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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Dec 15. 2016

한국 힙합의 주어는 누구인가

스웨거 가사의 시대가 공허한 이유

힙합과 만난 건 10년 전이다. 드렁큰 타이거, 에픽하이, 다이나믹 듀오 등이 결성한 무브먼트 크루가 상업가요 차트에서 바람몰이 하던 때였다. 나는 드렁큰 타이거의 컴백 앨범을 들었다. 가요화된 힙합을 들은 적이 많았지만, 그 노래들은 귓속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어딘가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린 기분이 들었다. 내 오감에 침투한 요소는 가사였다. 대중가요는 보편성의 가사다. 사랑과 이별이란 상투적 주제를 노래하고 주어가 비어있는 감정과 사건들이 스케치된다. 아무리 빼어난 수법으로 쓴 노랫말도, 노래를 부르는 가수와 노랫말 속 화자가 일치하는 일은 없다. 있다고 해도 지극히 드물다. 힙합은 주어가 팽팽하게 채워진, 자아가 있는 장르다. 랩 하는 MC가 직접 가사를 쓰는 것은 힙합의 엄정한 불문율이다. 자신의 이름과 생각과 삶을 걸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드렁큰 타이거의 ‘8:45 Heaven'은 타이거 JK의 조모가 임종한 후 그에게 바치려 쓴 애도문이다. 이런 구체적이고 지엽적인 스펙트럼에 걸쳐있는 가사는 힙합이 아닌 다른 음악에선 찾기 힘들 것이다. 내가 힙합에 빨려들어간 이유가 그거다. 부르는 이의 캐릭터가 곧 노래를 구성하는 다채로운 주견의 음악. MC는 사랑 얘기를 할 수도 있고, 힘들었던 개인사를 읖조릴 수도 있고, 가족에 대한 애정, 주변인을 향한 미움, 신나게 놀고픈 충동, 적나라한 성욕, 음악적 신념, 정치적 웅변을 표할 수도 있다. 마치 내밀한 술자리에서 나눌 법한 대화가 가락의 형식에 실려 세상에 발표된다. 자의식이 짙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던 내가 이 음악에 이끌린 건 예정된 우연이었을 것이다. 장르의 리스너들이 아마추어 창작에 도전하고, 그러다 전업 뮤지션으로 데뷔하는 일이 유독 힙합에 심심찮은 것도 그렇다. 창작의 기술적 문턱이 비교적 낮다는 특성 외에도, 자의식과 말하기의 음악이라는 장르적 정체성의 효과일 것이다. 누구나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법이고, 힙합만큼 거기 알맞은 예술적 그릇이 없다.


음악이 품은 근원적 힘은 보편성이다. 어떠한 해석의 노력도 필요없이, 감동적인 선율 한 자락은 상념의 깊은 구멍에 듣는 이를 즉각 빠트린다. 오래 전 즐겨 듣던 유행가는 우리를 그 시절로 거슬러 데려가고, 영어를 알지 못해도 비틀즈 ‘Yesterday'의 애이불비의 정조에 젖어들고 만다. 연인과 헤어진 후 번화가에서 흘러나오는 흔해 빠진 이별 노래 가 내 얘기처럼만 들려 정처 없이 멈춰 선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음악은, 옆으로 선 세모 모양 버튼 하나로, 시간과 공간과 감정을 단숨에 도약하는 가장 강력한 차원 여행 기구다. 이런 보편성은 가사의 주어가 비어있기 때문에 증폭되는 것일 수 있지만, 주어가 꽉 찬 힙합은 개별성에서 보편성으로 건너가는 기적 같은 조우의 순간을 빚어낸다. 내가 가본 적 없고 겪은 적 없는 삶을 사는 MC의 이야기는 낯설고 흥미롭다. 내가 사는 일상에 살고 있는 MC의 이야기는 반갑고 친숙하다. 보편성은 그 두 순간 모두에 깃들어 있다.


버벌진트는 자신이 타는 차(’My Audi') 자신이 사는 동네(‘을지로 5가’) 같은 사소한 주제도 손에 잡힐 듯 풀어낸다. 한편 자신이 다른 MC, 리스너 보다 음악적으로 우월한 존재라고 집요하게 강변한다. 나는 전자엔 친구의 잡담을 듣듯  기울이고, 후자에는 왠지 모를 얄미움을 느낀다. 이렇듯 가사를 매개로 한 명의 가수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은 버벌진트를 넘어선 힙합의 힘이다. 다이나믹 듀오는 20·30대 남자들의 일상을, 그러니까 자신들의 이야기를 친근한 말로 풀며 공감을 준다. 금요일 밤을 맞아 옛 애인에게 문자를 보낼까 망설이는 순간(‘자니’), 20대 후반을 지나 ‘아저씨’가 되어 가는 울적함을 진실 되면서 무겁지 않게 털어 놓는다(‘고백’ ‘청춘’). 늦은 밤 차를 몰고 집으로 갈 때 오디오에 랜덤 재생된 이센스의 ‘독’이 흘러나오곤 한다. 나는 대마초를 피우고 수감생활을 한 적이 없지만, 힘들고 외롭던 시절의 내 마음과 너무도 닮은 진술에 놀라 문득 전율과 격정에 휩싸인다. 나와 다른 삶을 산 이의 고백에서 내 삶과 통하는 이치를 마주할 때, 이 아득한 세상에서 고립돼있지 않다는 안도감을 얻는다. 혼자가 아닌 것이다.


‘스웨거’와 ‘디스’의 시대다. 오늘날 힙합은 확고부동한 메인스트림이 됐다. 그 가사 절대 다수는 돈 자랑, 성질 과시, 남 욕하기다. 이것이 힙합 본래의 코드란 걸 안다. 내가 힙합에 매력을 느낀 이유 하나도 디스였다. 갈등을 미봉하고 위계질서적 통합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과시욕과 적개심을 당당하게 웅변하며 ‘나’를 드러내는 가사는 해방감을 줬다. 그러나 지금 범람하는 가사들에선 공감도 재미도 얻지 못한다. 그 가사들의 주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경연 프로그램의 룰에 따라 파블로프의 개처럼 다른 출연자를 헐뜯고, 이렇다 할 히트곡 하나 없는 래퍼가 <쇼미더머니>가 내게 돈과 명예를 줬다며 으스댄다. 성공과 디스라는 서사 코드가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요는 그 화두들과 각각의 화자가 맺고 있는 개별적 관계다. 그런 개별성이 표현과 소주제를 이루지 않은 채 획일적 양식에 갇혀있다. 그들의 이야기엔 성공에 대한 동기도, 시행착오도 없다. 성공을 했거나 아직 하지 않았거나 상관도 없다. 항상 강하고 화려하고 이미 돈방석에 앉은 상태의 막연한 몸짓만 있다.


대중문화엔 고정된 순수성이 없다는 논리로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발라드 사랑 노래도 하나의 장르가 하나의 가사 양식을 통속화한 사례다. 현재 한국 힙합도 그렇게 이해하면 될까? 하지만 그럴 때 자신이 가사를 쓴다는 힙합의 정체성, 저마다의 자의식으로 부푼 주어들의 개별성은 무뎌질 것이다. 내가 그 많은 <쇼미더머니> <언프리티랩스타> 음원을 들으며 드는 생각도 그렇다. 돈 얘기, 디스 랩, 성공의 과시, 다 좋다. 그게 과연 자기 이야기일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긴 할까? 어딘가에서 들은 남의 얘기가 멋있어 보여 따라하는 건 아니고?


음악의 힘이 보편성이라고 말했다. 경쟁과 성공의 체제에서 나고 자란 젊은 세대가 스웨거의 음악, 힙합에 이끌린다는 사회학적 분석도 있는 모양이다. 내 귀에는 이런 레파토리가 미심쩍기만 하다. 0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입시교육을 통과한 세대는 성공에 대한 열정을 품고 경쟁을 즐긴다기보다, 성공이란 가치를 강요당하며 경쟁에 넉다운당한 세대다. 지난 20년 간 계층 이동성이 단절되며 보통 사람들이 성공할 가능성도 희박해졌다. 더 이상 사람들은 내 삶이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에겐 성공의 경험보다 실패의 경험이 가깝다. 많은 한국 MC는 지금-여기에 없고, 자신들의 것도 아닌 이야기를 생산한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자랑하는 억지스럽고 틀에 박힌 꾸며낸 태도. 이것이 <쇼미더머니>에 열광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사람에게 한국 힙합이 허세라며 빈축을 사는 이유는 아닐까.


이미 성공한 자의 자기 과시 뿐 아니라, 왜 성공을 원하는지, 성공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 과정에서 겪고 있는 고민과 좌절은 무엇인지, 성공 외에 다른 하고 싶은 말은 없는 것인지, 우리 일상의 무수한 풍경을 듣고 싶다. 그럴 때 한국 상업힙합은 개별성의 마법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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