


네 앞에서 하지 못한, 할 수 없는 말들을 나는 '나'를 세워놓고 고백한다. 그 어떤 마음과 느낌과 관계의 문턱도 없이. 언제, 어떤 말이든 들어주는 '나'를 앞에 두고, 머리 속 심해를 부유하는 생각의 이미지를 건져내서 형체화한다. 그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수준의 대화가 아닐까. 대화는 말하기와 듣기가 턴으로 분리된 행위다. 나는 글을 쓸 때 온전히 화자이지만, 글을 읽을 땐 내 글의 제일 가는 청자다. 글쓰기는 자아에의 함몰과 자아 밖으로의 거리두기를 순차적으로 선사한다.


한 획 한 획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얽매이다 기력을 소진할 때 충일감을 느낀다. 내가 스스로에게 말 걸고 귀 기울이는 데 불성실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일 것이므로.

keyword
MC 워너비 미디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806
작가의 이전글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