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의 아리랑은 누구를 위해 울리는가

BTS 광화문 공연

by MC 워너비

3월 21일, 광화문에서 BTS의 공연이 열린다. 4년 만에 완전체 활동을 재개하는 정규 5집 앨범 ‘아리랑’ 발매 기념 공연이다. 넷플릭스가 독점 생중계하며 전 세계 190여 개 국가에서 BTS의 열창을 볼 수 있다. 공연 당일 광화문 인근에는 23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할 것이라 예측된다고 한다. 당국은 안전 통제 차원에서 수천 명의 경찰과 소방 인력을 배치한다. 행사장 부근 지하철 역 4곳은 오후부터 밤까지 열차가 무정차 통과하고 출입구도 폐쇄된다. 이 상황에 대해 찬반양론이 고개를 들고 마주 보고 있다.

비판 여론은 주로 이 공연의 중계를 넷플릭스가 독점하는 것에 항의하고 있다. 국가의 행정력과 공공의 장소가 해외 OTT 기업을 배 불리기 위해 동원되는 꼴이라고 소리를 높인다.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외국 기업에 대형 문화 이벤트 중계권이 넘어갔다며 국내 산업계가 겪을 기회 손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지 여론은 국가 홍보와 경제 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BTS의 컴백을 보기 위해 해외 팬들이 무수히 입국할 것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서울의 경관과 광화문의 위용이 전 세계에 전파된다. 인근의 점포들은 관광객 특수를 누리고, BTS의 ‘아리랑’은 한국을 알리고 상징하는 기념비가 될 것이라고 흥분한다.

두 주장은 제가끔 타당한 면이 있다. 넷플릭스 덕에 더 많은 세계인이 공연을 볼 수 있겠지만, 넷플릭스 탓에 한국에서 공연을 볼 수 있는 보편적 채널은 제한됐다. 넷플릭스를 떠나 큰 규모의 실내 공연장을 두고 구태여 광화문에서 공연을 하여 인명 피해의 소지와 공적 기회비용을 발생시킨 것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반면, 이 공연이 세계의 시선을 한국의 중심부에 집중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란 점도 부정하긴 힘들다. 거대한 문화 이벤트를 통해 케이 컬처의 흐름에 다시금 불을 지피는 축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찬반양론의 논거는 결국 동일해서 재미있다. 바로 ‘국익’이라는 관점이다. 비판자들은 왜 이런 국가적 이벤트를 국내 OTT 산업을 부흥시킬 기회로 삼지 않느냐며 국부가 유출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혀를 찬다. 지지자들은 장밋빛 상상으로 덧칠된 ‘BTS 노믹스’를 열거하며 국가적 이익을 계산기로 셈한다. 여기서 소거된 관점은 ‘공익’이다.


국익과 공익은 무엇이 다를까. 국가는 국민을 구성 요소로 삼는 정치적 실체이며 스스로 위상과 이해관계를 갖는 행위자다. 국가의 이익이 목표이자 가치가 된다. 개인에게 그를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 애국심으로 합리화된다. 공공은 국가의 구성원인 개인들에게 두루 관계되는 개념이다. 공공의 이익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공존의 조건이며 개인들이 동등하게 누려야 하는 권리다. 공익은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영위되는 삶을 기준으로 판단된다. 특정한 개인들을 소외하지 않는 인권과 평등 같은 시민적 가치가 포함된다. 국익과 공익이 교차하는 지점을 벗어나면 전자가 후자를 억압할 수도 있다.


BTS의 광화문 공연은 ‘국익’의 관점에서는 분명 기여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공익’의 관점에서는 어떤 공적 가치가 발생하는지 불분명하다. 넷플릭스가 해외 기업인 것을 떠나 BTS와 그들의 소속사 하이브는 사익을 위해 활동하는 주체다. 비록 그들이 세계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고 그로 인해 파급되는 이익과 가치가 있다고 해도 그들의 사적 주체성이 바뀌지는 않는다. 케이팝 산업 특수와 관광효과는 특정한 산업과 경제 주체에게 수혜가 한정된다. 국가적 홍보효과 역시 추상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이익이다. 그것들이 시민 다수의 삶에 환원되는 구체적 공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광화문 공연은 이 물음이 불문에 부쳐진 채 공익을 추구해야 하는 국가가 대규모 행정 자원을 소비하고 인명 피해의 위험을 자초하며 시민들의 일상에 불편을 안긴다. 이건 무언가 뒤바뀐 상황이다.


물론 다수가 겪는 불편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악조건은 아니다. 말했듯이 공익은 공적 가치를 포함하고 시민 모두의 안녕과 평등을 추구한다. 공공의 행사와 사회적 약자 배려를 위해서라면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공익적 태도다. 하지만, 광화문 공연은 특정한 사인들을 대단히 유명하다는 이유로 국격과 동일시하는 행사다. 장애인 이동권을 요구하는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가 출근길에 주는 피해는 모두가 규탄하고 조롱하면서 아이돌의 공연을 위해 광화문 일대가 마비되는 건 당연시하는 사회는 이상하다. 그것은 공익에 관한 이 사회의 감수성이 이미 왜곡돼 있다는 뜻이다.


광화문 공연에 관한 논쟁은 BTS를 통해 국가가 얼마나 이득을 보느냐만 따질 뿐, 시민들이 무엇을 얻고 잃는지는 얘기되지 않는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공적 자원을 징집하고 있는가.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광장에서 서로가 나누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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