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속에 진리가 있다(In vino veritas)는 농담
속초 여행은 1일 1권 독파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여행이었다. 운명론자처럼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서점에 내 눈길을 사로잡는 책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그 속에서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들을 만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읽게 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비닐에 꽁꽁 싸여 내용도 확인하지 못한 채 시작하게 된 책. 그저 표지 색감이 예쁘네, 제목이 흥미롭네? 정도로만 시작한 책.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떠오른 몇 가지 웃긴 에피소드들도 함께 적어보려고 한다. 아무쪼록 비 오는 날, 읽기 좋은 책을 만났다.
기억 속의 술
그런 술이 불어넣어 준 용기와 허세, 객기와 수줍음, 그때 발생한 우정을 기억하고 있다. 술에 취해 우르르 편의점 냉장고로 몰려가 비비빅이나 캔디바 같은 걸 하나씩 고르던 밤이 있었다. 얼굴이 빨간 후배가 몸을 비틀거리며 카운터의 아르바이트생에게 다가가 "아저씨, 우리 이래 봬도 소설가예요"라고 말해서 도망치듯 편의점을 빠져나온 밤. 그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농담 중 하나다. - 본문 18p
1. 대학원을 다닐 때, 수업이 끝나면 네트워킹이라는 명목으로 술자리가 잦았다. 그날 역시, 학교 앞 감자탕 집에서 신나게 웃고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나와 집에 가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없었다. 옆에 있던 동기 오빠 휴대폰으로 나한테 전화를 건다는 게 꽤나 취한 나머지 실수로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언니와 내 번호는 딱 한자리가 다르다) 그때가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에 취해 언니에게 전화를 건 날이었다. 꽤나 늦은 시간이어서 언니도 놀랐을 텐데,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그때 언니한테 혼날까 봐 술이 깼었어.(ㅋㅋㅋ)
2. 팝콘을 움켜쥐던 사나이. 쉽지 않은 스타트업에서 회사 생활을 이어가던 때였다. 그 힘든 와중에서도 입사동기들끼리 마음이 잘 맞아 퇴근 후 종종 술을 마시러 가곤 했는데 그날은 술을 잘 못하는 S양도 합세하여 꽤나 술을 마셨었다. 2차로 간 호프집에서 퍼스너컬러가 술톤인 D양은 뒷 테이블에 취한 2명이 떨어트린 가방, 지갑을 침착하게 주워 쥐도 새도 모르게 테이블에 올려줬고 그들은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거하게 취해있는 듯했다. 한 명은 사라지고, 한 명은 자꾸 가게에서 제공하는 팝콘 기계에 손을 넣어 한 움큼씩 집어 먹으며 가게 입구와 자리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우린 두 눈을 의심하며 다 같이 배가 아플 때까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신기하게도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기억에 꽤 오래 남는다. 그 에피소드들이 쌓여 오래 추억하고 이야기하며 돈독해지는 사이도 있다. 긴장이 풀린 느슨함이 만들어주는 끈끈함은 꽤나 유쾌하다.
의미 속의 술
내게 와인은 그런 의미에서 온기의 술이다. 혼자 마시는 와인은 몸을 덥혀주어서, 함께 마시는 와인은 그 사람(들)과 나 사이의 서운하거나 서먹한 마음을 녹여주어서.. - 본문 51p
(중략) 하지만, 술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복잡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술은 술술 넘어가면서 그때의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함께 이동시킨다. 내 안에서 밖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중략)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는 아이처럼,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서 별 눈치 보지 않고 떠드는 아이처럼 단순해질 수 있게 한다. - 본문 76p
소주, 맥주, 사케, 와인, 위스키 등 어떤 술이 가장 좋냐고 물으면 아직은 잘 모르겠다. 추운 날씨에 포장마차에서 먹는 우동과 소주 한 잔은 꽤나 오래 간직해 온 낭만이고. 더운 여름, 시원하게 들이켜는 생맥주 한 잔은 무더위에 녹아버린 의욕을 되살리는 비법이고. 유난히 긴장도가 높았던 하루, 일과 끝에 잠들기 전 마시는 와인 한 잔은 힐링인 걸.
꽤나 복잡한 사람들 속에서, 눈치보기 바쁜 삶에서. 마음을 녹이고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질 수 있도록
돕는 매개체가 술이라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100% 동의가 된다. 술을 마시고 하는 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고, 흐트러지는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글쎄.. 나는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다른 게 아닐까 싶다.
항상 곧게 힘주어 살아갈 순 없지 않나? 노곤노곤하게 풀어지는 순간이 좋을 때도 있다. 어떤 순간에 술은 용기를 주고, 어떤 순간에 술은 한 걸음 정도 마음의 거리를 좁혀주고, 어떤 순간에 술은 오늘을 버텨낼 위로를 주곤 하니까.
위로 속의 술
(중략) 누군가에는 게임이고 도박이고 카드고 약물이고 쇼핑이듯이. 다정히 마음 둘 곳을 찾아서, 자꾸 실패하는데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잘못을 돌이키고 자책하고 싶지 않아서,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준 게 미안해서 술을 집어든다. 특별히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방식이 그렇다. - 본문 34p
무엇보다도 술과 농담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중략) 술을 마실 때, 취기가 오른 심신의 상태와 술자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그 속에서 농담은 셀 수 없이 피어오르고 사라지고, 다시 피어오른다. 알코올이 공기 중에 섞여 들고 흩어지듯이, 말들은, 의미가 있든 없든, 그 자리에 섞였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하며, 보이지 않는 자취를 남기며 사라진다. 그렇다. 무언가를 남기며 사라지는 것, 사라지면서 남겨지는 것, 그것이 술과 농담의 공통된 존재 양태가 아닐까. - 본문 68p
24살에 처음 마셨던 술을 아직도 기억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향에 민감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면 안 되는 건 줄 아는 나는 지각 한 번, 결석 한 번 안 하는 착한(?) 학생이었고 그건 대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제대로 술을 접하고 배운 건 첫 직장에서였고 애주가 여자 이사님께 스파르타식으로 술을 배우면서 힘든 회사생활에 울고 웃었던 기억들이 많이 남아있다.
곰곰이 곱씹어보면 술이라는 장치는 꽤나 신기하다. 별 것 아닌 농담이 배가 아프도록 웃기기도 하고, 이해되지 않아 씩씩대며 화가 나던 일들도 부딪히는 한 잔에 인류애가 생긴 건지 언제 그랬냐는 듯 잊히기도 하고. 맨 정신에 서로를 할퀴던 날 선 대화들이 동글동글하게 서로의 마음에 가닿기도 한다.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얼음처럼 딱딱한 상태에서 얼음벽과 같이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이처럼 술도 수많은 사람들의 멀어지고, 굳어지고, 무너진 마음을 깨뜨려 위로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천사의 몫 2%
"위스키는 숙성시키는 동안 매년 2퍼센트에서 3퍼센트 정도가 증발하죠. 그걸 '천사의 몫'이라고 해요" (중략) 그것은 어떤 상실, 유실, 증발, 휘발, 혹은 그 모든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것들의 몫일 수도 있으리라. 아니면 살면서 내가 운 좋게 가진 것들, 그것들을 갖기 위해 알게 모르게 내가 잃은 것들의 이름일지도. 그러니 '천사의 몫'은 결국 잃었지만 잃은 줄도 모르는 것이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 잃었기에 얻게 된 무엇이기도 하다.
천사의 몫이라니, 표현이 참 예뻐서 기록하고 싶었다. 이 단락은 곱씹을수록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숙성을 통해 술이 술로 탄생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되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증발했을까? 또 인생에 수많은 선택을 해오면서 어떤 것들을 잃고 대신 어떤 것들을 얻었나.
잃은 것보다 얻은 것에 주목하는 삶을 살면 천사의 몫 2%는 내가 빼앗긴 게 아니라 선물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하도 술 얘기를 해서 마시지도 않았는데 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중간중간에 이해되지 않는, 읽히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술이라는 주제와 어울리는 듯했고 6명의 소설가가 써 내려간 술에 대한 이야기들이 꽤나 흥미로웠다
술 속에 진리가 있다는 농담이 유의미해지는 지점.
<자아의 세속적, 논리적 측면이 약화되며 사유가 유연해지는 것>이라는 큰 틀 안에서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추신.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 해롭습니다.
마음이 노곤노곤해지는 딱, 그 정도로만 즐기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