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에서 두 시간 거리의 기숙 고등학교를 다녔다. 수업시간 끝나갈 즈음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말씀하시는 선생님이나 듣고 있는 나 또한 담담히 할아버지 부음소식을 전하고 들었다. 돌아가셨다는 말은 곧 손자인 나와 대화도 못하고, 따뜻한 손도 못 잡는 이 세상 분이 아닌데, 나에게는 슬픔보다 하나의 일상 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도 지난달에 많이 아프셨던 할아버지 상태를 기억하여서 그러하였다. 나는 기숙사를 들러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시외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구남매 자식을 두셨다. 나는 그중 다섯째 아들의 아들이기에 할아버지 무릎에 앉으려면 위에 사촌형누나들 열댓 명에 밀렸다. 그렇기에 어려서부터 나와 할아버지 사이는 큰 벽이 있었다. 집에 도착한 후 큰 언덕을 두 번 넘어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있는 큰아버지 집에 도착하였다. 지난 추석까지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던 할아버지는 안계시고 영정사진과 흰 소복, 삼베옷을 입은 친척들만 있었다.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3일장이 지나고, 할아버지를 선산에 고이 모셔드린 후 다시 난 시외버스를 타고 늦은 오후 학교 기숙사로 돌아왔다. 여느 날과 같이 야간자율학습을 하였다. 오랜만에 교실책상에 앉아 깜박 졸다가 지난 삼 일간 시간들이 거꾸로 생각이 났다. 그 중 아빠 모습과 동시에 할아버지의 마지막 얼굴빛은 또렷이 다시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장례를 치르는 삼일동안 식사도 거의 못하고 할아버지 영정 앞을 지키던 아빠 모습과 눈빛이 떠올랐다. 장례 둘째 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모셔진 안방에서 염을 하였다. 할아버지이지만 돌아가신 분을 처음 보는 나이기에 순간 무서웠다. 대가족 중에서 나는 한참 뒤쪽 순서이기에 먼발치에서 염하는 모습을 고개 숙여 보았다. 또렷한 기억은 먼발치에서 본 평안한 얼굴빛과 곱고 고운 한복을 마지막으로 입고 계시는 할아버지 모습이다.
2.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지날 즘, 나는 한 생명 마감을 뜻하는 사망진단서에 서명이 가능한 의사면허증을 나라에서 받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기억 속 할아버지를 잊어갈 때 나는 복지부에서 주는 면허를 받고 삶과 죽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모니터 그래프 파형이 사라짐을 보고 환자 사망선언이 전부이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눌 수는 있었다. 아직 의사로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거나, 암을 고치고 완치하는 역할에는 한참 부족한 수준이었다. 수레바퀴같이 돌아가는 병원 생활, 하지만 환자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과 병을 가지고 내 손을 거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다. 외과 전공의 1년차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주치의지만 대부분 수술은 교수님과 4년차 치프선생님이 하고, 나는 입퇴원 반복 처방, 환부소독을 담당한다. 그렇다고 주치의라고 수술과정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환자 입원 시작부터 퇴원까지 작은 이상 징후, 증상들을 신속히 찾아내고 해결해야 빠른 회복이 된다. 주치의의 역할과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은 궤도에서 탈선하려는 기차의 비틀거림을 잡아 다시정상적인 목적지로 데려가는 것이다.
위암을 이미 진단받고 수술하기 위해 한 할아버지가 입원하였다. 환자인 할아버지는 건장한 시골 노인 모습이었다. 순간 깜짝 놀랄 만큼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비슷한 체격과 얼굴 모습을 가지신 분이다. 나이도 비슷하게 나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나이인 80 가까이 사신 분이다.
“할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어디 사세요?”
할아버지의 검게 그을린 손을 보며 “무슨 농사지으세요?”
환자와 의사 관계가 아닌, 순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의사인 손자와의 일상대화 같았다.
입원부터 함께 따라온 아들과는 이미 외래에서 교수님과 함께 환자에게는 암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위에 조그만 혹이 있어 제거하는 수술을 한다고 입을 맞춘 상태였다. 외래 차트에 간경화라는 고약한 글자, LC(liver cirrhosis)가 선명히 보였다. 예상대로 여느 시골 촌로처럼 술에 의해 만들어진 간경화이다. 간경화라는 무서운 시한폭탄을 안고 하는 수술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속으로 한숨과 걱정이 땅을 파고들었다.
“농사지으면서 뭔 술을 그렇게 드셨어요?”
“막걸리지. 우리 동네 양조장 막걸리가 얼마나 맛있는데?”
“막걸리 먹어서 위에 혹이 생기셨다면서요? 모레 위에 혹 떼는 수술할게요!”
“어서 하루라도 빨리 혹 떼는 수술해줘. 나 빨리 가서 벼 바심해야 혀.”
무심코 바라본 할아버지의 검게 그을린 얼굴과 눈빛에서 10여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도중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의사가 된 손자, 나를 바라보셨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 아들과 첫 만남은 수술동의서 사이에 두고 어제 만난 또 다른 위암 환자 보호자에게 했던 설명을 그대로 반복하며 시작하였다. 수술 설명 중간에, 다른 50~60대 환자면 무심코 지나치는 연결부위 누출 부분에서 한 번 더 굵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옆에 간경화, 고령을 쓰며 말하였다.
“다른 일반적인 환자보다 간경화도 있으며 고령 환자이기에 수술 후에 합병증 발생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마지막 ‘높습니다. 말에서 말끝이 살짝 올라가는 내 목소리가 느껴졌다.
합병증은 생기지 말아달라는 가족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할아버지 수술은 예정대로 잘 끝났다. 하지만 수술 후 며칠 뒤, 곧 식사 하려는 시점에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몸속에 넣어놓은 여러 배액관들, 그중에서 위를 절제하고 위와 소장을 연결해놓은 부위에 걸쳐있는 배액관으로 고약한 액체들이 나오기 시작하했다. 주치의인 나에게 정말 상상하기 싫은 상황이 발생했다. 이제 이 환자, 할아버지는 나의 최우선 환자이다. 매일, 아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한 순간순간 떠날 수 없는 환자가 되었다. 혈압 숫자 하나부터, 배액관 액체 양, 색깔까지 모두 예의주시해야하는 상황이다. 간경화 뿌리 속에 연결부위 누출이 된다면 복막염이라는 기름을 부어버리는 격이다. 할아버지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고, 재수술을 하여도 호전되지 못하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제는 환자와 주치의, 그리고 보호자만의 시간이다. 할머니는 중환자실 앞 간이의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매일 중환자실 앞에서 주무셨다. 내가 그 앞을 지나가는 모습을 빠짐없이 보고 그때마다 할머니와 나는 눈빛과 얼굴까지 마주쳤다.
할머니는 나를 볼 때 마다 조심스레 말했다.
“우리 영감 잘 있지? 우리 영감은 뭐라도 삼시세끼 꼭 먹어야 해. 잘 먹어야지 힘내고 잘 이겨내는데….“
나는 애써 할머니의 맑은 눈망울을 피하면서 말했다.
“할아버지는 안에서 저희들이 잘 치료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잘 치료한다는 말을 듣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만 훔쳤다.
주치의 능력이 부족한 탓인지, 할아버지 간경화 뿌리가 더 고약하고 독한 탓인지, 할아버지는 점점 더 상태가 악화되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복막염 기름이 부어진 상태를 더 버티지 못하고 심정지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급하게 모든 보호자들을 호출하고, 모든 약물을 쏟아 부으며 심장마사지도 하였다. 어렵사리 할아버지 심장은 돌아왔으나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의식은 없고 가족도 못 알아보았다. 가까스로 모니터에 보이는 숫자만이 할아버지 심장이 뛰고 있다고 말해준다.
심정지가 있었던 다음날, 담당 교수님과 아들이 면담하였다. 다음날 할아버지가 사시는 시골집으로 모시고 가기로 결정하였다. 보호자들은 객사가 아닌 집에서 운명하길 원하였다. 외래에서 면담을 마치고 나와 대면한 아들과 주치의인 나.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없이 너무나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미 교수님께 전화로 면담 결과를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다.
고요한 둘 사이의 정적을 깨트리며 아들은 말했다.
“선생님께서 아버지가 집으로 가시는 마지막을 함께 해주실 거죠?”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음날 인턴선생님에게 할아버지가 집에 가는 길에 인공호흡기 역할을 예약해 놓았다. 그러나 인공호흡기 담당자를 아들이 바꾸었다. 나도 인턴시절에 사람 인공호흡기 역할인 앰부를 짜면서 환자 이송을 많이 해보았으나, 이렇게 집으로 가는 역할은 처음이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이 세상과의 끈을 잡아주는 역할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동시에 이 세상과 마지막 끈을 놓아주는 악역도 동시에 맡아주기를 부탁한 것이다.
3.
할머니는 이른 아침 한복을 가져오셨다. 시골집에 고이 모셔둔 할아버지의 소중한 한복이다. 중환자실 간호사는 할아버지에게 정성스럽게 옷을 입혀드렸다. 한복으로 갈아입고 눈 감고 계신 할아버지 모습은 십 년 전 먼발치에서 본 나의 할아버지 마지막 모습과 똑같았다. 차이라면 입에 삽입된 관을 통해 강제로 산소를 집어넣으며 생명연장이 되고 있다는 것.
시골집으로 가는 두어 시간 동안 앰뷸런스 안은 가운데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머리맡에서 앰부 짜고 있는 나, 그리고 바로 옆에 아들이 있었다. 앰부 짜는 푹푹 소리와 할아버지가 생명이 붙어있다고 알려주는 모니터 알람 소리가 그 고요함을 녹여주고 있다. 정확히는 시골 할아버지의 집까지 의학적인 생명의 마지막 끈을 끊어지지 않게 내 손안의 앰부만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지긋 감아 할아버지 얼굴과 앰부를 번갈아 쳐다보는 아들 모습이 보인다.
시골집.
역시나 나의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떠나신 시골집과 흡사하였다. 가족들뿐 아니라 일가친척, 동네사람들까지 수십 명이 모였다. 내 뒤에서 웅성거리는 주위 사람들의 원망 눈빛 백 여 개가 내 뒷머리를 때릴 준비하고 있으나 아들과 할머니가 그것을 막아주었다. 이제 할아버지가 평생 사셨던 안방에 한복을 입고 가지런히 누우셨다. 나도 그 방안에 잠시나마 함께 있었다. 바로 몇 분 뒤면 가져왔던 앰부와 관을 주섬주섬 챙겨서 도망치듯 나올 방이지만.
할아버지 모습은 10년 전 염하려고 누워 계셨던 나의 할아버지처럼 편안한 모습이었다. 마치 이제 고향, 내가 마지막 떠날 장소를 찾아왔다는 안도감의 표정이다. 그 옆을 지켜보는 아들 눈빛에서 나의 할아버지 장례 중 삼일장 내내 보인 아빠 눈빛이 보였다. 이제는 뒷머리로 원망의 눈빛들은 하나도 안 느껴진다. 다만, 할아버지가 본인 발로 걸어서 나간 집을 차가운 육신만 돌아온 영감을 부르며 원통하게 울부짖는 할머니 울음소리만 들린다. 10년 전 나의 할아버지 장례식에서는 살짝 눈물이 맺혔을 뿐이었던 나는 그날따라 두 눈이 뻑뻑해지면서 주르륵 무언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