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서평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심이 된 개신교를 일컫는다. 마틴 루터는 1517년,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기존 교회에 대한 ‘95개 논제’ 반박문을 작성하며 종교 개혁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루터주의를 중심으로 칼뱅주의, 침례교, 퀘이커쿄 등 각기 다른 강조점을 가진 교파가 등장했다. 문자 그대로, 프로테스탄트는 로마 카톨릭 교리에 대한 반동으로(protest) 등장한 집단이다.
여러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사상은 주로 종교사적 관점에서 조명되어 왔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 사상은 기독교 분화의 역사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유물이 아니라, 근대 사회적 삶의 형식에까지 지속된 어떠한 내적 특징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막스 베버(Max Weber)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을 바라보는 차별화된 시각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종교사회학적 관점의 탐구 대상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주목하고,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라 부를만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티즘의 존재 방식과 동기를 소급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정신’이란 표현은 다소 생경하다. 가이스트(geist), 즉 ‘정신’을 베버가 위치했던 독일의 지적 전통 안에서 이해해 보자면, 헤겔의 ‘정신’과도 유사한 의미로 볼 수 있겠다. 헤겔은 ‘정신’을 개인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와 세계가 중심을 이루는 의식의 한 형태로 보고, 특정시대를 관통하는 절대정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베버 또한 자본주의 시대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한 의식의 형태를 상정하며, 그 기원을 밝히고자 한다.
책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문제 제기다. 여기서는 근대 자본주의의 ‘합리적’ 금욕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 노동 사상과 끊임없이 오버랩 된다. 이때 밴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글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드러내는 중요한 예시 자료로 제시된다. 시간과 신용이 곧 돈이고, 근면과 검소, 시간엄수와 공정이 젊은이를 출세시킨다는 내용의 설교문인데, 저자가 보기에, 이 글을 통해 설파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독특한 ‘윤리’이다.
프랭클린의 모든 도덕적 훈계는 공리주의적으로 지향되어 있다. 정직은 신용을 낳기 때문에 유용하며 시간 엄수, 근면, 검소 등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것들은 미덕이다.
사실 물욕 또는 출세욕은 자본주의 시대의 신제품도 아니고 그 필연적 결과물도 아니다. 자본주의는 중국, 인도, 바빌론, 그리고 고대와 중세시대에도 존재했으나 서구 근대 자본주의처럼 물질과 출세를 위한 합리적 금욕이 “윤리적 색채를 띤 격률”처럼 작동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저자는 ‘성실한 노동자로 살아가기'를 신성한 임무이자 미덕으로 승격한 독특한 자본주의 ‘정신’을 마주하면서 ‘종교’를 떠올렸던 것 같다.
근대적 직업노동이 가진 금욕적 특성을 역사적 종교 사상에서 찾는 시도가 2부의 내용이다. 저자는 칼뱅주의, 경건주의, 메서디즘, 침례교 운동 등이 그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칼뱅주의에서 유래된 영국 청교도주의가 근대적 직업 사상에 대한 가장 철저한 정초를 제공했다고 분석한다. 이에 따라 청교도주의의 대표 문서로 볼 수 있는 리처드 벡스터(Richard Baxter)의 글을 집중적으로 살핌으로써, 청교도적 직업관과 금욕적 생활방식의 요구가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저자의 분석내용을 요약하자면,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은 낭비적 향락, 소비(특히 사치재 소비)를 봉쇄하면서 동시에 재화 획득에 대해서는 전통주의적인 윤리에서 해방시켰다. 그리고 “노동을 직업(소명)으로,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유일한 수단으로" 파악하면서 이익의 추구를 신의 뜻이라고 간주하게 했다. 오락은 혐오대상이며, 오직 노동을 위한 기분풀이라는 합리적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했다. 결국, 청교도적 인생관은 “부르주아적 직업 에토스(ehhos)”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생활방식을 부추겼으며 “근대적 경제인의 요람”이 되었다.
직업사상에 입각한 합리적 생활방식은 기독교적 금욕의 정신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근대 자본주의에 입각하는 문화 형태, 사회·정치적 조직(하부구조)의 어떤 측면이 종교개혁 시대의 정신적 내용(상부구조)의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한두 가지로 설명하기에 하부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상호영향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저자도 인정하듯이, 일정한 형태의 신앙과 직업윤리 간의 친화성이 인식될 수 있는지 여부 정도만을 탐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날카로운 분석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흐름이 ‘헐렁’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의미가 있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노동과 직업, 여가 생활에는 베버가 말하는 자본주의 ‘정신’ 혹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의 ‘헐렁한’ 상관관계 추적연구로 보기보다는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종교적 비유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직업 노동의 근면한 수행과 신용 축적을 통한 성공 신화, “잡담”은 무익하며 여가의 필요성은 직업 노동의 지속에 있다는 믿음은 시장자본주의를 추동하는 종교에 가까워 보인다. 금욕적 합리주의로 표현되는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은 오늘날에 어떻게 변형되어 표현되고 있는지 또 어떤 경로로 유포되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청교도는 직업인이기를 바랐다. 반면에 우리는 직업인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금욕이 수도원 방에서 나와 직업생활에 옮겨지고 현세적 윤리가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이 금욕은 나름대로 근대적 경제질서라는 강력한 우주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