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멜의 모더니티> 서평
인류가 역사적으로 강력한 사회변화를 경험한 것은 재난, 전쟁, 혁명 등 다양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예컨대 1,2차 세계대전이나 산업혁명은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회적으로 주목할 만한 변화와 혼란이 감지되면 사람들은 이를 진단하고 기원을 탐구하면서 이해하고 싶어 하는데, 이것이 사회학의 출발점이다. 거대한 사회적 전환에 직면하여서는 수많은 사회학자들이 각양각색의 의견과 해석을 내어놓았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1858~1918)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생애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그는 근대를 살았다. 근대의 탄생이라 볼 수 있는 프랑스 대혁명(1789~1794) 직후부터 19세기 초 산업혁명이 일단락될 때까지, 역동적인 변화의 시기가 그의 생애와 정확히 맞물려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짐멜이 이전 시기와는 구분되는 근대의 특성, 즉 모더니티를 이해하고 규명하고자 한 시도는 상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는 에세이, 발표문, 강연 원고 등 그의 다기한 시도들을 김덕영, 윤미애 교수가 추려 모은 책이다.
짐멜은 화폐, 도시, 장신구와 같은 물질부터 소외, 감사, 믿음, 부끄러움과 같은 심리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주제로 근대의 단편들을 수집함으로써 모더니티의 그림을 완성하고자 했다. 그 중 <현대문화에서의 돈 Das Geld in der modernen Cultur>(1896)과 <대도시와 정신적 삶 Die Großstädte und das Geistesleben>(1903)은 그의 모더니티 이해가 잘 드러나기에 주목할 만하다. 전자는 그의 대표 저서 <돈의 철학 Philosophie Des Geldes> (1900)이 출판되기 4년 전 학회에서 발표한 글이다. 여기서는 근대의 경제적 토대가 되는 화폐가 어떻게 개인들의 사고와 정신에 영향을 치미는지, 근대성의 어떤 측면을 형성하는지가 탐구된다. 후자는 본래 책의 서문으로 기획되었던 글로, 대도시인의 근대 특유의 심리상태가 규명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짐멜이 이해한 모더니티는 화폐 경제와 대도시로부터 시작된다.
대도시에 작용하는 힘들은 역사적 삶의 뿌리와 정점에 자리 잡고 있고 우리는 그러한 삶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과제는 오로지 이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
짐멜은 모더니티의 중심에 도시를 놓아두고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는 당시 사회변동의 무대이자 이전과는 다르게 새로운(모던한) 사회를 설명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짐멜이 근대의 표상으로 본 도시는 대도시이다. 그는 대도시적 삶의 리듬을 소도시 혹은 시골의 그것과 비교하는데, 소도시나 시골의 생활은 관습과 습관, 무의식, 정서적 관계에 의존하는 반면, 대도시적 삶은 지적 성격을 띠고 오성에 뿌리를 두며 이성적으로 영위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대도시적 특성은 그가 논의를 전개하는 기본 바탕이자 배경이다.
대도시가 화폐 경제의 본거지라는 주장은 그가 해석한 모더니티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교역이 활발한 대도시에서 교환수단인 화폐가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화폐 경제가 담지하는 객관성과 자유가 대도시에서 보편적으로 전개되고 대도시인의 삶을 형성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의미이다. 즉, 짐멜이 보기에 대도시는 객관성과 자유의 본거지이자 모더니티의 전형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현대문화에서 돈>과 <대도시인의 정신적 삶>를 살펴보면, 어떻게 객관성과 자유의 모더니티가 화폐경제로부터 탄생하며 대도시인들이 행동과 삶에 축적되는지가 선명해진다.
짐멜에 따르면, 모더니티의 두 측면인 객관성과 자유는 자연경제에서 화폐경제로의 이행과정에서 태동했다. 그는 화폐사용의 객관적 특징을 회중시계의 보급효과에 빗대어 표현하였는데, 모든 관계에 정확성과 정밀성, 객관적이고 무차별적인 성격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유사하기 때문이다. 화폐경제는 경제적 교환 대상에 등가물이 내포되어 있다고 가정하기에 등가교환을 통해 사물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평등화 과정이 진행된다. 교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존재들도 교환의 흐름 속으로 부단히 편입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질적 가치가 양적 가치로 환원되며 모든 근대인의 삶의 양식은 객관적인 규정으로 교환된다.
화폐경제에서 엿볼 수 있는 또다른 특징은 자유이다. 이전 시대와 달리 근대인은 ‘소유의 인격성’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짐멜이 보기에, 토지 소유가 개인 인격 그 자체를 드러내거나, 인격적 권리가 토지 소유에 의존했던 자연경제의 인격-소유 상호의존성은 화폐경제에 의해 해체되었다. 근대인은 돈을 주고받는 원칙적인 관계로 결합되고, 화폐를 지불함으로써 그동안 구속되었던 모든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화폐 경제는 한편으로는 객관화 과정을 통해 수평적·보편적 이해관계와 의사소통수단을 제공해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해방을 통해 개인의 독립성·자율성·개체성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특성은 흡사 신처럼, 사람들에게 통일감과 안전하고 평온한 느낌까지 제공했는데, 여기에서 짐멜은 돈을 ‘우리 시대의 신’이라고 비꼬며 부정적인 입장을 표한다. 무차별적 교환이 모든 가치를 가장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면서 야기된 ‘수평화의 비극’, 인간적 삶의 진정한 가치의 해체, 익명 관계 속에서 강력한 개인주의의 대두, 소유를 위한 가장 효율적 수단으로서 돈에 대한 환상과 주객전도식 열망 등은 짐멜이 보기에 매우 우려스러운 근대의 단편들이다.
객관성과 자유의 모더니티, 화폐경제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밝힌 짐멜은 이제 모더니티의 비옥한 토양, 그래서 상당히 불안하고 염려되는 곳으로서 대도시를 지목한다. 그는 화폐경제가 먼저였든, 근대의 정신이 먼저였든 간에 사회변동의 한 가운데 위치한 대도시인의 삶은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시대흐름에 대응하여 대도시의 개인들이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 스스로의 개체성을 어떻게 유지하거나 발전시켜 나가는지를 살핀다.
삶의 요소들 간의 관계는 정확성과 확실성, 약속과 협정의 명확성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성이 나타나게 된 원인이자 결과는 대도시의 조건들이었다.
짐멜은 전형적인 대도시인이 이성적이고 냉담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둔감하다고 보는데, 이는 대도시 환경에 대한 방어 매커니즘 중 하나다. 대도시의 삶에서 내적·외적 자극이 팽창하고, 업무 및 인간관계가 복잡해짐 따라 대도시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정확성과 치밀성이 요구된다. 그들은 다양한 차이를 일정하게 혹은 공허하게 받아들이면서 둔감해 질 수밖에 없으며, 대도시의 모든 자극에 반응한다면 그들의 삶은 ‘신경과민’으로 귀결될 것이다. 짐멜은 대도시 특유의 냉담함과 둔감함을 화폐경제의 객관성과 비인격성이 대도시 안에 침투된 것으로, 화폐경제의 지성주의적 성격이 반영된 대도시의 정신적 삶으로 본다.
한편, 대도시는 자유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사소한 인격적 의무와 관계로부터, 결속력을 지닌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치밀한 감시와 제한으로부터 대도시인은 ‘자유’롭다. 이에 대도시에서 사람들 사이에 신체적 거리는 협소하나 정신적 거리는 상당하다. 짐멜에게, 대도시인의 ‘상호 무관심’, ‘속내 감추기’, 혼잡 속에서 느끼는 외롭고 쓸쓸한 감정 등은 자유의 이면으로 해석된다.
대도시 특유의 과장된 행동, 이를테면 멋 부리기나 유별남, 변덕 또한 모더니티의 도시적 발현으로 설명된다. 객관성이 우세하여 주관 정신은 뒤쳐진 근대, 모든 관계로부터의 자유와 개별화를 추구해 온 근대사회에서 어느 한도에 이르면 사람들은 질적 특수화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때 대도시에서 분업이 발달하여 일면적인 업적만이 요구되는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 만남이 짧아 개인의 인격이 위축되는 조건들은 개인이 개성을 강조하려는 시도를 고취시킨다. 정리하면, 짐멜의 글에서 대도시는 화폐경제의 근대적 측면과 근대인의 정신적 삶 사이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며, 대도시의 고유한 조건을 기반으로 모더니티의 전개가 설명되는 것이다.
짐멜은 미증유의 사회변동을 목도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특성 즉 모더니티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그의 해석은 여타 사회학자들과 차이가 있다. 그는 화폐경제와 대도시를 중심에 두고 대도시인의 삶의 내용 미친 영향을 탐구함으로써 하부구조(경제)가 상부구조(제도·정신·문화 등)를 결정한다는 당시 맑스주의자들의 비교적 단조로운 설명을 벗어나는 한편,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가지고 사회변동을 일축하는 한계도 극복한다. 대도시의 개인들이 ‘속내를 감추고’ ‘둔감’해 지는 현상처럼, 미시적 생활세계를 조명하고 사회변동이 일상에 침투한 결과를 보이면서,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에 대하여 서로를 조건지우는 상호적 관계로 조명하는 것이다. 또 그는 방법론적으로 해석학을 차용한다. -짐멜의 작업을 현상학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한다고 해서 현상학인 것은 아니다. 그의 방법론은 슐라이마허와 딜타이로 이어지는 해석학적 전통을 따른다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그는 근대 도시인의 삶과 문화를 당시 사회경제적 맥락(화폐경제 및 도시사회)과 연관 짓고, 근대의 단편들에 대한 맥락적이고 직관적 논증을 펼치는데, 다소 비약적이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적절한 통찰력이 발휘된다.
짐멜에게 모더니티는 대도시에서 발전하고 대도시인의 삶을 통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모더니티는 도시성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의 글은 19세기 유럽 문화에서 표출된 모더니티의 파편들을 경험하고, 도시와 모더니티의 친화력을 가늠하기 충분하다.
“정신적·지적 기조가 먼저 형성되고 여기서 화폐경제가 파생된 것인가, 아니면 거꾸로 화폐경제가 정신적, 지성주의적 기조를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였는가… 확실한 것은 대도시적 삶의 형식이 이러한 상호작용의 가장 비옥한 토양이라는 점이다.