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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나 Mar 01. 2023

가깝고도 먼, 위화와 모옌

중국문학 이야기


대한민국과 주변국과의 관계는 얼마나 신기한지. 붙어있는 모든 나라들과의 관계에 '가깝고도 먼'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이 수식어가 왜 이렇게 구태의연하게 느껴지는지 생각했더니 '가깝고도 먼'은 우리에겐 흔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중국, 북한, 일본 - 그 어느 나라라도 가깝고 친밀하게 느껴지는 나라가 있는가.


그나마 가장 가까워진 나라가 일본일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매 학년마다 신기하게도 반에서 두세 명씩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반 구성원을 분류해 볼 때, 소수지만 항상 존재했던 친구들이다. 좋아하는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교복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일본식 스타일을 뽐냈던 그 친구들은 김대중 정부에서 막 일본 대중문화 수입정책을 시작하던 시점이라 아직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각트라던가 하이도, 엑스재팬, 스맙, 아라시 등의 가수들의 앨범과 포스터를 어떻게든 구해와서 시디플레이어의 이어폰을 한쪽 씩 나눠 끼워 듣고, 사진들로 필통을 꾸며 들고 다니곤 했다. 음악보다는 드라마가 조금 더 대중적이고 구하기도 수월해서 나도 일본티비라는 대형 인터넷 까페에서 고쿠센, 꽃보다 남자, GTO, 트릭과 같은 일본드라마들을 구해 보곤 했었다. 항상 교훈적이고 살짝은 유치한 일본 드라마들이 중학생이었던 나의 수준에 딱 맞았던 듯하다.  


나머지 두 나라는 아직도 나에게는 낯설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불과 15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나라였을 중국은 우리에게 서양보다 낯선 나라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어디서부터 알아보아야 할지, 한국어나 영어로 된 자료들이 과연 신뢰성이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홍콩에 살았을 때에도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잘 모르겠으나 왠지 무섭고 조심해야 할 것'이었다. 입을 잘못 놀리는 순간 끌려갈 것 같지만, 어디로 끌려가는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는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작년 내내 러시아 문학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빠져 살았다. 작년 초,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었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참 좋았어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악령, 단편집을 읽었고, 나보코프의 롤리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고골의 외투,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다. 1년에 걸쳐 한 나라의 문학을 훑어나가다 보니 각 작가들이 보여준 러시아가 내 안에 어떤 틀을 만들었다. 러시아의 역사와 러시아인들의 생활방식, 태도들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올해는 어떤 나라를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가깝고도 먼, 잘 모르겠지만 호기심이 생기는 중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아Q정전밖에 떠오르지 않는 중국문학 중 어떤 책으로 시작해야 하나 고민이 되어 검색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가들이 생각보다 더 제한적이었다. 위화, 모옌 그리고 옌렌커 정도가 추려졌다. 세 작가 모두 중국 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는 작가였다. 그렇게 해서 위화의 '인생'과 민음사의 모옌의 중단편선을 읽었다. 


위화와 모옌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위화의 인생에서는 소설 전반에 걸쳐 위화가 보여주고 있는 인생에 대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인생의 서문(위화의 '인생'의 서문은 그 어떤 책의 서문보다도 좋았다)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보여주고 싶어 한 인생에 대한 고상함과 낙관적인 태도가 이 장편 소설에 녹아있다. 푸구이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각자의 인생은 모두 고달프고 괴롭다. 한 때, 이렇게 괴로운 인생을 대체 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인지, 신이 있다면 참 고약한 존재일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달픈 인생을 살아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태도가 아닐지, 소설을 통해 배운다. 


모옌(莫言)은 글로만 말하겠다는 그의 필명에서부터 글쓰기에 대한 그의 강한 신념이 드러난다. 그의 소설들은 환각적 리얼리즘으로 불린다. 라틴아메리카의 환상문학보다는 현실에 가까운, 그렇지만 현실과는 또 거리가 있는, 마약에 취해서 현실을 보면 모옌의 작품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들까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들을 그는 써낸다. 필명의 강한 의지처럼 그의 작품은 위화보다 날이 서 있다.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중국외에서 체제순응적 작가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소설은 하나 같이 사회를 고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산아제한,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는 대약진 운동, 민중을 생각하지 않는 허울뿐인 지도계층, 그가 생각한 중국 사회의 모순이 모든 작품에 담겨있었다. 그의 소설 속 극도의 상징들이 환각처럼 그의 사회 비판의 색깔을 흐리게 보이게 해 준 것이 아닌지. 위화가 스토리에 푹 빠져 읽을 수 있게 쉽게 풀어쓴 것과는 달리 모옌은 불친절한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회고발 이면에 그가 정말로 갖고 있는 삶에 대한 태도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역시 장편에서 더 드러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소설은 이상하게 참 닮았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사람과 환경이 같은 것이다. 심지어 옛날의 대한민국과도 닮았다. 사람들은 농경생활을 하고, 농사를 짓는다. 사람들은 가족중심의 생활을 하고, 가족 구성원들의 역할도 참 전통적이다. 남편이 하는 일, 아내가 하는 일, 아들 딸이 해야 하는 일들도 참 낯익다. 그들이 하는 생각, 내리는 판단들, 첫사랑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들이 익숙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들도 우리나라의 전래동화들과 닮았다. 두 작가의 작품들이 대부분 1920-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때의 사람들은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참 닮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나, 미국, 유럽 문학들을 읽을 때는 소설 속 사람들이 사는 환경과 생활방식부터가 낯설어 읽어내는 머릿속이 번거로운데, 중국 소설들은 소설 속 풍경과 사람들을 상상하기가 편안했다. 동북아시아의 나라들은 서로가 참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이상하게 공유하는 공통된 정서가 있다. 몇 천년 전부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자에서 아직 지워지지 못한 채 아직까지도 발현되고 있는 정서. 그래서 해외에 나가면 중국, 일본 친구들과 가장 먼저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지. 


위화와 모옌을 읽고 느낀 그 익숙함과 달리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보는 정말 제한적이었다. 나무위키와 네이버 블로그만으로도 그 양에 압도되어 버리는 다른 정보들과 달리, 중국 문학의 정보는 국내 논문들에서도 제한적이었다. 도대체가 알 수 없었던 모옌의 중편소설 '투명한 빨간 무' 속 '무'의 상징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중국의 포털사이트 바이두까지 뒤져야 했다. 바이두에서 검색된 블로그를 구글번역기를 돌려 읽으며, 위화와 모옌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나의 낯익은 감정과 너무나 배치되는 현실에 기시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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