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인의 <공간으로 세상 읽기> 서평
“공간을 사유나 성찰이 아니라 계획과 개발의 대상으로 여기는 시대정신… 경제부국과 공간빈국의 불편하고도 창피한 공존- 이것이 이 책의 화두다.
우리나라에서 공간에 대한 사유는 ‘부동산’으로 함몰되는 경향이 있다. ‘놀고 있는 땅’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어 건물을 세우고 자산가치의 증식을 땅의 존재 이유로 만들어 버린다. 공간이 시장경제에 포섭된 채 유독 기술공학적으로 접근되는 것은 왜 일까? 이를 공간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감수성과 통찰력, 상상력이 부족한 탓으로 보고, 인문사회학적 통찰을 시도한 책이 전상인 교수의 『공간으로 세상읽기-집·터·길의 인문사회학』이다.
전 교수는 우리나라가 명실 공히 경제 부국의 대열에 올랐으나 공간의 사유에서만큼은 빈국으로 남았다고 판단하면서, 수치화 되지 않은 공간지식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지역·도시 단위 공간지식의 정체성과 자율성이 부재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설상가상 최근 인문학 붐을 타고 형성된 공간담론은 복고풍 민족주의나 도덕적 포퓰리즘, 건설행위에 대한 무조건적 반감으로 치우쳐 현실성과 균형감을 잃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전 교수가 다루고자 하는 공간은 그동안 제한적으로 사유되었던 주거나 이동 공간이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은 우리의 생활공간, 볼노 식으로 말하면 ‘체험공간’에 대한 사유를 인문학적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이다. 브뤼헐의 <추수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책 표지 또한 그가 분석하는 공간이 수 세대에 걸쳐 사람들의 기억과 역사가 아로새겨진 공간임을, 결국 인문학적 성찰 대상으로서의 공간임을 염두에 두도록 만든다.
책에서 ‘집, 터, 길’로 범주화된 공간은 주로 아파트, 도시, 철도와 도로 등 근대적 공간이며, 이 공간들이 어떻게 탄생하고 진화하였는지 압축적으로 조망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공간의 변형 및 인문학적 위기, 논의거리를 보다 상세하고 다채롭게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며, 특히 공간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과 논의들 사이에서 시도되는 저자의 인문학적 균형잡기가 특징적이다.
책에서 가장 먼저 성찰의 대상이 된 공간은 근대적 주거공간의 대표 격인 아파트다. 전 교수에 따르면, 아파트는 산업화와 ‘박애주의 부르주아 전략’, ‘순진무구한 아동’, 가족의식과 함께 탄생했다. 즉, 노동자계급의 주택문제 해결과 가족주의,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결합체가 아파트였다. 이후 아파트는 르코르뷔지에의 ‘주거-기계’ 담론과, 하이데거, 바슐라르, 오토 볼노로 이어지는 ‘주거-철학’ 담론 사이의 긴장과 대립을 야기했다. 담론 갈등의 현장인 아파트의 이중성을 바탕으로, 저자는 “아파트 거주에 대한 실제 선호와 그것에 대한 심정적 거부가 공존하는 우리나라의 이율배반적 상황”을 바라본다, ‘어디에, 얼마나 집을 지을 것인가’하는 낡지만 가장 익숙한 질문들과 ‘아파트 때리기’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에 전 교수는 현대 주거공간의 변형을 직시하고, ‘왜, 누구에게 무엇을 위한’ 주거 공간인지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거 공간에 대한 시대성 있는 성찰을 요청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빌리티의 증가, ‘독거 개인’ 등 가족관계 및 가족규범의 변화, ‘스마트 홈’ 담론, ‘집 대신 방’ 풍조가 감지되는 주거 현실이 함께 제시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근대적 주거공간에 머물러 있던 논의를 우리만의 주체적인 시각을 가지고 보다 확장·발전시켜 나갈 필요성이 강조된다.
전 교수는 우리 시대의 ‘터’, 도시에도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마을은 물을 함께 사용하는 생활공동체, 공동 경제에 기반하는 운명공동체로부터 도출된 개념인 데 반해, 도시는 상대적으로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과정을 통해 출현했다. 도시의 탄생과 성장은 지배집단에 의해 선도되면서 “도시인구를 먹여 살리는 농촌이 오히려 도시의 지배를 받는” 도시-농촌 패러독스를 발생시켰던 것이다. 도시는 역사적으로 짐멜이나 벤야민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대도시적 심성’을 초래하며 인간적 삶을 제약하는 공간으로 비판받아 오기도 했다.
그러나 전 교수에게 도시는 비판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도시는 한편으로 오늘날과 같은 인류의 번영에 절대적으로 공헌해 왔기 때문이다. 그에게 도시는 단연코 성찰의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도시의 존재 이유, 즉 도시가 무엇으로 사는지를 성찰하는 것이며, 이러한 인문학적 성찰 없이는 마을이나 공동체에 대한 맹목적 집착, 그로인한 마을 만들기의 행정화·사업화, 시류를 쫓아 ‘행정도시’나 ‘첨단 디지털 도시’를 오가는 도시계획, 개성 잃은 도시의 획일화 내지는 평준화만이 남을 뿐이다. 저자는 이것이 우리나라 도시연구 및 정책의 현 위치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멈포드, 제이콥스, 글레이즈, 홀, 브로델, 칼비노 등 여러 학자들의 도시에 대한 성찰을 소개한다. 인용된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도시에서의 소통과 교류를 바탕으로 누적된 문화의 힘, 다양성과 그에 따른 창조성의 힘을 높이 사는데, 이들의 말을 빌려 저자는 도시의 진정한 가치가 볼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에 있음을, 장소기억과 사회자본을 바탕으로 한 ‘보이지 않는 도시’에 주목해야 함을 역설한다.
이 책의 마지막 분석공간은 근대적 이동공간이라 할 수 있는 철도(기차와 지하철 공간)와 자동차 도로이다. 이 공간들은 이곳저곳을 연결시키는 단순한 기능적 이동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일상생활을 변형시키는 공간으로 조명된다. 이를테면, 철도의 탄생 이후 사람들은 시공간의 수축을 경험했고, 기차시간표처럼 ‘사회적 시간’을 내면화하였으며, 지하철의 경우에도 지하철 노선을 따라 부와 권력이 이동하면서 생활공간, 생활시간, 나아가 인구의 배열과 구성까지도 좌우한다. 이동공간은 오늘날 더욱 빠른 고속철도와 고속도로로 진화하였으며, 저자는 이동공간의 인문학적 위기를 제기한다. 모든 곳의 역사지리적 배경과 장소성이 사라지는 ‘지도 위의 침묵’, 역과 역 또는 거점-거점 ‘사이 공간’의 쇠퇴, 연결된 도시들이 수도로 빨려드는 ‘빨대효과’와 그에 따른 지방문화의 소멸 등이 그것이다.
인문학적 위기에 대응하는 방편으로서 저자가 골목길을 되살리자고 주장하거나 걷기를 권장하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 반대다. 근대 교통체계나 문화에 대한 반동과 반감으로 등장한 골목길 담론, 올레길, 둘레길 열풍은 다분히 공익적이고 실용적 관점이며, 이때 길의 본질과 걷기의 강점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걷기는 본질적으로 오감을 통해 장소성을 발견·형성하는 행위이고, 김훈의 말처럼, 길의 역사에 편입되는 과정이다. 또 겔과 제이콥스가 주장했듯, 길은 걷는 용도만이 아니라 앉고, 서고, 기다리고, 바라보고, 기대는 일이 일어나는 비공식적인 사회활동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이렇게 볼 때,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4,500km의 ‘코리아 둘레길’을 2년 만에 완성하겠다는 계획이나, 고속도로 및 고속철도로 ‘국토의 공장화’를 가속시키면서 ‘수혜’인구나 ‘시혜’지역을 논하는 행태는 인문학적 성찰의 부족을 여실히 드러낸다며 개탄한다. 저자는 길의 계획-사용의 이분법과 기술·공학적 헤게모니를 넘어, 길의 복합적 기능과 다양성 추구, 신유목시대로 접어든 현실을 반영한 공간적 사유, 그저 따뜻한 인문학보다는 사회학적 통찰력이 포함된 사유를 요청한다.
전상인 교수의 『공간으로 세상읽기-집·터·길의 인문사회학』는 근대적 공간의 탄생부터 현대적 변용까지를 살피면서 인문학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데, 저자의 공간에 대한 사유는 낭만적이지도, 조소적(嘲笑的)이지도, 이상적이지도 않으며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철한 편이다. 전통이든 근래의 것이든 과하거나 부족하면 이를 경계하고, 어디쯤엔가 있을 균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방식이다. 압축적 근대화로 인해 우리나라의 집·터·길이 왜곡되었다고 해서 전통 주거방식의 예찬, 공동체에 대한 과잉집착, 걷는 길이 최고라는 식의 대안은 지양된다.
저자는 우리의 생활세계 즉, 집·터·길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독자가 이 시대에 요구되는 주거공간 양식과 필요성, 사회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보이지 않는 기억과 자본, 길의 다양성과 선택의 자유에 대해 답해볼 것을 기대한다. 공간에 대한 균형감을 잃지 않으면서 독자로 하여금 다각도의 시선으로 공간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공간 인문사회학 입문서로서 적합할 것으로 판단되며, 문장마다 펼쳐지는 말의 성찬(盛饌)으로 인해 읽는 재미도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