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윤발의 고향, 라마섬
홍콩에서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한 달 차이를 두고 한국으로 돌아왔었다. 친구는 나와 달리 한국에서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홍콩의 하늘길이 뚫린 지금 홍콩으로 출장을 가 있다. 출장 간 친구와 홍콩에 남아있는 사랑하는 친구들이 만나 핫팟을 먹고, 마작을 치고, 펍에서 월드컵 경기를 함께하는 사진들을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지켜보자니 다시 홍콩 생각이 많이 난다.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타오르는데 마음 대신 오래간만에 홍콩 포스트를 써보려고 한다.
홍콩 배우 중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느냐면 그건 아마 장국영일 것이고, 누가 제일 애틋하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마 장국영일 것이고, 누구의 눈빛이 제일 아련하냐고 물으면 양조위일 것이고, 누가 제일 멋있느냐고 물으면 그건 당연히 주윤발일 것이다. 홍콩은 땅덩이 자체가 좁아서 그런지 연예인을 마주칠 확률이 생각보다 높았다. 나도 홍콩인 친구와 돌아다니다 보면 몇 번씩 친구들이 '저 사람 유명한 연예인이야' 라며 알려준 적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명성대비 가장 마주칠 확률이 높은 사람이 바로 주윤발일 것이다. 주윤발은 소문에 구룡반도 동쪽의 카이탁에 살고 있다고 한다. 카이탁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비행기 조종사들이 가장 기피한다는, 전 세계에서 비행기 착륙이 가장 어려운 카이탁 공항이 있던 곳이 공항이 없어지고 주거 단지로 새 빌딩들이 많이 올라가고 있는 곳이다. 주윤발이 홍콩의 유명한 부촌인 리펄스베이나 피크, 구룡반도의 부촌 등이 아닌 카이탁에 산다고 해서도 좀 의외였는데, 주윤발은 실제로 소박한 생활방식으로 유명하다. 매일 새벽 하이킹을 다니고 홍콩 지하철인 MTR을 타고 로컬 단골 음식점에 자주 출몰하여 산에서나 MTR에서 자주 목격된다고 한다. 나도 지하철을 탈 때마다 은근 주윤발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였지만 아쉽게도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은 없었다. 8000억이 넘는 전재산을 기부하고,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 어디서든 팬들과 사진도 잘 찍어주는 성품과 같은 그와 관련한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면모들은 영웅본색에서 인상 쓰고 배를 돌리던 마지막 장면을 되돌아보는 내 심장을 더 아래로 쿵하고 깊이 자유낙하하게 만든다.
그런 멋있는 사람, 주윤발의 고향이 바로 라마섬이다. 라마섬은 홍콩섬 남쪽의 꽤 커다란 섬이다. 라마섬은 광동어로 南丫島로 표기한다. 광동어로 지명들을 배울 때 보니 큰 섬들은 우리나라처럼 섬 '도'(島) 자로 표기하고 작은 섬들은 지난 글에서 소개한 펭차우처럼 섬 '주'(洲) 자를 쓰는 것 같았다. 홍콩섬(香港島)과 라마섬(南丫島)은 섬 '도'자를 쓰고 나머지 펭차우, 청차우, 텅렁차우, 압레이차우 등 작은 섬들은 다 섬 '주'자를 쓰고 있었다. 그만큼 홍콩 안에서는 꽤 큰 섬인데, 크기는 13.55km2로 여의도 면적의 딱 3배 정도 크기이다. 홍콩섬에서 라마섬에 가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센트럴에 있는 스타페리 피어나 홍콩섬 남쪽의 애버딘 피어에서 페리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 두 피어에서 모두 얼추 30분 정도면 라마섬에 도착할 수 있다. 홍콩의 좋은 점은 30분 내외로 페리를 타면 여러 섬들로 데이투어를 다닐 수 있다는 점이다. 주말에 게으름을 조금만 걷어치우면 당일치기 하이킹을 다녀오고도 살짝 시간이 남을 정도이다.
라마섬은 북쪽과 남쪽의 매력이 다르다. 북쪽의 Yung Shue Wan Pier로 도착할 경우 라마섬의 젊은 힙함을 접할 수 있고, 남쪽에는 아름답고 한적한 해변들이 있다. 에어비앤비에서 며칠 지내며 여유로운 여름휴가를 보낼 수도 있겠지만, 당일치기 여행을 간다면 북쪽 또는 남쪽 중 한 곳을 선택해서 가는 것을 추천한다. 하루에 섬 전체를 돌기엔 여유로운 라마섬의 바이브에 벗어나는 느낌이랄까. 라마섬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애버딘에서 라마섬의 남쪽 항구인 Mo Tat Pier로 들어가는 쪽을 선택했다. 애버딘에서 출발할 경우 라마섬의 Mo Tat Pier - Sok Kwu Wan Pier 두 군데 항구에 내릴 수 있는데, 해변들을 둘러보기엔 Mo Tat Pier에서 내리는 것이 더 가깝다. 돌아갈 때는 좀 더 큰 항구인 Sok Kwu Wan Pier에서 타면 된다. Mo Tat Pier에서 페리에서 내리면 바로 Mo Tat beach 가 나타난다. Mo Tat에서도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지만 하이킹 트랙을 따라 걷다 보면 더 아름다운 해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을 외치며 해변 바로 앞의 섬가족까페라는 이름의 Chau Family's Cafe에서 라면 한 그릇 하는 게 좋겠다.
홍콩에는 근본 없어 보이는 음식들이 꽤 있는데 주로 홍콩 로컬 음식점인 차찬탱들에서 판다. 그 예로 라면에 햄과 계란후라이를 올린다던가 마카로니스프에 또 햄과 계란후라이를 올린다던가 홍차와 커피를 섞은 똥윤영 같은 것들이다. 이 메뉴들을 처음 보고나선 음식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라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섬마다 있는 작은 로컬 음식점들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순간 스팸과 계란후라이가 올라간 라면을 처음 접하고 나선 나의 음식 편견을 반성했다. 맵지 않은 감칠맛 가득한 라면에 햄과 계란후라이는 꽤 괜찮은 조합이었던 것이다. 이 라면은 신기하게도 작은 섬 여행마다 해변 근처의 작은 로컬 식당들 마다 파는 메뉴였고, 섬마다 특산물에 따라 김과 같은 해조류가 추가되는 등 배리에이션이 있어서 섬마다 시도해 보는 재미도 있었다.
라마섬의 Chau Family's Cafe에서 라면 한 그릇 때리고 바다로 내려오면 Shek Pai Wan Beach에 도착한다. Shek Pai Wan Beach부터 Yung Shue Ha Beach까지의 살짝 바다가 들어와 있는 만은 홍콩에서 본 중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에 하나다. 깨끗하고 푸른 바다와 백사장, 왠지 올라가고 싶은 커다란 바위들, 주말임에도 적은 인구밀도(홍콩에서 매우 어려운 일이다)까지, 날씨 좋은 날엔 오후 내내 해수욕을 해도 좋을 곳이다. 잠시 바닷가에서 정신 놓고 즐기고 난 후엔 약간의 하이킹이 기다리고 있다. Tung O를 거쳐 Lamma Island Family Walk를 따라 걷다 보면 홍콩의 산마다 있는 정자에 도착한다. 홍콩의 하이킹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디서든 내려다보면 한려해상국립공원이라는 점이다. 라마섬의 이 야트막한 산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도 너무나 아름답다. 그렇게 내려와서 Sok Kwu Wan Pier 앞의 몇 개의 해산물 식당 중 한 군데를 골라 저녁을 먹거나 보통 항구 앞 식당에서는 호구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호구들은 페리를 타고 돌아와 홍콩섬 맛집에서 저녁을 먹는 것도 괜찮다. 어차피 페리는 30분만 타면 되니까.
라마섬의 힙을 느끼고 싶다면 북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홍콩의 복잡함에 질린 서양 힙스터들의 대부분은 라마섬에 산다. 생각해보면 서울과 도쿄, 상하이, 홍콩과 같은 대도시는 서양에는 잘 없어서, 내가 만난 홍콩에 사는 서양인들은 홍콩의 도시도시함에 열광하거나 질려했다. 대도시에 기가 빨려버린 서양인들은 섬의 구석으로 들어가는데 히피들은 신기하게도 늘 라마섬으로 향했다(일부는 펭차우). 센트럴의 스타페리 피어에서 페리를 타면 라마섬 북쪽의 Yung Shue Wan Pier에 도착한다. 여기부터 라마섬 경찰서까지 해변을 따라 몇 블록 사이에 맛집과 소품샵, 까페들이 가득하다. 그중에 제일 기억나는 곳은 라마섬 티셔츠를 파는 무인샵 Mush Store이다. I love Hong Kong 수준의 천편일률 티셔츠와 전혀 다른 힙한 디자인의 티셔츠들이 가득해서 같이 간 친구들의 지갑이 한꺼번에 열리는 순간을 목격했었다. 그곳의 주윤발 얼굴 스티커는 한동안 내 맥북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라마섬 북쪽의 음식점은 구경하다 마음에 드는 데로 들어가면 된다. 어디든 평타는 칠 것 같은 곳들이 즐비하다. 로컬 음식점에서 해산물을 먹어도 될 것이고 멕시칸도, 피자도, 인디안도 그 어떤 것을 먹어도 분위기 만으로 평타는 친다. 음식점 외에 추천하고 싶은 곳은 두부디저트 좌판이다. 홍콩의 로컬 디저트 중에는 순두부에 설탕을 올려 먹는 음식이 있다. 두부는 따뜻하게나 차갑게,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차가운 버전을 더 좋아했다. 차가운 두부에 식당마다 다른 설탕을 얹어 먹으면 건강한 푸딩을 먹는 느낌이 든다. 라마섬 트래킹 길 중간의 Tofu Garden 은 홍콩사람들이 라마섬에 갈 때마다 꼭 먹고 온다는 두부 디저트집이다.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에서 1인 1 두부하고 나면 하이킹에 대비한 단백질 장전이다. Lamma Island Lookout Pavilon을 거쳐 Kamikaze Cave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당최 모르겠다)로 향하는 하이킹은 남쪽 하이킹보다는 조금 더 힘들었던 기억이다. 라마섬에서 모두가 없애고 싶어하는 세 기둥(가보면 뭔지 안다)을 제외하고는 트래킹 길도 아름답고 탁 트인 바다에 속이 다 시원하다. 라마섬에서 나올 때는 Sok Kwu Wan Pier에서 센트럴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다시 라마섬에 간다면 에어비앤비에서 며칠 머물고 싶다. 날씨 좋은 날엔 남쪽 바닷가에서 하루종일 누워있고, 그다음 날씨 좋은 날엔 하이킹 한바탕하고, 그다음 날씨 좋은 날엔 라마섬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차찬탱과 각종 맛집, 까페를 들락거리고 싶다. 아.. 다시 홍콩 살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