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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zigm Feb 27. 2023

[Reading] 술과 농담

술 속에 진리가 있다(In vino veritas)는 농담

속초 여행은 1일 1권 독파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여행이었다. 운명론자처럼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서점에 내 눈길을 사로잡는 책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그 속에서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들을 만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읽게 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비닐에 꽁꽁 싸여 내용도 확인하지 못한 채 시작하게 된 책. 그저 표지 색감이 예쁘네, 제목이 흥미롭네? 정도로만 시작한 책.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떠오른 몇 가지 웃긴 에피소드들도 함께 적어보려고 한다. 아무쪼록 비 오는 날, 읽기 좋은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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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술

그런 술이 불어넣어 준 용기와 허세, 객기와 수줍음, 그때 발생한 우정을 기억하고 있다. 술에 취해 우르르 편의점 냉장고로 몰려가 비비빅이나 캔디바 같은 걸 하나씩 고르던 밤이 있었다. 얼굴이 빨간 후배가 몸을 비틀거리며 카운터의 아르바이트생에게 다가가 "아저씨, 우리 이래 봬도 소설가예요"라고 말해서 도망치듯 편의점을 빠져나온 밤. 그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농담 중 하나다. - 본문 18p



1. 대학원을 다닐 때, 수업이 끝나면 네트워킹이라는 명목으로 술자리가 잦았다. 그날 역시, 학교 앞 감자탕 집에서 신나게 웃고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나와 집에 가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없었다. 옆에 있던 동기 오빠 휴대폰으로 나한테 전화를 건다는 게 꽤나 취한 나머지 실수로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언니와 내 번호는 딱 한자리가 다르다) 그때가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에 취해 언니에게 전화를 건 날이었다. 꽤나 늦은 시간이어서 언니도 놀랐을 텐데,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그때 언니한테 혼날까 봐 술이 깼었어.(ㅋㅋㅋ)​


2. 팝콘을 움켜쥐던 사나이. 쉽지 않은 스타트업에서 회사 생활을 이어가던 때였다. 그 힘든 와중에서도 입사동기들끼리 마음이 잘 맞아 퇴근 후 종종 술을 마시러 가곤 했는데 그날은 술을 잘 못하는 S양도 합세하여 꽤나 술을 마셨었다. 2차로 간 호프집에서 퍼스너컬러가 술톤인 D양은 뒷 테이블에 취한 2명이 떨어트린 가방, 지갑을 침착하게 주워 쥐도 새도 모르게 테이블에 올려줬고 그들은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거하게 취해있는 듯했다. 한 명은 사라지고, 한 명은 자꾸 가게에서 제공하는 팝콘 기계에 손을 넣어 한 움큼씩 집어 먹으며 가게 입구와 자리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우린 두 눈을 의심하며 다 같이 배가 아플 때까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신기하게도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기억에 꽤 오래 남는다. 그 에피소드들이 쌓여 오래 추억하고 이야기하며 돈독해지는 사이도 있다. 긴장이 풀린 느슨함이 만들어주는 끈끈함은 꽤나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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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속의 술

내게 와인은 그런 의미에서 온기의 술이다. 혼자 마시는 와인은 몸을 덥혀주어서, 함께 마시는 와인은 그 사람(들)과 나 사이의 서운하거나 서먹한 마음을 녹여주어서.. - 본문 51p

(중략) 하지만, 술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복잡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술은 술술 넘어가면서 그때의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함께 이동시킨다. 내 안에서 밖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중략)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는 아이처럼,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서 별 눈치 보지 않고 떠드는 아이처럼 단순해질 수 있게 한다. - 본문 76p


소주, 맥주, 사케, 와인, 위스키 등 어떤 술이 가장 좋냐고 물으면 아직은 잘 모르겠다. 추운 날씨에 포장마차에서 먹는 우동과 소주 한 잔은 꽤나 오래 간직해 온 낭만이고. 더운 여름, 시원하게 들이켜는 생맥주 한 잔은 무더위에 녹아버린 의욕을 되살리는 비법이고. 유난히 긴장도가 높았던 하루, 일과 끝에 잠들기 전 마시는 와인 한 잔은 힐링인 걸.​


꽤나 복잡한 사람들 속에서, 눈치보기 바쁜 삶에서. 마음을 녹이고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질 수 있도록


돕는 매개체가 술이라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100% 동의가 된다. 술을 마시고 하는 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고, 흐트러지는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글쎄.. 나는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다른 게 아닐까 싶다.


항상 곧게 힘주어 살아갈 순 없지 않나? 노곤노곤하게 풀어지는 순간이 좋을 때도 있다. 어떤 순간에 술은 용기를 주고, 어떤 순간에 술은 한 걸음 정도 마음의 거리를 좁혀주고, 어떤 순간에 술은 오늘을 버텨낼 위로를 주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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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속의 술

(중략) 누군가에는 게임이고 도박이고 카드고 약물이고 쇼핑이듯이. 다정히 마음 둘 곳을 찾아서, 자꾸 실패하는데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잘못을 돌이키고 자책하고 싶지 않아서,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준 게 미안해서 술을 집어든다. 특별히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방식이 그렇다. - 본문 34p


무엇보다도 술과 농담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중략) 술을 마실 때, 취기가 오른 심신의 상태와 술자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그 속에서 농담은 셀 수 없이 피어오르고 사라지고, 다시 피어오른다. 알코올이 공기 중에 섞여 들고 흩어지듯이, 말들은, 의미가 있든 없든, 그 자리에 섞였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하며, 보이지 않는 자취를 남기며 사라진다. 그렇다. 무언가를 남기며 사라지는 것, 사라지면서 남겨지는 것, 그것이 술과 농담의 공통된 존재 양태가 아닐까. - 본문 68p


24살에 처음 마셨던 술을 아직도 기억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향에 민감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면 안 되는 건 줄 아는 나는 지각 한 번, 결석 한 번 안 하는 착한(?) 학생이었고 그건 대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제대로 술을 접하고 배운 건 첫 직장에서였고 애주가 여자 이사님께 스파르타식으로 술을 배우면서 힘든 회사생활에 울고 웃었던 기억들이 많이 남아있다.

곰곰이 곱씹어보면 술이라는 장치는 꽤나 신기하다. 별 것 아닌 농담이 배가 아프도록 웃기기도 하고, 이해되지 않아 씩씩대며 화가 나던 일들도 부딪히는 한 잔에 인류애가 생긴 건지 언제 그랬냐는 듯 잊히기도 하고. 맨 정신에 서로를 할퀴던 날 선 대화들이 동글동글하게 서로의 마음에 가닿기도 한다. ​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얼음처럼 딱딱한 상태에서 얼음벽과 같이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이처럼 술도 수많은 사람들의 멀어지고, 굳어지고, 무너진 마음을 깨뜨려 위로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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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몫 2%

"위스키는 숙성시키는 동안 매년 2퍼센트에서 3퍼센트 정도가 증발하죠. 그걸 '천사의 몫'이라고 해요" (중략) 그것은 어떤 상실, 유실, 증발, 휘발, 혹은 그 모든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것들의 몫일 수도 있으리라. 아니면 살면서 내가 운 좋게 가진 것들, 그것들을 갖기 위해 알게 모르게 내가 잃은 것들의 이름일지도. 그러니 '천사의 몫'은 결국 잃었지만 잃은 줄도 모르는 것이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 잃었기에 얻게 된 무엇이기도 하다.



천사의 몫이라니, 표현이 참 예뻐서 기록하고 싶었다. 이 단락은 곱씹을수록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숙성을 통해 술이 술로 탄생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되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증발했을까? 또 인생에 수많은 선택을 해오면서 어떤 것들을 잃고 대신 어떤 것들을 얻었나.

잃은 것보다 얻은 것에 주목하는 삶을 살면 천사의 몫 2%는 내가 빼앗긴 게 아니라 선물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하도 술 얘기를 해서 마시지도 않았는데 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중간중간에 이해되지 않는, 읽히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술이라는 주제와 어울리는 듯했고 6명의 소설가가 써 내려간 술에 대한 이야기들이 꽤나 흥미로웠다


술 속에 진리가 있다는 농담이 유의미해지는 지점.


<자아의 세속적, 논리적 측면이 약화되며 사유가 유연해지는 것>이라는 큰 틀 안에서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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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 해롭습니다.

마음이 노곤노곤해지는 딱, 그 정도로만 즐기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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