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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나 Mar 31. 2023

찬란하고 잔인한 4월의 첫날, 장국영을 추억하기

장국영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 홍콩 여행

4월이면 맴도는 T.S 엘리엇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4월의 찬란한 햇볕을 상상하면 늘 두려웠다. 추운 겨울이 지겨워 따뜻한 바람이 그리워 봄을 그리는 3월과 달리 왜 나의 마음은 4월마다 괴로울까. 세상이 연둣빛이 되어가고 꽃도 만개하는 4월이 왜 반갑지 않을까, 달라진 햇볕은 왜 낯설고 부담스러울까. 엘리엇은 시를 통해 4월이 두려운 내 마음을 깨닫게 했다. 생명력을 터뜨리며 찬란해지고 있는 자연과 달리 전혀 찬란하지 않은 나의 삶에 대한 현실직시와 함께 갑자기 화사해져 버린 낯선 조도아래 나도 생명력을 터뜨리듯,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가져다준다. 차라리 계속 춥다면 그 핑계로 가만히 있어도 될 텐데, 변화하는 환경과 내 삶의 부조화를 마주해야 하는 괴로운 마음의 이유를 시를 통해 깨달았다.


그에 더불어, 정확히 20년 전 거짓말처럼 4월의 첫날에 떠나 4월을 더욱 잔인하게 만들어버린 사람, 장국영이 있다. 영화 속에서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만들어버리는 사람. 센트럴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을 지날 때면 한숨을 쉬게 하는 사람. 셩완의 Hollywood road와 Lok Ku road의 골동품 거리의 한 길거리 상점에 늘 자리 잡고 있는 장국영의 사진은 지날 때마다 내 발걸음을 붙잡곤 했었다.


셩완 골동품 거리에 언제나 걸려 있는 장국영 포스터, 다음번엔 한 장 사 와야겠다 싶다.


3월 중순쯤 되기 시작하면 홍콩 여기저기에 장국영을 추모하는 빌딩과 버스의 광고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은 홍콩을 떠나왔지만, 한국에서 맞이할 잔인한 4월을 대비할 겸, 못 다 돌아본 홍콩의 장국영의 자취를 따라가 볼 겸 몇 주 전 홍콩에 다녀왔다.


어릴 때부터 윗세대의 음악과 문화를 동경해 따라다니다 보니 그게 취향이 되어버렸다. 늘 나의 플레이스트엔 7080 음악들이 가득하다. 시대는 고정되어 있지만 이상하게 국적은 넘나 든다. 이상하게 7080 음악은 한국, 홍콩, 일본을 넘나 들어도 듣기 편안하다. 이번 여행은 1년 여만에 떠나온 홍콩을 다시 방문하는 것이다 보니 홍콩 음악들로 플레이리스트를 채워 함께했다. 장국영과 유덕화, 홍콩의 국민밴드 Beyond, 조금은 최신인 2000년대의 my little airport로 꽉 채웠다. 내 플레이리스트를 보던 홍콩친구가 50대 취향이라며 놀려댔다. 어쩌랴, 한결같은 복고취향도 이제 받아들여야 할 나인 것을.


해피밸리의 장국영 위패와 단골집 모정


장국영은 홍콩의 파파라치들 때문에 고생을 해서 그런지 홍콩 여기저기를 옮겨 살았다고 한다. 그의 자취를 찾아보면서 가장 많은 깃발이 찍힌 곳은 해피밸리였다. 그가 해피밸리에 살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가 영국으로 유학 가기 전에 다녔던 학교인 Rosaryhill school과 누나와 조카들과 함께 자주 찾았다는 딤섬집 예만방, 지인들과 자주 찾았다는 이자까야 모정과 그 옆의 작은 바 alabar까지 위치한 해피밸리는 그에게 추억이 많은 곳임에는 분명하다.


해피밸리는 복닥 복닥 한 홍콩섬의 번잡함에서 살짝 비껴져 있는 곳이다. 홍콩에서 이사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결국 이사한 곳인 케네디타운과 함께 최종 후보에 있었던 동네로, 언젠가 한번 꼭 살아보고 싶은 동네이다. 중심가와 멀지 않으면서도 조용하고 여유로운, 마치 우리나라의 서래마을 같은 분위기를 풍긴달까. 홍콩의 강남역과 같은 곳인 코스웨이베이에서 남쪽으로 걷다 보면 누가 영국령 아니었달까 봐 크리켓 클럽이 하나 나온다. 크리켓 클럽을 오른쪽으로 두고 걷다 보면 달리기 좋은 트랙이 있는 운동장이 나타난다. 그 운동장을 오른쪽에 두고 계속 걷다 보면, 커다란 나무들이 중간중간 등장하며 길은 점점 조용해진다. 왼쪽 건너편에 Amigo라는 아름다운 건물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을 지나고 나면, 트램 종점인 해피밸리역에 도착한다. 여기부터 작고 조용한 해피밸리의 골목들이 시작된다.


그의 단골집으로 유명한 딤섬집인 해피밸리의 예만방은 내가 홍콩에 살던 시절에 코로나로 인해 문을 닫았었다. 미리 가봤어야 했는데 참 아쉬웠다. 그 대신 이번엔 그가 자주 방문했다던 이자까야 '모정'에 가보기로 했다. 홍콩에서 누구보다 바쁘게 일하고 있는 두 친구들이 퇴근하기를 기다리며, 먼저 해피밸리를 산책하며 장국영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절인 Tung Lin Kok Yuen(동연각원)에 들렀다. 장국영의 위패는 2층에 모셔져 있다고 들었는데 방문한 날에 절 내부 행사가 있는 것 같아서 올라가 보지는 못하고 1층만 둘러보고 나왔다. 팬들을 위한 위패는 샤틴 쪽에 있다고 하고, 해피밸리의 이 절에는 장국영의 누나가 개인적으로 모신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홍콩에는 거주지에도 심심치 않게 로컬 사람들이 들리는 절들이 위치해 있다. 절들은 주로 산속에 있는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Tung Lin Kok Yuen 2층에 장국영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절에서 나와 다시 해피밸리 초입에 있는 '모정'으로 향했다. 셩완에서 퇴근하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10분 만에 도착한 친구가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고(홍콩이 작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 코스웨이베이에 있는 회사에 2년째 다니고 있는데도 바빠서 해피밸리에 처음 온다는 친구가 길을 잃을까 봐 중간에 친구를 데리고 모정에 들어섰다. 홍콩의 화려한 여타 레스토랑들과 달리 이곳은 정말 동네 사람들이 오는 이자까야의 모습이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식당 안에는 테니스를 치다 온 두 중년 남성이 구석의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고, 누가 봐도 동네 주민인 중년의 커플이 또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자타공인 홍콩덕후인 주성철 영화기자의 홍콩 관련 책을 보고 이곳에 장국영메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것은 기본 메뉴판뿐이었다. 눈빛이 흔들리는 나와 눈이 마주친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 아주머니가 '레슬리?'라 물어보며(장국영의 영어이름은 Leslie Cheung이다), 바로 한국어로 된 장국영 스페셜 메뉴를 내밀었다. 한국인 관광객인 게 티가 났나 보다. 아주머니는 장국영이 평소에 좋아했던 메뉴들을 모아놓은 것이라며 메뉴를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스페셜 메뉴에서 장국영이 가장 좋아했다고 알려지는 메뉴인 쇠고기 감자조림을 포함해서 우엉절임, 참마튀김을 시키고, 간마에 낫또와 두부를 얹어 비벼 먹는 메뉴를 김을 따로 시켜 싸 먹기로 했다. 그리고 스끼야끼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나베에 가까웠던 국물음식까지.


장국영의 단골 이자까야 '모정일본요리'와 장국영스페셜 메뉴


장국영의 단골집이라는 이름 때문에 혹시 여타 관광 맛집처럼 장국영이라는 이름만 내세워놓고 맛은 떨어지는 게 아닐지 걱정했었다. 우려와 반대로 음식 맛이 정말 좋았다. 기본으로 주는 데친 야채나 우엉조림과 같은 기본 반찬부터 맛있어서 기본기가 탄탄한 곳인 것 같았다. 홍콩에 계속 살았다면 나도 단골집으로 만들었을 것 같은 곳이었다. 조용한 분위기와 맛있는 음식, 소박한 분위기가 단골로 다니기에 딱인 곳이었다. 장국영의 소박한 취향에 미소가 지어졌다. 잘 먹고 나오려는데 아까 그 종업원 아주머니가 우리를 붙잡고 어떻게 찾아온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레슬리를 사랑한 기자가 쓴 책에서 보고 찾아왔다고 했다. 이곳엔 장국영의 스크랩북과 그의 친필싸인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다음번에 방문할 땐 안면을 튼 종업원에게 살짝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메뉴이름은 스끼야끼였으나 실제론 소고기나베였던 것


졸지에 나 때문에 장국영 팬 한국 관광객 취급을 받아버린 친구 둘을 데리고 나오며, 바로 옆에 위치한 alabar에도 살짝 구경을 갔다. Alarbar는 밖으로 창문 하나 나있지 않은 곳이었는데, 입구의 커튼을 젖히고 잠깐 들어가 보니 홍콩 중년 여성 손님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공개된 스테이지에서 손님들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바인 것 같았다. 이 바에서 칵테일 한 잔 하고 있는데 장국영이 들어서서 노래를 불러주면 얼마나 황홀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모정과 Alarbar 앞 골목에는 그가 당학덕과 손을 잡고 지나가는 모습이 찍혔던 세븐일레븐도 아직 남아있다. 그 파파라치 사진이 불러왔을 상처에 마음이 씁쓸해지는 곳이다.


장국영과 당학덕의 사진이 찍혔던 세븐일레븐



장국영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전에 살던 마지막 집

 

 장국영이 생전 마지막으로 지냈던 곳은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그가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던 센트럴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이었다. 그 후로 지어진 홍콩의 모든 호텔들은 창문이 열리지 않게 만들어졌다. 호텔에서 지내기 전, 그는 구룡반도의 몽콕 근처의 Kadoorie hill이라는 연립주택이 모여있는 고급주택지에 살았다.


홍콩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중 대학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상대적으로 낮에 여유가 있다. 그 친구들을 불러냈다. 홍콩 느낌 물씬한 미도까페에서 그리웠던 홍콩음료 똥윤영(커피와 홍차를 섞은 음료)과 홍콩식 프렌치토스트를 먹고 몽콕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몽콕은 홍콩의 관광객들의 필수코스인 템플 스트릿 야시장이 있는 곳이다. 워낙 번잡스러운 곳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이 근처에 장국영이 살만한 고급주거지가 있다는 게 의아했지만, 구글지도에 꽂아놓은 초록색 깃발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홍콩의 레트로 느낌으로 꾸며놓아 좋아했던 스타벅스 몽콕지점을 지나 러닝을 하는 서양여성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니 시끄럽던 사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평창동 고급주택을 홍콩의 땅크기에 맞게 축소해 놓은 듯한 연립주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리펄스 베이와 같은 대놓고 럭셔리한 동네가 아닌 구룡반도에 이렇게 조용하고 아름다운 주택지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곳이라면 번화가와도 가까우면서 조용하고 널찍한 집에서 살 수 있겠다며 이 동네를 발견한 것에 즐거워하며 32a 번지를 찾아 걸었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Kadoorie hill 주택지


마침내 찾아낸 장국영이 살던 집, 32a Kadoorie avenue는 장국영이라는 대배우가 살았다기엔 생각보다 소박한 곳이었다. 하얗게 칠한 벽과 나무로 만든 문은 평화롭고 차분했다. 이곳에 살 때의 그의 마음은 이 동네의 분위기처럼 평화로웠을까. 아니면, 그때도 그의 마음은 잔인한 4월처럼 괴로웠을까.


장국영이 살았던 집, 32a Kadoorie avenue


홍콩여행에 앞서 플레이리스트에 담은 노래 중 하나가 장국영의 我(wo)라는 노래다. 개인적으로 만다린버전보다는 광동어로 부른 버전을 더 좋아한다.


I am what I am이라는 첫 가사가 장국영이 직접 쓴 가사임을 알게 한다.


언론과 대중들이 지어내고 만들어낸 자신이 아닌, 그냥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할 때 자꾸 아프다.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서 외부를 차단하면 외로움이 몰려온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가닿으면 사람들은 나를 제 멋대로 판단한다. 그 중심을 잡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인 것 같다. 장국영이 있는 세상에서는 그런 중심 잡기 과제 따위 주어지지 않는 곳이기를. 그곳은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아니 존재할 요구조차 없는 곳이기를 바라본다.


내일은 그가 만다린 오리엔탈의 호텔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 지 20주기가 되는 2023년 4월 1일이다. 매년 4월 즈음에 나는 홍콩에서 만난 친구와 장국영을 추억하곤 한다. 작년엔 동사서독 리마스터링을 보았었는데, 올해는 친구가 해피투게더로 정했다고 연락해 왔다. 잔인한 4월에 Happy together라니. 올해 4월도 시작부터 아이러니하고 혼란스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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