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 어느 날 저녁, 50대 초반 여성이 배를 부여잡고 왔다. 당연히 스스로가 아닌 삐뽀 삐뽀 앰뷸런스를 타고 쏜살같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배뿐만 아니라 딱 봐도 무릎이 으스러진 듯한 모습과 고통의 신음 소리를 냈다. 어느덧 권역외상센터 10년차 외상외과의사는 환자가 들어오는 모습과 어디를 아파하는 모습만 먼발치에서 보면 어떤 차를 타고 있었고 어떻게 사고가 났을지 감이 온다.
역시나 승용차를 운전하였던 환자는 차선 위반을 해서 넘어오는 차와 정면 추돌한 것이었다. 상대편 차량이 바로 정면으로 들이받은 것이 분명하다. 정면으로 달려오는 차가 무서워 오른발로 힘을 주며 브레이크를 밟았을 것이며 동시에 번개같이 밀고 오는 상대방 차량 힘이 환자의 무릎과 배로 모두 전해졌을 것이다. 모든 장기, 몸이 중요하지만 생명의 우선순위로 신속하게 치료해야 한다.
권역외상센터 의료진은 모두 신속하게 환자 처치, 치료를 시작한다. 서로 말은 안 해도 각자의 역할이 있다. 머리맡에서 환자의 머리, 두경부 위주로 일차 처치를 하며 동시에 팔, 다리에 혈관주사를 꽂아 혈액 채취와 진통제를 넣어준다. 가슴부터 배, 골반까지 아픈 부위를 빨리 찾아내려 손을 이용한 진찰과 동시에 초음파를 가져다 댄다. 일차적인 처치가 어느 정도 되면 좀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한 CT 검사를 진행한다. 내부 장기 손상, 출혈을 찾아내고 빠른 치료 결정을 한다.
순간, 참 애매하고 한 번 더 고민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
CT 영상들을 쭉 한 번 그리고 다시 고민하면서 한 번 더 보면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환자의 주된 고통 부위는 한가운데 배와, 오른쪽 무릎이다. 무릎뼈가 골절된 것은 육안적 모양이나 엑스레이, 씨티만 봐도 딱 알 수 있다. 치료는 우선 부목 고정, 다음은 안정된 후 골절 수술이라는 정해진 규칙대로 수술하면 된다. 간혹 심한 개방성 골절이나 혈관 손상이 동반된 경우 이 또한 응급으로 치료해야 한다.
환자의 뱃속을 쭉 보여주는 씨티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아무리 봐도 유리 공기, 즉 장천공이 있으면 나오는 공기 음영이 도저히 안 보였다.
유리 공기가 확 눈에 띄었다면 자신 있게 환자, 보호자에게 다가가서
'수술하겠습니다.
진찰소견, 검사 소견들을 종합해서 환자분은 복부 내부 장기 천공이 확실합니다.
빨리 복부 수술을 시행하지 않으면 상태가 악화되기에 수술 시행하겠습니다. '
말하고 외과의사가 가장 편해하고 좋아하는 수술실로 환자를 데리고 들어가면 된다.
[ 유리 공기 : 복부 장기 손상, 천공이 있을 경우 씨티 검사 소견상 장(위, 소장, 대장) 이외 복강 내 공기 음영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정상적인 복부 씨티 소견은 장 내부에만 공기 음영이 보여야 한다. ]
사실 나는 골절에 대해 관심이 매우 적다. 전공과목이 아닐뿐더러 내가 할 수 있고 내 주 종목은 복부에 관련한 외과 질환이다. 처음 응급실로 왔을 때부터 먼발치에서 본 순간, 그리고 내 손을 처음 가져간 순간 환자 복부에 느껴지는 압통과 반발통은 분명 장천공이 맞다. 14년 차 외과 전문의 손끝은 어느 씨티나 초음파 검사보다 정확하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손끝의 진료소 견과 객관적 검사 소견이 일치해야 보다 정확한 진단이 되며 그 결과를 가지고 치료해야 한다.
순간 환자는 더 배 아프다고 소리를 지른다.
이제 신음 소리가 아닌 절규에 가까워진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고 결정을 해야 한다. 다시 한번 환자의 배에 손을 가져가면서 내 손끝으로 압통과 반발통을 상태를 평가해 본다. 환자의 압통, 반발통은 더 심해진다. 씨티를 다시 자세히 한 번 더 보니 명확한 유리 공기는 안 보이지만 소장 주위로 혈종, 멍든 부위들이 보인다.
[ 압통과 반발통 : 복강 내 장기 손상으로 인한 복막 자극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증상. 압통은 통증 부위를 누를 때 심해지는 통증. 반발통은 통증 부위를 손으로 눌렀다가 뗄 때 통증을 말한다. ]
환자, 그리고 보호자에게 다가가 말한다.
'저희 가족이라면 이 순간에 수술 결정하여 수술 진행하겠습니다'
처음 진료 시작부터, 검사 소견 그리고 한 시간 가까이 있는 동안 계속 제가 환자분을 진료한 결과 지금 수술 결정을 해서 복부 수술을 하는 것이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가 될 것입니다.
환자는 말이 없다. 그저 아프다고 소리 지르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어떻게든 빨리 아픈 것 하나라도 먼저 해결해 주세요!
나 배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 죽겠어요! '
옆에 있는 보호자는 내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술동의서에 서명하였다.
2.
환자와 나는 이십여 일 함께 병원에서 지냈다. 물론 내가 환자를 보는 시간의 총합은 응급실과 수술실에서 환자가 마취, 수술하는 시간의 총합과 병동에서 회진, 드레싱 시간의 총합이 같다. 다시 말해 처음 결정의 순간, 수술까지가 결국 환자의 생사, 치료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수술 후 치료, 작은 상처 소독까지 소홀히 하면 안 된다.
환자는 여러 번 나에게 말하였다.
본인이 처음 응급실에서 왔을 순간, 그 고통의 순간에서 누군가 나타나 본인 배를 만져주고 (진찰하고) 수술 결정, 그리고 수술 후 본인 배가 좋아진 순서대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결사, 본인을 치료해 준 의사가 누군지도 분명히 알고 있다. 퇴원을 얼마 안 된 시점에서 환자는 나에게 말한다.
'슬의생에서 나오는 의사선생님이 여기에도 계시네요.'
나는 속으로 슥 웃어넘기며,
'난 그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드럼, 기타 치고 음악 할 시간도 없는 불쌍한 경첩의사입니다. '
3.
한참 지난 후 환자가 외래로 왔다. 간단한 진료를 보기 위해 왔지만 1년 전 입원 시절의 이야기로 잠시나마 화기애애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첫 만남 당시 아픔, 고통은 어디로 다 잊어버리고 본인이 잘 수술, 치료한 과정들만 기억하여서 다행이었다. 마지막에 환자는 나에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