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취미 발견의 여정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가진 로망 중 하나가 마작이었다. 이 로망은 홍콩영화에서 치파오를 입고 한 손에 위스키잔을 들고(사실 영화에선 거의 찻잔이다, 한창 술쟁이 시절에 만든 로망이라 각색되어 있다), 홍콩의 좁고 살짝은 어두운 거실에서 정사각형 테이블에 마주 앉아 마작을 치는 장면들에서 취사 선택하여 짜깁기한 것인데 - 화양연화에서는 볼 때마다 감탄스러운 장만옥의 아름다운 치파오를 가져왔고, 색계에서는 상대방을 살피는 탕웨이의 눈 빛과 마작을 칠 때 상대방의 패를 가져오며 내는 소리를 가져왔다. 그리고 마작을 치는 장면이 나오는 모든 영화배우들의 마작패를 쌓고, 가져가고, 자기 패를 정리하는 그 유려하고 숙련된 손동작을 갖고 싶었다. 트럼프패도 잘 섞는 맛이 있고, 화투장도 한 장씩 내려치는 맛이 있고, 바둑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바둑알을 끼고 딱 하고 내려놓는 맛이고, 장기와 체스, 도미노까지 모든 게임은 다 손맛 아니겠는가.
홍콩으로 가기 전, 한국에서 마작을 치는 모임을 알아내어 한 두 번 쳐보았다. 마작패를 처음 만져보자 로망의 농도가 더 짙어졌다. 패를 쌓는 데만도 여러 규칙이 있었는데 그걸 알아서 척척 쌓고, 네 명이서 순서대로 물 흐르듯 자신의 패를 가져가고, 하나씩 가져가고 시크하게 툭하고 버리는 모습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이걸 정말 홍콩에서 치고 말리라.
사실 한 두 번 배워서는 마작 용어를 익히는 게 쉽지 않다. 아시아에서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각자 고유의 방식으로 마작을 친다. 중국, 홍콩, 대만, 일본 모두 각자 방식의 마작을 친다. 기본적인 룰은 같은데 세세한 규칙들이 다르다. 우리나라는 마작이 인기가 없어서 그런지 우리나라 방식이 따로 있지 않고 리치마작이라고 일본마작을 친다. 한국에서 리치마작을 처음 배웠을 때는 패종류가 너무 많아 정신이 없고, 잘 모르는 일본어에, 규칙도 참 많아서(일본 답다!) 머리가 터질 듯했지만 동시에 그 이국적이고 높은 진입장벽에 매력을 느꼈다. DNA에 새겨져 있는 홍대병이 또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홍콩에서 적당히 정착한 후, 본격적으로 마작을 칠 수 있는 루트를 찾기 시작했다. 여러 경로로 검색하다 보니 외국인 대상 마작강의를 찾아냈다. 마작 선생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단체 Whatsapp group에 초대되었다. 기초부터 레벨 별로 강의가 열리는 것 같았는데 우선 그 주에 연습하는 세션이 있다고 해서 참가하기로 했다. 당일에 마작칠 장소를 보내주었는데 장소를 받고 보니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장소가 구룡반도 어드메에 있는 호텔방이었기 때문이다. 타지에서 외국인 마작선생님 Eric이라는 사람을 과연 믿어도 되는 건가.. 침사추이의 호텔방에서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처럼 장기 다 털리는 게 아닌가 하는 무서움이 일었다.
같은 침사추이였지만 다행히 중경삼림에서 임청하가 총싸움을 벌였던 청킹맨션의 호텔방은 아니었고, 도착해보니 아주 좋은 호텔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호텔방에서 Eric이라는 놈이 덮치면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몇 가지 시나리오는 굴리며 방으로 올라갔다. 문 멀찍이 서서 경계태세로 벨을 눌렀다. 한 서양인 중년여성이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고 보니 햇볕이 가득 들어오는 환한 방이었다. 두 명의 서양인 중년 여성 두 명과 중년의 홍콩 남성이 마작패를 펼치고 있었다. 들어보니 Kris라고 소개한 통통한 여성이 살고 있는 방인 듯했다.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혔던 시기에 관광객이 없어 손님이 급격하게 줄어든 홍콩의 호텔들은 평소보다 저렴하게 장기투숙객들을 모집하곤 했었다. 홍콩의 살인적인 월세보다 저렴하게 지낼 수 있고 클리닝 서비스도 일주일에 몇 번씩 해주었기 때문에 꽤 많은 친구들이 호텔에서 살고 있었는데, Kris 도 그런 모양이었다. Kris 보다는 좀 젊고 세상 친절한 미국 중년 여성인 Sophia가 건넨 차를 받아서 마작 테이블에 앉았다. Eric 은 외국에서 오래 살다왔는지 영어를 매우 잘했고 두꺼운 금목걸이를 하고 있는 건장하고 자신감 넘치는 홍콩 중년 남성이었다.
Eric 은 내가 대충의 룰을 알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넷이 바로 게임을 시작했다. 다들 배운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는데 서양인들이 광둥어로 마작용어를 외치며 마작을 하고 있는 모습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리치마작으로 용어를 배운지라 광동어 용어들은 또 새로웠다. 게임을 하며 Eric 이 설명해주는 룰과 용어를 새로 익혔다. 리치마작에서 순서대로 세 패를 연달아 몸통을 하나 완성시키는 슌츠를 홍콩마작에서는 셩이라고 불렀고, 같은 패 세 개로 몸통을 완성시키는 커츠를 펑이라고 불렀다. 같은 패 네 개로 1점을 더하는 깡츠는 꽁. 광동어의 귀여움이 느껴졌다. 신나게 머리를 굴려가며 치고 있다가 머리 하나와 몸통 네 개를 완성에서 Win! 을 외치며 마작패를 열었는데, 1점짜리로 완성한 터라 지금 친구들과 칠 때 이런 짓을 할 경우 손모가지 자르는 제스처를 당할법한 실수로 한 판을 망쳐버렸다. 중년의 여유로움으로 세 외국인은 나를 귀엽게 봐주며 게임을 이어갔고 어느새 세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버렸다. 화양연화에 보면 같은 지붕아래 다른 방에 사는 장만옥과 양조위가 어느 날 함께 양조위의 방에서 무협소설 쓰다가 집주인이 거실에 들이닥쳐서 밤새 마작을 치는 통에 양조위의 집에서 장만옥이 밤을 보내는 씬이 나온다. 마작은 기본이 보통 짧으면 8판, 길면 16판을 치는데 한 판이 매번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밤 새 치는 것이 가능하다. 친구들과 손가락을 움직이며 수다를 떨며 시간 보내기에 이 보다 좋은 게임이 어디 있을지.
오후 내내 마작을 치고 돌아가는 길에 Eric이 몇 주 뒤에 외국인 마작대회를 개최할 것이니 참여하라고 말해주었다.
호텔방에서의 마작게임 이후 나는 마작에 정말 꽂혀버렸다. 마작은 꼭 4명이 필요한 게임인데, 주변에 세 명의 플레이어가 더 필요했다. 친구들을 꼬시기 시작했다. 마카오에서 손맛을 본적 있는, 같은 건물에 사는 친구가 먼저 넘어왔다. 친구의 같은 부서에 마작을 칠 줄 아는 홍콩 친구들을 섭외해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뭐든 하자고 하면 군소리는커녕 좋은 소리도 한 마디 안 하고 따라오는 친구도 마작에 흥미를 보였다. 같은 건물에 사는 친구 H가 섭외해온 홍콩 친구 둘을 포함해 총 다섯이 친구네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전에 친구와 마작패와 마작판을 사고, 저녁마다 심심하면 만나서 패를 쌓고 이긴 패를 오픈하는 손맛 연습을 했다.
드디어 홍콩인 친구들에게 강습을 받는 날. 홍콩 젊은 친구들 중에서도 마작을 즐기는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들이 있는 것 같았다. 젊은 친구들 중 마작 인구가 점점 적어진다고 들었는데 내 홍콩 친구들 중에는 30% 정도가 칠 줄 아는 느낌이었다. 홍콩 친구 K와 E가 마작 치는 방법을 친구들에게 설명해주고 점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영어로 성심성의껏 적어주었다. 홍콩마작은 리치마작에 비해 기본에만 충실하여 배우기가 훨씬 수월했다. 이런저런 부가적인 규칙들이 없어서 이해하기도 쉽고 치기도 편했다. 그런 점이 참 홍콩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영국령이었던 시절부터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들어와 살아서 그런지 홍콩에서 살면서 여러 행정절차들을 겪으며 한국에서보다 훨씬 단순하고 합리적이다. 우리나라는 동사무소에서 서류하나 만 떼려고 해도 세부적인 규칙들이 너무 많아서 줄을 섰다가 뺀찌 당하고 다시 준비해와서 다시 서고, 다시 준비해 갔더니 담당자가 없고, 담당자가 바뀌고 나니 규정 상 자기 소관이 아니라하는 경험이 일상이었다. 홍콩은 비록 시간은 좀 더 오래 걸려도 규칙이 단순하고 담당자가 확실하고 권한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기다리면 모든 것이 처리되고 해결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마 다양한 사람들과 섞여 살기 때문에 모두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절차가 단순해졌으리라. 그 점이 맘에 들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적어진다는 걸 느낀다.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은 이상해서, 가깝고 비슷한 사람일수록 사소한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오히려 전혀 다른 문화권의 생면부지의 인간은 모든 가능성을 여러 두고 오만가지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이해해보려 한다. 인간의 그러한 마음이 단일민족을 자랑스러워했던 우리나라를 이렇게 복잡하고 팍팍하게 만든 게 아닐까.
그렇게 나는 홍콩식 마작에 더 애착을 가지고 즐기기 시작했고, 몇 주 뒤 외국인 대상 마작 대회에서 무려 5등을 했다. 비록 Eric 주최의 사설 토너먼트에 24명만이 참가하였고 상품은 마작패로 만들어진 키링이었지만 어찌나 뿌듯했던지. 무엇보다 셩완의 오래된 유명 딤섬집 위층에 숨겨진, 외국인이라면 절대 찾을 수 없을 마작을 위한 방들에 모여 앉아 홍콩 음식들을 잔뜩 먹으며 하루종일 마작을 치는 경험은 정말 즐거웠다. 이후에도 마작은 나를 홍콩 친구들과 연결해주는 고리가 되었다. 마작을 치러 저 멀리 신계지역에 사는 홍콩 친구네 집에 놀러 가 마작과 가라오케를 즐기기도 했고, 우리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마작 나잇을 즐긴 거는 셀 수가 없다. 치파오는 없었지만 나름 '마작과 위스키를 홍콩 집의 거실에서'의 로망을 실현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선 마작이라고 하면 도박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돈만 안 걸고 하면 똑같은 보드게임이다. 돌아와서도 주변에 마작을 전파하려고 친구들을 열심히 꼬시며, 마작 칠 네 명의 친구들을 언제든지 구할 수 있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아직 홍콩마작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되면 튜토리얼을 만들어볼까도 싶다. 홍콩 마작 치고 싶으신 분들 연락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