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넛 인물 비평
1.
얼마 전 블랙넛에 관해 자세히 알게 됐습니다. 원래 이런 래퍼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힙플 자녹게에서 김콤비로 활동한 이력도 알고 있었고요. MC 기형아 시절부터 커리어를 따라잡지 못했는데, 쇼미더머니4에 출연해 이런저런 스캔들을 빚었단 소식을 들었죠. 작년 초 'indigo child'에 참여하며 선정적 가사로 또 한 번 논란이 된 것도 접했습니다. 그 이상 그의 노래를 듣지 않았는데, 우연한 계기로 전곡을 찾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블랙넛에 관해 생각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그가 어떤 이슈에 연관된 적은 없지만, 그가 지닌 캐릭터와 스탠스가 한국 힙합 씬의 중요한 의제를 건드린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블랙넛의 음악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블랙넛은 ‘일베 래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가사가 출중했습니다. 보통 리스너들이 평가하는 깊은 가사와는 전혀 다르지만, 표현이 뒤통수를 치고 주제를 포착하고 접근하는 각도가 참신했습니다. 특히 '배치기'는 나름의 서정성과 특유의 재치를 조합해 러브 스토리를 색다르게 풀어가는 방식이 압권이었습니다. 많은 10·20대가 현실에서 겪을 법한 소심한 짝사랑을 실감 나고 디테일하게 풀었더군요. ‘가가 라이브’도 인상적이었어요. 디씨와 라이브 채팅이라는 인터넷 문화를 마치 한 편의 토막극 같은 이야기로 꾸몄더군요. 이 두 노래는 블랙넛이 지닌 호소력을 설명해줍니다. 블랙넛의 노래가 품은 정서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조’입니다. ‘모솔’(블랙넛의 표현으로는 ‘아다’)에 키 작고 못생기고 사회성 없는 백수 신세에 인터넷 쓰레기장에서 뒹굴며 패드립이나 치는 ‘잉여’의 감수성 말입니다. 블랙넛은 이 정서를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캐릭터화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블랙넛은 한국 힙합은 물론 힙합이란 장르 음악의 역사 안에서도 희소한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어요. 세상의 모든 힙합 트랙은 “내 남근이 이만큼 크다”라고 과시하는 노래입니다. 내가 더 잘 나간다, 내가 더 여자 많이 만난다, 내가 더 멋지다. 반면 블랙넛의 힙합은 “내 남근이 이렇게 초라하다”라고 스스로를 풍자하는 노래입니다. 이런 자조의 정서는 설령 블랙넛이 스웨거 가사와 욕설로 점철된 가사를 쓸 때라도 그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 오기와 열등감에 기인한, 그것의 반동으로 인한 자기 과시를 연출합니다. 이런 특징을 집약하는 것이 그의 데뷔곡 ‘빈지노’입니다. ‘멋진 남근을 가진 스타 MC처럼 되고 싶은 나’의 열등감을 컬트적 언어 묘사로 그려냈지요. 더 콰이엇의 기성곡 비트를 가져다 쓰고 내레이션 부분의 믹싱을 조악하게 하며 자녹게 출신 MC의 정체성과 그것이 품은 결핍감을 은연중에 노정했고요. 이건 동시대 한국사회 젊은이들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청춘이란 낱말의 푸르른 이미지는 너덜 해진 지 오래입니다. 청년 실업난과 불안정 노동, 높은 부동산 가격은 10년이 넘은 해묵은 난제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가정을 꾸리고 내 집을 장만하며 어엿한 ‘남근’으로 자립하는 건 요원한 미션이 되었습니다. 성비 불균형 현상으로 인해, 현재 20대 남성의 10% 이상이 짝을 찾을 수 없는 잉여 남성이죠. 이런 연애/결혼난, 경제난이 화학 작용해 태어난 것이 데이트 비용을 더치페이하지 않고 어장관리로 날 농락하는 ‘김치녀’에 대한 증오입니다. 이런 루저 정서, 그러니까 ‘아다’ 정서가 출현하는 곳이 동년배 남성들의 말과 의식을 연결해주는 인터넷입니다. 블랙넛은 동년배 남성들의 분노와 열패감을 일베와 디씨의 인터넷 하위문화 코드를 통해 음악적 캐릭터로 형상화한 케이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리얼하고 현실의 보편성과 밀착된 MC인 셈이지요. 아마도 이 점이 블랙넛이 적지 않은 20대 남성에게 지지를 받는 이유가 아닐까 해요.
블랙넛은 장르적 로컬라이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흔치않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힙합 특유의 남성적 서사의 원천은 힙합이 태동한 발상지, 게토입니다. 범죄와 마약, 가난의 소굴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 누가 더 힘들고 위험하고 준법을 거역하는 삶을 살았는지 증명하며 남근의 크기를 겨루는 것이지요. 여기에 쓰이는 장치가 스트릿 크레드(street credibility), 거리에서의 명성입니다. 치안 상태가 촘촘하여 게토 같은 빈민가-범법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스트릿 크레드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범죄와 전과 이력을 댈 수 없으니까 막연한 수사법으로 남자다움을 자랑하는 가사적 관습이 자리 잡은 겁니다. 그러다보니 스윙스처럼 ‘센 캐릭터’의 진정성을 설득하려고 학창시절 일진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다니는 촌극이 벌어집니다. ‘모솔’에 ‘아싸’를 자처하며 남근의 강력함이 아니라 남근의 왜소함을 구술하는 블랙넛은 이런 로컬라이징의 난관을 손쉽게 우회하는 셈입니다. 사우스 브롱크스가 아니라 인터넷 동호회를 발상지로 삼고, 믹스테잎 배포와 MC들의 교류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루어진 지역적 실정 또한 자녹게 출신에 인터넷 하위문화를 재현하는 블랙넛의 캐릭터와 잘 맞아떨어지지요. 블랙넛은 자신을 에미넴에 비견하고는 하는데, 사실은 적절한 비유입니다. 인종적 정체성이 배타적이고 인종적 권력관계가 물구나무 선 채 작동하는 블랙뮤직 커뮤니티에서, 백인은 음악적·남근적 자격을 인준받지 못하는 '소수인종'입니다. 라킴의 말처럼 나스가 거리에서 자라나 거리의 이야기를 한다면 에미넴은 그와 다른 성장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거리에서의 삶을 술회할 수도 거리의 형제들을 호명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에미넴은 이혼한 부인과 자신의 어머니, 온갖 유명 인사를 마구잡이로 저격하고 스스로를 백인 쓰레기라 칭합니다. 스트릿 크레드를 획득할 수 없는 태생적 조건을 미치광이 광대 캐릭터로 돌파했다고 해석할 수 있죠. 마찬가지로, 한국의 지역적 조건 아래 현실에 밀착된 방식으로 남성성이란 화두를 추구하면 갱스터와 마약상이 아니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인정투쟁을 벌이는 ‘아다’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블랙넛의 노래를 이렇게만 정리할 순 없습니다. 그가 동년배들의 자조적 정서를 그리거나 인터넷 하위문화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윤리적 기준을 월장하기 때문입니다. ‘8만원’과 ‘배치기’ ‘가가 라이브’가 일베/디씨 코드의 순화되고 센티한 판본이라면, 나머지 노래들은 그 문화 안에 농축된 혐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노출합니다. 주지해야 할 사실은 그가 패드립과 쌍욕을 뱉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건 아니란 점입니다. 그는 사회적 맥락과 윤리적 성격으로 인해 함부로 다루어선 곤란한 대상을 모욕합니다. 논란이 된 ‘indigo child’에서 '김치녀'라는 한국 여성 혐오표현을 썼고, 키디비의 실명을 거론하며 “나는 니 사진을 보며 마스터베이션을 했다”라고 말했지요. 'higher than e-sens'에서는 자신이 힙합 거목 타이거 JK보다 대단한 존재라고 뽐내는 비유를 쓰려고 윤미래를 성적으로 모욕했습니다. “네가 진짜 걱정하는 건 추락하는 니 위치지 아니잖아 세월호의 진실”이란 가사도 그렇습니다. 블랙넛이 소속된 JM 사장 스윙스도 그렇고, 많은 장르 팬이 세월호가 아니라 MC 메타를 디스 하는 가사라고 두둔하는 걸 보았는데요.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가사 안에 그런 맥락이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어를 비우고 디스 한다면 MC 메타를 넘어 세월호를 애도하는 모든 사람의 위선을 잠재적으로 겨냥하는 효과가 일어납니다. 다른 모든 걸 떠나, 고작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비방하기 위해 무수한 인명이 희생된 재난 사고를 함부로 들먹이는 건 경솔한 태도죠. 저 가사를 세월호 유족들이 들었을 때 심기가 편할 수 없다는 건 자명하지 않습니까. 이 가사들의 문제는 현실의 누군가에게 구체적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점이 본토 힙합에서도 사회적 약자, 동성애자와 여성에 대한 혐오 표현이 성찰의 대상이 되곤 하는 이유이고요. ‘펀치라인 애비2’는 듣고 있자니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더군요. 끊임없는 육두문자의 향연 속에, 여성의 성기를 멸칭으로 거론하고 내 ‘곤조’와 재치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성의 성을 능욕합니다. 'MC 기형아' 시절 발표한 노래들은 차마 찾아들을 엄두가 나지 않아 그만뒀습니다.
2.
앞서 블랙넛의 ‘자조의 정서’가 품은 호소력을 길게 설명했습니다만, 그가 같은 입으로 쏟아내는 ‘혐오의 정서’는 그것과 결코 별개가 아닙니다. 디씨/일베 문화에 깔려있는 혐오 코드의 본질은 내가 약하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우거나,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나보다 약한 자를 짓뭉개고, 내 삶의 불만족스러움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거나, 타인에 대한 혐오를 자기 연민으로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사회가 어려워질수록 약자에 대한 폭력이 만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김치녀’ 같은 혐오표현도 연애와 결혼이 어려워진 사회 현실을 반영하며 나타났다는 사회학적 분석이 통설이지요. 블랙넛이 동시대 젊은이들의 현실을 대변한다고 할 때, 그건 그 자체로 가치가 있거나 정당한 일이 아닙니다. 그가 어떤 종류의 시대상을 대변하고 있는지, 그것을 필터 없이 옮겨 뱉는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 평가가 필요하지요. 블랙넛에 대한 여론은 중간 지대 없이 두 패로 갈려 있는데요. 일베 래퍼라며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에게 온정적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 남성들과 힙합 장르 팬들이 후자에 해당하는 것 같아요. 힙합 커뮤니티 게시판의 지난 여론 등을 찾아본 결과, 블랙넛을 옹호하는 논리는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예술 혹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이고요, 하나는 ‘블랙넛은 우리가 사는 현실을 말할 뿐이다’입니다. 더 자세히 나누면 1) 에미넴은 잘 들으면서 왜 블랙넛은 욕하냐 2) 영화의 폭력성은 비난하지 않으면서 왜 음악에는 까다롭게 구냐 3) 블랙넛의 혐오표현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다 4) 블랙넛은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꺼내는 용기 있는 MC다 입니다.
1) “힙합은 원래 그런 음악이다”라고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 마약과 범죄와 폭력을 다루는 불온한 장르라는 거지요. 에미넴의 가사는 블랙넛 보다 더 하다는 말도 틀리지 않습니다. 에미넴은 ‘slim shady’ 앨범부터 전 부인을 살해하는 가사로 끔찍한 상상력을 발휘했죠. 그런데 에미넴이라고 비난을 듣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의 가사에 실린 여성혐오는 데뷔 이후 꾸준하게 질타당했고, 위험 수위에 이른 ‘디스 가사’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가령 ‘Encore’에 실린 ‘Just Lose It’의 가사와 뮤직 비디오에서 마이클 잭슨에 관한 세간의 구설수를 인용해 그를 신랄하게 조롱했지요. 여기에 대해 마이클 잭슨 본인과 그의 팬들, 스티비 원더 같은 가수까지 부도덕한 모욕이라 항의했습니다. 다들 아시는 힙합 매거진 소스지 사장도 곡 활동을 중단하고 마이클 잭슨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여성은 사회적으로 성희롱과 성폭력에 노출된 열세적 지위에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 같은 남성 셀렙이 아닌 키디비와 윤미래 같은 여성 가수에 대한 모욕은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블랙넛은 ‘indigo child’를 향한 여론의 비난에 응답한 ‘part 2’에서, “black music은 좋은데 black’s music은 싫대”라고 했습니다. 장르의 관습을 밀고 나갈 뿐인 자신에 관한 이중 잣대를 꼬집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리에 맞는 항변이 아닙니다. 장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념이고, 개별 작품의 장르에 대한 자의식과 성찰 의식, 장르 소비자의 피드백이 변화를 추동하는 경우는 흔합니다. 힙합이 사회 위에 있는 예술이 아니라 사회 속에 있는 예술인 이상, 자신의 관습에 잘못된 점이 있다면 고쳐나가는 것이 한 과제겠지요. 블랙 뮤직의 장구한 역사를 보았을 때, 여성혐오가 장르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도 아닙니다. 90년대에 등장한 소위 네오 소울은 힙합의 남성 우월주의에 대해 성정치에 입각한 음악적 비평을 개진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가령 인디아 아리의 ‘video’는, 남성 래퍼를 꾸미는 배경으로 여자들의 헐벗은 몸을 전시하는 힙합 MV의 클리셰에 대해 “나는 당신이 비디오에서 보던 여자들과 달라”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2) 블랙넛의 콘텐츠를 담은 유튜브 영상 댓글창을 보면 이런 의견이 많습니다. “‘졸업앨범’을 왜 그렇게 욕하는 거냐. 악마를 보았다 같은 영화를 봐라. 그런 영화들의 폭력성이 더 심각하지 않느냐.” 악마를 보았다는 개봉 당시 목적의식이 보이지 않는 황폐한 폭력성으로 평단에서 비판이 제기된 영화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작년에 개봉한 귀향은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인데, 피해자들이 당한 성적 착취를 선정적 볼거리로 전시했다는 논란에 직면했습니다. 이 또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제기되는 비판이지요. 영화 이론에 관해 조금만 견문이 있다면 영화란 매체에서 ‘재현의 윤리’가 얼마나 첨예하고 중요한 의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영화는 이야기를 시각화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폭력이란 의제가 한층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각각의 예술이 품은 자질에 따라 윤리적 원칙에 대한 책임이 강조된다는 뜻입니다. 영화는 극장과 집처럼 고정된 장소에서 감상하기 마련이지만, 음악은 언제나 들을 수 있고 어디서나 울려 퍼집니다. 그만큼 전파력이 강한 예술이므로, 메시지를 넓게 퍼트릴 수 있고 시대의 공기를 즉각적으로 반영합니다. 예술에는 표현의 자유가 주어지지만 자신의 표현에 피드백을 받는 방식으로 표현을 책임질 것이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악마를 보았다 같은 영화를 정부에서 가위질하거나 개봉을 금지한다면, ‘검열’로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리뷰와 비평, 여론 같은 또 다른 표현의 자유로 견제하는 건 어디까지나 정당합니다. 예술의 수준과 품격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지요. 영화 평단 같은 경우 이런 비평 담론이 오래전부터 활성화됐고 양질의 논의가 축적돼 있습니다. 블랙넛의 음악을 영화와 비교했을 때 문제 되는 것이 있다면, 한국 음악계에는 이런 쟁점에 관해 제대로 된 비판이 부족할뿐더러 음악 팬들이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논의의 진행을 막을 만큼 담론의 질이 낮다는 것뿐입니다.
3) 힙합 LE 게시판에서 “블랙넛을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음악에 일베식 혐오 코드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블랙넛 혼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 아니냐.”는 글을 읽었습니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저 혼자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를 사는 개인들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개인은 사회에 의해 영향을 받는 존재이지만, 그 나름의 판단과 행동으로 사회 문제를 가중하는 데 몫을 보태기도 합니다. 만약 힙합 LE에 잠입해서 세월호 유족을 모욕하는 글과 ‘홍어’라는 말을 쓰며 분란을 일으키는 일베 유저가 있다고 합시다. 문제는 그 사람 개인이 아니라 일베를 낳은 세상이니까 여러분은 그 유저를 못 본 체 할 수 있나요? 블랙넛은 일개 네티즌이 아니라 자신의 노래를 세상에 발표하는 창작자입니다. 이제는 행사장에 빈번하게 초대받는 유명 가수이지요. 이런 특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노래가 지닐 수 있는 영향력에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4) 블랙넛에 관한 옹호 중에 가장 난감한 건 그를 “용감하고” “진솔하다”라고 높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블랙넛은 ‘indigo child’에서 “너넨 이런 말 못 하지, 그저 숨기려고만 하지”라고 말하는데, 자신의 가사를 위선을 깨트리는 당당함 쯤으로 이해하는 모양입니다. 스윙스 또한 블랙넛은 남들이 말하지 않는 자신의 치부까지 까발리는 진정성 있는 래퍼라며 추켜세웠지요. 한심하고 어리석은 소견입니다. 사람들 시선과 평판 같은 압력을 무릅쓰고 있는 그대로 의중을 말하는 것이 용감한 행동일 때가 있습니다. 가령 불이익을 감수하고 공익을 위해 진실과 소신을 밝힌다면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논란에 오르는 블랙넛의 말은 어둡고 추한 말입니다. 그런 말을 뱉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수는 있습니다. 어떤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는 행동이고 사람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이건 두렵기 만한 게 아니라 짜릿한 일이죠. 누구나 말하고 싶다는 욕망이 뱃속에서 끓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주장을 드러내길 원하죠. 그것들을 하나씩 차례로 다 뱉었을 때 마음의 대장에 들러붙어 남는 찌꺼기가 저런 추한 생각입니다. 말은, 내가 말하는 순간에도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말은 듣는 사람에게 가닿아 그의 내면과 부딪힙니다. 서로에게 상처와 모욕을 주려고 작정할 때 말은 어떤 무기와 연장 못지않은 흉기가 되지요. 사람들이 함부로 말을 뱉지 못하는 건 말의 폭력을 규제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내면화하는 도덕과 윤리의 효과입니다. 이런 사회적 금기를 짓뭉개고 막말을 일삼을 때 얻는 짜릿함이 배설의 쾌감입니다. 게다가 그런 게 재미있다며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블랙넛이 일베와 디씨의 정서를 공유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영웅시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엇이 용기 있다는 말입니까?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마음의 아랫도리를 벗어젖히는 노출증일 따름입니다. 그게 용기라면 지금 한국에서 가장 용감한 집단은 어버이연합이고 세계에서 가장 용기 있는 정치인은 트럼프겠지요. 누구라도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천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치녀의 젖’ 같은 말을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건 망설여질 겁니다. 그건 위선도 아니고 비겁함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화 과정을 거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망설임이고, 그것이 자연스럽고 솔직한 반응입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보란 듯이 내뱉는 건 억지스러운 위악이고 관심과 이목을 끌기 위해 계산된 기행입니다.
3.
제가 어릴 적 다툼을 벌이고 들어올 때마다 부모님이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너보다 힘이 센 아이였냐 약한 아이였냐, 너보다 약한 사람과 싸우는 건 괴롭힘이다, 싸움은 항상 너보다 강한 사람과 해야 한다”라고요. 저는 지금도 이 말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래로 주먹을 휘두르지 마라”는 온갖 풍자와 조롱을 연구하는 미국 스탠딩 코미디 업계의 불문율입니다.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항의할 권력 자원을 충분히 소지하고 있지 못합니다. ‘표현의 권력’을 가진 예술가들이 아픔에 빠진 사람들, 불평등한 지위에 놓인 사람들을 겨냥하는 건 비겁합니다. 블랙넛의 디스코그래피를 훑어보면 이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놓은 노래들은 비교적 수위가 통제되어 있습니다만, 최근작으로 갈수록 표현이 흉악해집니다.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알려야 하는 입장에서 쇼미더머니 출연 등을 거치며 유명세와 지지층을 방패막이로 얻은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저는 블랙넛에게 적절한 비판을 가하는 게 중요다고 생각합니다. 장르 아티스트들의 지지기반을 이루고 활발하게 피드백을 제기하는 장르 팬들도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블랙넛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쇼미더머니4 심사 번복 영상도 보게 됐습니다. 산이와 버벌진트의 면전에서 삿대질을 하며 논리 정연하게 디스 하는 블랙넛의 모습에 감탄했습니다. 보고 있는 저까지 통쾌한 기분이 들더군요. 대부분의 사람은 억울한 처사를 당하고도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 사람이 나보다 높은 사람이라서 할 말을 삭히기 일쑤니까요. 저는 그 모습을 보고 블랙넛이 결코 숫기 없고 소심한 인물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저 상황이 저에게 통렬한 감흥을 안겨 준 건 나 보다 강한 상대에게 꽂은 말의 일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것 저것 다 '좆 까고' 할 말은 하는 힙합의 IDGF 정신의 진수라고 생각합니다. 블랙넛이 자신의 강단과 ‘곤조’를 유익한 방향으로 발휘한다면 좋겠습니다. 재치를 잃지 않으면서 윤리도 포기하지 않는 선을 영리하게 찾길 바랍니다. 어둠을 들여다보는 것은 예술이 지닌 특권입니다. 하지만 어두움에 사로 잡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이끄는 것이야 말로 예술이 선사할 수 있는 진정한 감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배치기’ 같은 노래를 들으며 그런 공감과 위로의 힘을 맛보았겠지요. MC는 세상을 향해 말을 퍼트리는 직업입니다. 그 행위가 지닌 가능성과 무거움을 자각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