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지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민간인으로 대기업에 입사해 발령받은 점포. 우리 점포의 화장실은 남루하고 벽에는 흰개미가 기어갔다. 그래도 내가 가고 싶을 때 마음껏 갈 수 있는 아늑한 곳이었다.
내 소개를 안했었나? 강원도 GOP사단 예비연대 예비대대 정훈장교이자 사단 공보장교였다. 뭐하는 사람이냐면, 군대의 윤리 선생님 + 기자 같은 존재이다. 현장직 지원팀에 있다가 본부 지원부서로 보직을 이동한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남들이 군대가서 고생한 이야기는 듣기 싫다만, 잠시 내 이야기를 해보겠다.
여군의 군생활 들어봤나? 나름 희귀한 경험담이다.
우리 부대는 일단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 시골에 위치하고, 출퇴근 할때도 편의점을 갈 때도 산을 넘어서 가야했다. 영화를 보려면 더 큰 산을 넘어 속초까지 가야한다. 시내라고 해봐야 도보로 10분이면 다 돌 수 있다. 그 중심 버스터미널 앞에 군장점이랑 CU가 하나 있었는데 정말 일주일에 1번 시내 나갈 때만 갈 수 있었다.편의점가러 산을 넘을 순 없지 않는가?
시내에 새로운 치킨 브랜드가 입점했을 때는 단번에 면회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물가는 또 왜 이렇게 비싼지. 여튼 그곳은 군인들 만을 위한 섬 같은 곳이다.
출퇴근도 문제였다. BOQ(간부숙소)가 산 하나를 넘어서 위치해 있었는데 버스가 없었다. 가끔 시간대가 맞으면 1호차 레토나(꼬꼬마를 위한 각주. 대대장님 차)로 우리 숙소까지 데려다주시기도 했지만, 매번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강원도 시골 길은 정말 가로등이 드믄 드믄 있어서 밤이 되면 새까맣다. 누가 민원 좀 넣어줬으면 한다.
인도의 구분도 없는 구불구불한 산 도로 길을 밤마다 넘어봤는가? 밤에 산을 넘으면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 나를 미처 못 본 차량이 나를 깔고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 첫번째 걱정이고, 두번째 공포는 멧돼지 킁킁 거리는 소리이다. 소리가 가까이 왔다 싶으면, 숙소까지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뛰어야한다. 우산이 없다면 더더욱. (멧돼지를 만나면 우산을 펼쳐라?!)
나를 처음 보는 사람마다 여군 장교 출신은 난생 처음 본다고 말한다.
나도 당신을 처음 봤다.
난 여군이란 말이 싫다. 그냥 육군 장교이다. 장교 출신이라는 타이틀은 소개팅에서는 쥐약이었지만, 문과 출신 여자로서 직장생활에서는 나만의 무기였다. 어차피 여자를 일정비율 뽑아야하는 대기업에서 내 이력을 보고 싫어하는 임원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지사지기면 백전불태. 여러분이 잘 해서 뽑힌 게 아니다. 나라에서 권장하는 일정의 비율이 있다.
여군으로서의 불편함이 있었냐 묻는다면, 그 역시 일반 직장에서 느끼는 바를 베이스로 깔고 추가 사항이 조금 있다는 정도만 말해주고 싶다.학사장교는 3년이라는 점?국방부 시계가 원래 느린데 ROTC보다 1년을 더 근무한다. 심지어 전역도 7월말이다. 6월말에 ROTC후배들 다 "누나 안녕~"하고 집에 가는데 나만 1달 더 있어야한다.
우리 부대는 전방사단 예비연대 예비대대라서 훈련이 많았다. 예비대대가 왜 훈련이 많은지 잘 모르겠는 미필 꼬꼬마가 있다면, 주변 형들에게 물어보도록.
한 달에 약 일주일정도는 꼭 훈련이 있었는데, 정훈이 훈련에 가서 엄청나게 대단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힘든 시간이었다. 다른 것보다 화장실때문에.
훈련을 나가면 원래 화장실이 없다. 전쟁터에 화장실 있는 거 봤나?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 육군에서는 여군 장교의 편의를 위해 훈련때 화장실을 지고 가는 것을 명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병사들이 설치하고 해체하는 화장실을 차마 쓸 수 없었다. 우리가 사용하면 다시 이고지고 부대로 들고 들어와야 하는 화장실인데, 어찌 쓰겠는가?
그래서 난 훈련 1일 전부터 딱 6일간,
물을 한 방울도 먹지 않았다.
식사로 자연섭취되는 수분만 섭취하면 사람이 하루에 딱 1번 화장실을 간다. 이런 생물 실험 따위는 나도 하고 싶지 않지만, 상황이 닥치면 하게 된다. 훈련지에 가면 본부 텐트를 세우고 경계근무를 곳곳에 세우기 때문에 정말 멀리 가도 장병들이 다 숨어있다. 숨어있는게 아니라 경계근무 중이다. 평소에 화장실을 자주가는 편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목욕을 못해서 간지러운 것은 둘째치고, 목이 말랐다.
그런 곳에 있다보니 민간 세계에서 뭔가 힘들다는 일을 시켜도 사실 그럭저럭 할만 했다. 내 직장은 따뜻하고, 화장실도 가까이에 있고, 영화관도 바로 옆에 있고, 맛있는 식당도 많다. 아주 단순한 논리이지만 실제로 갓 전역한 장교출신들은 이런 데에서 상대적인 만족을 느낀다.
'군 생활이 직장생활에 도움이 되나요?' 라고 묻는다면 '매우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조직을 알고, 상하관계를 이해하고, 하나의 목표로 나의 생리적인 현상을 통제해본 경험은 어디에서도 할 수 없다. 회사에서 어떤 걸 시켜도 '해보지뭐' 라는 마인드가 기본이 된다. 그때는 무조건 해야했기 때문에, 상부의 명령에 토를 달 생각조차 안한 세월들이 쌓여서 그런 것 같다.
비단 장교만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구든 군생활을 1년이상 한 사람들의 내면에는 자기도 모르게 단단한 내공이 쌓여있다.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긴장해야한다. 군 가산점제 이딴 걸로 싸울 게 아니라, 우리나라 남자들이 대부분 가지고있는 조직에 대처하는 내공이 당신은 없는 상태라는 걸 자각해야한다. 같은 출발선인데 당신만 뭔가 빠진 상태에서 그 뭔가가 있는 자들과 경쟁하여 살아남아야한다.
학점이 좋다고, 보고서만 잘 만든다고 직장에서 잘한다고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유기적으로 사람과 사람사이에 관계를 조율하고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리드할 줄 알아야 내가 원하는 바를 성취해갈 수 있다.
남들 다 가진 내공이 제로라면 나 스스로 다른 노력을 해야만 남들과 비슷한 상태에서 출발할 수 있다. 군대 얘기하니까 말이 길어졌다.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꼰대소리 할까봐, 이만 줄인다. 유리천정에 대한 이야기도 할 말은 많다. 다음시간에 계속.
[회사생활 꿀팁]
-. 군 생활을 상기해보라! 거기서 병장, 소대장, 중대장 비위 맞췄던 거 떠올리면 팀장 비위 맞추는 건 일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접근하라.
-. 여성 혹은 미필자들도 저런 조직생활의 내공을 쌓고 싶다면 간접 체험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 체계화된 조직에서 아르바이트를 1년 가량 오래 하는 것.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영화관 같은 곳이 그에 해당한다.
- 훗날 내 여동생이나 딸이 여군을 간다고하면 권하고 싶진않다. 장교는 임관하면 퇴로가 없다. (4개월 빡센 체력 훈련 - 임관 - 4개월 병과훈련, 아마도...기억이 가물가물) 임관 전에는 포기 가능.(훈련받다 나가는 애들도 몇명 있다) 임관은 국가의 명령을 받는 거라, 그 후엔 도중에 이게 내 길이 아닌데? 싶어도 3년은 꼬박 이곳에 있어야 한다.
"군대 놀러왔나!!!" 가끔 꿈에서도 나오는 훈육장교의 득음 샤우팅!
장교는 무단 결근이 곧 탈영이고, 범법자가 된다. 의가사 전역? 진짜 어디 망가지지 않는 한 쉽지않다. 실제 내 동기가 탈영을 했었고, 그녀의 인생이 군대를 선택하지 않는게 더 나았으리라 생각했기에 하는 말이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24~27세이다. 전역할 땐 현실적으로 신입으로 지원가능한 마지막 나이가 된다. 나중에 취업을 잘하려고, 경험삼아 군대에 간다? 견뎌야할 세월과 그 무게에 비례하면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본다. 군대는 취뽀하기 위해 체험하는 놀이터가 아니다. 나라를 지키는 사명감을 가지고 가도 힘든 곳이니 잘 생각하도록.
-. 회사에서 젠더문제가 나오면 자기 생각은 가급적 말 안하는 게 좋다. 생각은 집에서 혼자하고, 말하고 싶으면 엄마한테 얘기해라. 각자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얘기를 하다보면, 소득도 없는 논쟁을 벌일 수가 있다. 회사에서 굳이 그럴 필요 없다.
-. 개인적으로는 군대 다녀온 시간 조금 보상해주는 제도를 반대하지 않았으면 한다. 진짜 안 다녀온 사람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