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스캠 사례와 감별법
해외로의 이주를 결정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마지막 애인과의 이별이었다. 그의 정신병의 일부가 나에게도 옮겨왔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불안한 둘이 서로의 불안함이 만들어낸 깔끔함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그러니 시작부터 언젠가는 일어날 파국이었을 것이다. 그와 만나기 시작하고 처음 뮤지컬을 보러 갔던 날, 인터미션 시간에 그가 말했다. 한 동안 영화관이나 공연장에 가지 못했었다고. 어둠이 자신을 덮쳐와서 숨을 쉴 수가 없고 땀이 계속 나서 그 공간 안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럼 두 번째 데이트 때 영화 본 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때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미련 없이 나가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노트르담의 파리 2부를 포기하고 세종문화회관을 나섰다.
그렇게 그의 공황장애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출근하는 길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식은땀이 줄줄 나서 갓길에 차를 대야 할 때도 있었고, 출근해서도 틈이 날 때마다 쉬는 공간에서 누워있어야 했다. 주말까지 일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병원에 가기도 어려웠고, 상담은 거부했다. 의사인 친구를 통해 증상을 설명하고 약만이라도 받아서 약물치료를 시작했는데, 의사라는 직업이 무색하게 정신과 약을 먹는 것에 거부감이 커서 조금이라도 증세가 나아지는 것 같으면 약을 끊어버리곤 했다. 약을 먹다 말다 할 때마다 그의 증세도 오르락내리락했고, 그 증세의 강도는 그대로 우리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중요한 프로젝트의 막바지에서 번아웃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나의 정신건강에도 그대로 영향을 주었다. 결국 각자의 마음의 어둠에서 헤매며 서로를 보듬지 못했던 둘의 관계의 다음수순은 이별이었다.
관계와는 달리 중요한 프로젝트는 결국 잘 마무리되었고, 나는 굳이 한국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참에 다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공간에서 새롭게 시작하자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용기 있는 혈혈단신 해외이주를 생각보다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새로운 공간엔 새로운 인연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잘 모르는 미지의 것에는 항상 잘 몰라서 하는 환상이 피어나기 마련이다.
기대는 항상 실망을 가져오는 법. 어느 정도 적응을 해가는 와중에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했고, 애인은 커녕 친구를 만드는 것도 어려워졌다. 오후 6시 이후에 두 명 이상이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규제가 몇 달째 이어졌고,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것은 내향형 인간인 나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차선책으로 몇몇의 친구들과 집에서의 만남으로 대체하며 인간에 대한 욕망에 링거주사를 맞혀가며 연명한 지 몇 달이지나, 홍콩의 코로나 환자가 몇 주째 0명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오후 6시 두 명 이상 집합금지' 규제도 완화되었고, 드디어 누군가를 만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데이팅 어플을 깔았다. 한국에서는 괜스레 혼자 부끄러워서 깔지 못했던 것을 외국에서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타지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쉽게 생긴다. 말로만 듣던 스와이프를 시작했다. 중화권이라 그런지 홍콩 영화에서만 보던 잘생긴 중화권 미남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보다 많은 매칭에 신기해하며,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나의 위험회피 기질은 그때도 분명 크게 작동하였을 텐데, 나는 두 번의 로맨스 스캠을 당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당할 뻔'이라 다행이다.
첫 번째는 장첸과 같은 외모의 남자였는데, whatsapp 번호를 주고받고 얘기를 시작했다. 자신은 말레이시아 국적이고 츈완에서 supply chain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츈완지역에 사무실이 있는 무역회사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의 취미를 물어보더니, 자기의 취미는 축구, 요리, 로또 사기 정도라고 얘기했다. 그 '사기'가 buying이 아니라 fraud였을 줄이야.
며칠 동안 그는 세상 달콤한 메시지들을 보내며 내 끼니를 걱정해 주었고, 한국인인 나에게 자신이 해먹은 김치볶음밥 요리 사진을 보내주기도 했다. 역시 외국인들은 이렇게 스위트한 건가 생각하며 맞장구를 실컷 쳐가며 4-5일간 연락을 했나 보다. 그가 갑자기 나의 취미를 다시 물어보더니, 자신의 취미인 lottery를 얘기하며 한 번 해보겠냐고 물었다. 싱가포르 lottery로 꽤 수익이 좋다며 자랑하는 얘기를 들어보다가 Maybe next time.이라고 답하자 그는 쿨하게 넘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이상하게도 그는 다시 lottery 이야기를 꺼냈다.
싱가포르 lottery는 어플로 하는 거라 쉬워. 한 번 해봐. 수익이 좋다구.
그래. 나중에 만나게 되면 한 번 보여줘.
왜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 거야?
왜 그렇게 lottery에 집착하는 건데?
사랑하는 사람한테 좋은 걸 나누고 싶은 것뿐이야.
사랑? 너 나 본 적도 없는데 사랑하니?
왜 그러면 안돼?
당당한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 안 보고 사랑할 수 있긴 하지.. 이제는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익률 높은 정보를 틴더에서 만난 사람에게 나누고자 하는 박애주의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주변 친구들에게 틴더에 주식 관련 스캠이 많다고 들었지만, lottery는 정말 낯설었다. 애초에 어플로 복권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다. 결국 나는 구글에 lottery scam을 검색했고, 그것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유행이라는 기사를 찾아내기에 이른다. 고작 4-5일이었지만 그의 달콤한 말들에 위로를 받았던 터라 엄청난 배신감이 들었다. 아직 순수한 틴더유저였던 나는 그에게 장문의 Whatsapp 메시지를 남겼다. 열 줄에 걸쳐, 네가 하는 이런 일이 얼마나 옳지 않은 일인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한 후, lottery scam 기사를 전달하고 그를 block 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한국엔 보이스피싱만 흔하게 들어왔지, 로맨스 스캠이라는 개념은 생소했었다. 데이팅 어플을 통해 주의할 것은 모르는 사람을 인터넷을 통해 만났을 때, 납치, 성폭행, 새우배를 태워서 장기적출까지는 상상해 봤는데 로맨스 스캠이라니, 인간에 대한 불신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렇게 한 동안 틴더 어플은 핸드폰 안의 SNS 폴더의 두 번째 페이지 한 구석에다 처박아 뒀었다. 그러다 또 몇 달 뒤, 틴더에서 만나 결혼까지 골인한 친구의 친구 이야기를 전해 듣고 외로운 타지생활에 희망회로가 다시 가동되더니 결국 데이팅앱 어플을 다시 열었다. 또 그렇게 불행의 서막의 커튼줄을 내가 직접 당겼다. 이번에도 사진이 문제였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존잘남이 매칭되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러웠고, 매너 있어서 의심의 끈이 조금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싱가포르 출신으로 코로나 시기에 가족들 모두와 함께 홍콩의 리펄스베이로 이주했다고 한다. 가족이 보석 판매를 해서 그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그래, 리펄스 베이에 사업하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긴 하지). 속으로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스캠의 추억이 있는 터라 그에게 본격적인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다. 너 같은 사람이 왜 애인이 없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얘기했다(이렇게 다정하고 잘생겼는데). 그는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코로나 때문에 집에 주로 있어서 누굴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에게 마지막 연애에 대해 물었더니 그리고 몇 년 전 정말 사랑했던 여자친구가 암으로 죽어서 몇 년 동안 그 아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여자친구가 암으로 죽였다라.. 약간의 의심이 들긴 했으나, 그의 다정함이 연락을 이어가게 만들었다. 그렇게 존잘남의 다정함에 매료되어 연락을 주고받기를 며칠, 그는 나에게 비트코인을 하냐고 묻기 시작했다...!
비록 계절학기로 들었던 통계학 수업에서, 계절학기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C+을 받았던 나지만, 1) 어플로 연락한 2) 잘생긴 남자가, 3) 매우 다정하며, 4) 여자친구를 암으로 사별한 순정파이며, 5) 비트코인을 하는지 묻는다는 다섯 가지 조건의 교집합이 발생활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저번 lottery scam 때의 충격으로 로맨스 스캠에 대해 검색하며 알아낸 로맨스 스캠을 확인하는 방법에서 배운 팁으로 그에게 비디오콜을 요청했다. 그 매거진에 따르면 보통 비디오 콜을 요청하면 로맨스 스캠의 상대는 갖은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는 것이다.
나 너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비디오 콜 할래?
그는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친절하고 아름다운 미사여구와 함께 다양한 핑계로 비디오콜을 피해 가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매거진 기자 정말 정확하게 기사를 잘 썼구나.. 이번에는 조목조목 따지는 장문의 메시지 따위는 없었다. 그냥 한숨과 함께 블락해 버렸을 뿐.
그렇게 나는 한참 동안 지우기도 아쉬웠던 그의 멋진 사진에 미련을 남긴 채 또 한 번의 데이팅 어플 실패기록을 추가했다. 세상에 홀로 타지생활도 충분히 외로운데, 그 외로움을 이용하는 사기꾼들까지 있구나. 자칫하다간 해외에서도 코베이겠다는 생각에 순간 닭살이 돋았다.
그렇게 한 동안 또 데이팅앱과 멀리하던 중, 데이팅앱을 통해 홍콩에서 가장 친했던 로컬 남사친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외국에서 친구 사귀는 법과 함께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