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엥겔스의「공산당 선언」서평
마르크스, 사회주의, 공산주의, 좌파, 빨갱이.
최근 김상곤 장관 후보자가 휩싸인 이념 논쟁만 보아도 우리사회에서 ‘마르크스’는 꽤나 민감하게 통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우리사회에는 실체 없이 사람들의 불안만을 조장하는 마르크스 유령이 떠도는 것 같다.
도대체 마르크스는 누구인가?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였는가? 왜 혁명을 주장하였는가? 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전 세계가 목도한 것은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를 선택하지 않은 집단이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함께 전 지구적으로 자본주의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담론이 강화되었다.
자본주의 성장체계 내에서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투쟁, 계급과 국가의 경계 약화와 같은 마르크스의 주장은 자본의 증축을 방해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대안적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는 이유로 자본주의의 모든 부조리와 부정의를 감수하고 자본주의의 끝없는 발전을 추구해야 하는가? 필자의 생각에, 마르크스가 가진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마르크스와 같이 ‘계급과 국가 없는 사회’를 꿈꾸지는 않더라도 문제 많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에 「선언」은 마르크스가 왜 ‘단결’과 ‘혁명’과 같은 급진적인 대안밖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선언」-우리나라에는 「공산당 선언」으로 발간되었다-은 마르크스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 엥겔스가 작성한 공산주의 강령이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공통적인 문제의식과 불완전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선언」을 처음 발표한 이후 1879년 서문에서 “원칙들의 실천적 적용은 당대의 역사적 조건들에 좌우될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 조치를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겠다”고 덧붙인 바 있다. 즉, 「선언」을 관통하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 일반적인 원칙의 현대적 적용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오늘날의 「선언」 읽기는 공산주의가 문제 삼았던 견고한, 그리고 부정의한 자본주의 사회질서를 오늘날의 그것과 비교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어야 한다.
「선언」은 총 네 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의 두 장은 자본가 계급인 부르주아지와 임금 노동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관계와 공산주의자의 위치를 밝혀둔 장이다. 뒤의 두 장에서는 여러 사회주의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공산주의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바라보는 사회는 억압하는 계급과 억압받는 계급 사이의 반목으로 이루어진다.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억압자인 부르주아지와 피억압자인 프롤레타리아트가 공공연한 혹은 은밀한 투쟁을 벌여오고 있다. 그러나 두 저자가 보기에 두 계급의 관계 양상은 이전의 것과는 상이하다.
먼저, 저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이 생산수단을 전유함으로써 상호 경쟁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양산하고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신분의 종속 없이도 임금노동을 바탕으로 생산수단을 갖지 않은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다. 임금노동은 노동자 간의 경쟁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는 뿔뿔이 흩어져 상호 경쟁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양산한다. 또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점차 늘어난다. 왜냐하면 현대 산업이 운영되는 규모를 감당할 수 없는 영세한 자본가는 대규모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압도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락하고, 생산방식의 끝없는 혁신과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인해 개인이 가진 생산수단은 쓸모없어지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보기에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소수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대중, 두 개의 커다란 적대 진영으로 양분되었다.
저자들은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비대한 생산력으로 인해 부르주아 역시 속박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내부 모순과 필연적인 악순환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동안 모든 산업 계급들은 생산양식을 고수함으로써 유지되었으나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의 증축을 통해 생존하므로 판매를 위한 끊임없는 시장 확대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곳에서 생산과 소비의 범세계적인 성격을 확립해야만 한다. 과도한 문명화와 과도한 생산수단, 과도한 공업과 상업은 공황을 야기한다.
부르주아 사회의 조건들은 너무나도 협소하여 자신이 만들어낸 부 조차 포용하지 못한다.
모든 시기에 공황이 있어왔으나 자본주의와 함께 발생하는 공황의 특징은 과도한 생산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은 과도한 소비를 부추기는 한편, 새로운 시장을 정복하고, 기존의 시장을 더욱더 철저하게 착취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더욱 파괴적인 위기를 조성하고 위기를 차단할 대책조차 줄어들게 한다. 요약하면, 부르주아 계급은 생산도구, 그에 따른 생산관계의 혁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이것이 부르주아 계급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더불어 저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이 생산 수단을 소유하면서 자산을 소수의 손아귀에 집중시킨 결과 정치 또한 중앙 집중화 되었다는 점도 지적한다. 부르주아 계급은 현대 공업과 세계 시장이 형성된 이후, 독점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게 되었으며 결국 국가의 권력은 전체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는 더 이상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하에서 유지될 수 없으며, 그들의 존재는 더 이상 사회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보여주는 자본 계급사회의 면면은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사회 양극화,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공황위기와 악순환, 지배계급의 사회적, 정치적 지배력 독점, 국가의 국민보호 역할의 실패. 저자들은 문제의 원인이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반을 둔 생산과 점유, 즉 부르주아적 소유에 있다고 보기에 이를 폐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혁명이 봉건적 소유를 폐지한 것처럼 말이다. 이에 「선언」에서 부르주아적 소유를 폐지하기 위한 10가지 조치를 제시한다. 이 조치에는 모든 토지를 공공목적으로 임대하거나 모든 상속권을 폐지하는 등 급진적인 정책이 포함되어 있으나 높은 비율의 누진소득세 적용, 지역 불균형 폐지 등은 현재 시행되는 정책이기도 하다. 「선언」은 낡고 고리타분한 옛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억압의 조건, 새로운 형태로 변형된 현재의 투쟁을 직시하게 하는 유용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없애려는 것은 노동자들이 단순히 자본의 증대를 위해 살아가며, 지배계급의 이익이 요구하는 정도 내에서만 사는 것이 허용되는 전유의 끔찍한 특성인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 이전에도 여러 사회주의 운동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간 사회주의 운동을 반동적 사회주의, 부르주아적(혹은 보수적) 사회주의, 공상적 사회주의 운동으로 분류하며 그 한계점을 밝혔다.
반동적 사회주의 운동은 봉건사회에서 부르주아사회로의 이행과정 중 반동적으로 발생한 운동이다. 예컨대, 봉건귀족들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떠오른 부르주아 계급을 고발하는 척하는 봉건적 사회주의 운동, 프롤레타리아 편에 선 문필가들이 중간계급의 관점에서 노동자 계급을 지원하는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운동 등이다. 저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에게 집중되는 자본과 토지의 문제, 과잉생산과 공항의 문제는 입증하였으나 이전 시대로 회귀하는, 지극히 나머지 반동적이고 몽상적인 대안에 그치는 한계를 보였다.
부르주아적 사회주의 운동은 부르주아 사회의 존속을 위해 사회적 불만과 투쟁을 시정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여기서 변화란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의 존속을 기반으로 한 행정적 개혁일 뿐이다. 여기서는 자유무역, 보호관세와 같은 조치, 심지어 부르주아 계급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이 된다. 저자들은 부르주아적 사회주의를 프롤레타리아에게 현 사회의 경계 내에 머물러 있으면서 부르주아 계급과 관련된 증오를 모두 버리도록 요구하는 운동으로 파악했다. 현대 부르주아 사회조건의 모든 장점을 가지려하지만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투쟁의 위험만은 배제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특히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은 계급의 모순을 조화와 평등으로 폐지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공상적 사회주의 운동은 생시몽, 푸리에, 오언 등이 주창한 사회주의 운동이다. 그들은 혁명적 행동을 거부하고 평화적인 수단으로 ‘팔랑스테르’의 건설, ‘공동부락’의 확립, ‘작은 이카리아’의 구성을 꿈꿨다. 저자들은 이러한 실험들이 계급 구별을 초월하여 모든 사회 구성원의 조건을 개선시키기를 원하면서, 소소한 실험으로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공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비판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의 감성과 지갑에 호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 운동을 넘어 단결과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것을 주장한다. 부르주아 계급이 전유하던 생산수단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단결하여 지배계급을 떨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최선이라고 확신했던 방법이 오늘날에도 최선의 방법인지, 당시 공상적이라고 여겼던 사회주의 운동이 여전히 공상에 불과한지 따져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19세기 「선언」 제기된 자본주의 사회의 부정의, 불공정의 문제는 21세기에도 해결되기는커녕 심화되고 있다. 당시에 존재했던 여러 가지 대안운동은 또 다른 모습으로 오늘날 존재한다. 누가 운동의 주체가 되고,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이행하는 것이 최선일 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이다. 이때「선언」은 비판적으로 검토할만한 좋은 참고서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더 이상 유령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